천자문(千字文) 이야기 서문
중국의 상(商)나라 시기 갑골문(甲骨文)에서 오늘날의 해서(楷書)에 이르기까지 숱한 비바람을 견뎌온 한자(漢字)는 뜻글자[表意文字]로서 글자 하나하나마다 고유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의 그 사기(史記)를 읽을 수 있다. 이는 한자가 한 글자 한 글자 저마다 지닌 함의가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시공을 초월하여 유지하는 성질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자는 그 뜻을 충실하게 하고,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시류에 따라 변화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상 그 본뜻을 거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中共이 표방(標榜)하는 간체자(簡體字)는 표의(表意)도 표음(表音)도 아닌 채 이미 그 문화적인 정수를 상실했다. 문자가 함유한 본뜻을 왜곡한 의미 없는 도형으로 전락한 모양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또한 바로잡아야 할 인류문화가 아닌가.
창힐은 중국 고대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으로 네 개의 눈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에 보면 창힐(倉頡)이 문자[漢字]를 만들자 “하늘이 곡식[粟雨]을 비처럼 뿌리고, 귀신이 밤새도록 울었다. 또 백익(伯益)이 우물을 파자 용(龍)은 흑운(黑雲)을 타고 사라졌으며, 신(神)은 곤륜(崑崙)으로 피하여 살았다. 이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슬기로워지면 그만큼 덕(德)이 엷어지기[能愈多 而德愈薄矣]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이렇듯 옛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문명의 이기(利器)가 사람의 본성에 미치는 해악을 헤아렸다. 그래서 사람은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사람의 타고난 착한 품성을 잃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옛 사람들은 이처럼 천지의 만물(萬物)과 서로 맞닿아 있는 한자 속에는 천기(天機)가 숨어있다고 했다. 당연히 인간의 도덕과 문화의 내포도 들어 있다. 그렇다면 한자를 배운다는 것은 사람이 지혜의 문을 열고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이러한 한자를 공부하는 입문서로 ‘천자문(千字文)’을 꼽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예전, 서당에서도 천자문을 쓰고 암송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천자문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명군으로 칭송받은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뜻을 헤아려 당시 학문이 뛰어난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책이다. 이것이 최초의 천자문은 아니지만 역대로 가장 완성도가 높고 배우기가 용이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져 널리 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구[一句]에 넉자씩 천개의 글자로 짜여 있는 천자문은 자연현상과 인간의 역사와 인륜도덕이 고루 담겨 있는 교양서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한자를 익히는 것은 물론, 옛 사람들의 지혜를 본받아 자기를 성찰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자의(字義)에 관한 풀이는 단옥재(段玉裁)가 주석을 단 ‘설문해자(說文解字)’를 근거로 삼았음을 미리 밝혀둔다.
김태홍(金台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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