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조선창업(朝鮮創業)과 한양천도(漢陽遷都)

hellofine 2010. 6. 11. 12:05

 

조선창업(朝鮮創業)과 한양천도(漢陽遷都)

 

 

李氏朝鮮太祖 李成桂는 무혈혁명으로 高麗王氏의 뒤를 이어 西紀1394年 7月 開城 昌宮에서 즉위식을 성대히 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였다. 즉위하면서부터 태조는 천도할 것을 결심하였다. 새 王朝의 위관을 만백성에게 보이려는 뜻도 있었으나, 또 전해오는 陰陽書에 개성은 신하가 임금을 廢하는 불길한 땅이라는 설에 사로잡혀 고려의 구세력이 아직도 뿌리깊이 파묻힌 開京(開城)을 떠나야 하겠다는 것이 그 중요한일의 하나였었다.

 

그리하여 太祖는 無學大師를 이끌고 鷄龍山, 母岳(京城西), 漢陽 등지를 답사하였다. 그 한때에는 계룡산을 도웁지로 정하고 역사를 한일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좌우도 관찰사 崔崙이 극력 반대하였다. 최륜의 설을 빌면 계룡산은 산이 건조하고 물이 巽方으로 흘러 宋朝 胡舜甲의 書에도 있듯이 水長生은 破局되어 쇠퇴에 들어있으므로 불길하다는 것이다.

 

이에 태조는 최륜의 말을 옳게 여기어 다시 權仲和⦁鄭道傳에게 명하여 하륜의 설을 기초로 고려시대 여러 山陵의 基幹을 조사하게 하여 吉凶을 알아보았던바 과연 최륜의 설이 맞았다. 이리하여 급히 착수하였던 계룡산 공사를 중지하고 다시 권중화⦁趙浚들에게 명하여 한양 근방에 도읍지를 구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漢陽 母岳을 조사하고 돌아와 母岳 남쪽(現 延禧洞 근방)이 王都되기에는 적합하나 明堂地로는 협소한 감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崔崙은 좁다하나 開城이나 平壤에 비하여 넓으니 이곳에다 王都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굳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러 臣下들은 母岳國都를 반대하였다.

 

이와같이 의론이 분분하게 된 까닭은 당시 風水地理學을 두고 사람마다 前朝以來에 전해오는 비록에서 얻은 의견과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드디어는 鄭道傳을 필두로 하여 천도 상조설마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는 굳이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조가 망한 것은 地德이 쇠퇴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던 때문이다. 태조는 친히 母岳을 답사하고 漢陽을 國都로 정하고 無學大師에게 물으니, 『이 땅은 사면이 秀高하고 중앙이 평판하여 도읍지로 더 이를 때 없는 땅이 옵니다 』라고 대답하여 오랫동안 문제되었던 國都는 드디어 漢陽으로 정해 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양 遷都의 준비는 진행 되었다. 동년 9월에 權仲和⦁鄭道傳에게 명하여 宗廟, 社稷, 궁궐, 朝市, 道路, 基地를 考定하고 도면을 제작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얼마나 開京을 꺼려하였다는 것은 新都 工營에 착수하기 전 천도를 결심한 일이다. 各司 工員을 開城에 留守케 하고,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太祖 3년 10월에 漢陽 離宮(客舍) 으로 遷都 하였다. 이날은 참으로 천도의 대업을 단행하여 「서울」을 首府로 정한 기념의 날이다. 태조는 그해 11월에 宗廟와 社稷의 터전을 정하고, 工作局인 임시관서를 설치하고, 鄭道傳으로 하여금 皇天后土의 諸神을 祀하고 金立堅에게 명하여 山川神 에게 祭하여 천하가 떠들썩하게 起工式을 거행하였다.

 

태조 4년 2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그해 9월에는 太廟新宮과 光化門의 여러 宮署가 낙성되었다. 10월 태조는 太廟 낙성을 보았고 新宮에서 群臣에게 賜宴을 베풀었다. 이로써 한적한 이궁에 불과하던 盆地에는 송기 냄새가 풍기는 새 대궐이 들어섰고 정치적 중앙 도시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동아일보 1959-10-25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