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太祖의 建國百話 (이태조의 건국백화)
개벽 제70호, 발행년월일 : 1926년 06월 01일
필자 車賤者 거천자, 기사형태 논설
車賤者
世世豪傑인 그의 家閥
太祖의 始祖는 新羅의 司空李翰이다. 그의 6世孫 兢休가 비로소 高麗에 仕하야 司空이 되고,
其後 第18대에 至하야 李安社(穆祖)라 하는 이가 잇섯스니 그는 本來 全州의 人으로 또한 高麗에 仕하야 宣州(今咸南德源)知事가 되엿다가 微罪를 得하고 (全州에서 監司의 愛妓를 斬殺함) 逃하야 江原道 三陟郡 活*洞으로 移住하얏섯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또한 知縣에서 罪를 得하고 元의 南京(今間島局子街)으로 遠避한 後元에 仕하야 5천戶의 達魯花亦(元의 地方官名이니 本音 따로카치)이 되엿섯다. 그리고 그의 子 李行里(卽翼祖)는 또한 南京의 千호가 되매 女眞諸千戶의 部下가 다 歸附함으로 千戶等이 그를 忌惡하야 사살코자 하니 遂히 逃亡하야 豆滿江의 下流赤島(鏡興東)에 住居하다가 후에 다시 德源府로 移住하얏섯다.
翼朝의 子度祖椿은 蒙古의 名으로 李顔帖木兒이니 또한 元에 仕하야 父職을 襲하고 高麗忠烈王때에 비로소 王에게 謁見하얏스며 度祖는 또 三子가 잇섯스니 次子 子春은 蒙古名으로 吾魯思不花라 稱하는 바 雙城(今水興)에 居하야 亦是 千戶가 되엿스니 그가 곳 李太祖의 父 桓祖다. 그는 高麗恭愍王 4년에 王에게 來朝하야 少府尹이 되엿스니 當時 朝鮮半島의 北部는 대개 女眞族(所謂 野人)의 巢窟로 元國에서 雙城에 總管府를 置하야 此를 支配하엿섯다. 然而元의 舊勢力이 점차 衰微하고 明의 新勢力이 아즉 扶植되지 안이함을 기회로 하야 恭愍王은 北方의 舊領土를 다시 개척하랴고 密直副使 柳仁雨로 東北而兵馬使를 삼아 元의 總管府를 攻擊하매 桓祖는<36> 此에 內應이 되야 불시에 總管府를 攻陷하고 咸洲 以北의 諸地를 회복하얏다. 其時에 桓祖는 그 功으로 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야 東北境을 鎭撫하더니 恭愍王 9년 4월에 불행히 46세를 一期로 하고 逝去하얏스니 以上 穆祖로부터 桓祖까지를 稱하야 李朝의 四祖라 한다.
文武兼全萬戶侯
桓祖는 또 3子가 잇섯스니 長은 元桂(完豊君) 次는 成桂(卽李太祖) 又其次는 和(義安大君)다. 然而其中 次子成桂는 天資가 奇偉하고 神釆가 英邁하며 射術에 長하야 百步穿楊의 才가 有할 뿐안이라 또한 文이 能하야 可謂文武兼全한 豪傑男兒엿다. 그는 高麗忠肅王後 4년 乙亥 10월 11일에 永興郡黑石里에서 呱呱의 聲을 發하야 恭愍王 5년에 22세의 少年으로 東北面上萬戶가 되엿다가 北邊에서 軍功을 屢建하야 未久에 門下府知事가 되엿섯다. 當時 半島에는 北方에 野人의 患이 不絶하고 南方에는 日本汎海의 邊寇(所謂 倭寇)가 各 州郡을 頻頻히 侵掠하야 人民이 安堵치 못하나 政治가 腐敗하고 武備가 頹廢한 高麗朝廷은 此를 擊攘할 人物이 別無하얏다. 그러다가 王禑 1년에 李太祖로 海冠征討를 命하매(其時爲全慶楊廣道都巡察使贊成事) 그는 彼有名한 李之蘭將軍(本佟豆蘭)과 共히 全羅道雲峯에 出兵하야 引月驛에서 當時驍勇無比한 敵將阿只拔都를 射殺하고(之蘭은 其 兜를 射落하고 太祖는 其 口를 射中하얏다.) 餘衆을 討平하니 此가 卽有名한 荒山大捷이다.(今有大捷碑) 그리고 同年 9월에는 또 海州에서 왜*를 대파하니(有躍馬池古跡)이로부터 宇內에 外患이 근절되고 太祖의 聲望이 日로 振揚하야 同王 14년에는 門下侍中으로 躍進하얏다.
三尺劒頭安社稷
然而當時 高麗朝廷에는 二大柱石의 臣이 잇섯스니 一은 李太祖와 가티 門下侍中으로 잇는 武臣의 崔瑩이오 一은 政堂文學으로 잇는 文臣의 鄭夢周엿다. 이 兩人은 麗朝世祿의 臣일 뿐안이라 일반의 信望이 多하야 國家의 大小事를 다 요리함으로 비록 李太祖가 政堂의 椅子를 占하고 잇슬지라도 감히 自由로 威權을 行使치 못하고 따라서 王位占奪의 野心을 遂하기 어러웟섯다. 그럼으로 李는 恒常 崔鄭兩人만 업스면 당시의 天下는 自己手中으로 入하리라 생각하고 또 崔鄭兩人은 생각하기를 北賦南寇를 다 討平하야 天下泰平한 그 시기에 李만 업스면 자기네가<37> 다시 王室을 復興하야 麗朝中興의 大業을 可成하리라 하고 서로 疑懼하며 서로 猜忌하얏다. 그러나 鄭圃隱은 원래 文臣인 故로 露骨로는 李太祖를 除害코자 안이하얏스나(威化島回軍 以前까지는) 崔侍中은 武臣인 故로 기회만 잇스면 李太祖를 除害하랴고 하얏다. 太祖가 侍中으로 잇슬 때에 一日은 엇던 會席에서 聯句를 占하되 「三尺劒頭安社稷」이라 하엿더니 崔侍中은 口를 應하야 대하되 「一條鞭未定乾坤」이라 하니 一座가 다 그 兩人의 大志가 有한 것을 알고 兩人도 또한 그 心事를 相通하야 서로 身邊을 警戒하얏다. 이에 先하야 支那에는 元이 亡하고 明이 新興하매(恭愍 17년에 元이 亡함) 그 革命의 波動은 半島에까지 及하야 高麗朝廷에도 排明親明兩派가 生하얏스니 卽 禑王及李仁任一派는 元과 自來國際上關係를 思하야 排明論을 唱하고 李太祖일파는 大勢上關係로 親明論을 주장하얏다. 如斯히 紛議가 不一하다가 禑王 14년 2월에 高麗의 使節이 明에 往하얏다가 通聘拒絶을 당하고 또 明이 鐵嶺衛를 設하야 鐵嶺以北의 地 를 遼東에 屬코자하니 麗朝의 君臣은 一時激憤하야 攻遼의 議를 發하니 그 主謨者는 卽 崔瑩이엿다. 其時 李太祖는 極力으로 그 大勢의 불리함을 陳言하나 王은 듯지 안코 崔瑩으로 八道都統使를 삼고 昌城府院君 曹敏修와 李太祖로 左右都統使를 삼어 大兵을 率하고 遼東으로 向케 하고 王과 崔瑩은 平壤에 親히 留陣하야 遙히 大兵을 節制하얏섯다. 그러나 이 出兵은 실은 遼東을 征伐코자 함보다 太祖의 威權이 日盛함을 忌하야 그를 外征케 하고 其 機를 乘하야 除害하랴 함이다. (明이 出兵을 問責하면 其 罪를 太祖에게 歸하고 又 戰敗하야도 其 罪를 罰코자 함이다.
六軍不發威化島
却說-李太祖는 曹敏修와 共히 左右軍을 率하고 威化島에 至하니 때는 마츰 夏5월이엿다.
天祐라 할지 神助라 할지 不知하거니와 의외에 시작한 비가 數日을 繼續하야 江水가 크게 漲溢하매 軍馬가 渡하기 不能하고 兵士 中에는 出征을 喜치 안이하는 者가 多하야 中途에 도망하는 자가 태반이나 되엇섯다. 이 形勢를 삷힌 李太祖는 크게 근심하야 部下諸將과 善後策을 議하니 南誾 南在等 諸部下가 獻策하되 우리의 弱軍으로 新興하는 明의 强國을 攻함은 餓虎의 口에 弱肉을 投함과 가튼 愚計인즉 早遠히 回軍하야 內政革命을 起함이 可하다 하니 太祖가 크게 깃버하고 이에 全軍을 返하야 京都로 向하니 때에 王은 平壤에 잇다가 變을 듯고 崔瑩과<38> 僅僅 50餘旗를 率하고 蒼皇이 王宮으로 還하얏다. 이에 太祖는 兵을 縱하야 王宮을 包圍하고 평소에 除코자 하던 崔瑩을 奸臣으로 모라 刑殺하고(崔都統臨死時 厲聲曰我若有罪墓上生草 不然則墓不生草 墓在高陽至今不生草號曰赤墳) 王을 廢하야 江華島에 放하고(其後 江陵으로 遷하얏다가 殺함) 曹敏修의 計를 聽하야 禑의 子昌을 立하얏다가(時年 僅9歲) 翌年에 卽時 江華에 放하야 殺하고 神宗의 7世孫 定昌君瑤를 立하야 王을 삼으니 此가 卽 高麗最後의 君主恭讓王이엿다.
農民保護에 着眼한 그의 政策
녯이나 지금이나 무슨 대사업을 하랴는 사람은 먼저 그 時代 그 社會의 人心을 收拾하는 것이 通例이다. 당시 農業國인 高麗는 田制가 크게 紊亂하야 大地主의 兼倂攘*의 弊가 多함으로 小作農民은 극히 생활이 困難하야 安堵하기 不能하고 다만 亂이 起하기를 思하얏다. 그것을 洞察한 李太祖은 趙浚 等과 謀하고 먼저 田制의 改革을 企圖하얏섯다. 그러나 時勢民情을 不知하는 朝臣 中에는 此를 반대하는 자가 多함으로 太祖는 極力主張하야 심지어 反對者曹敏修는 竄遂까지하고 恭讓王 9월에 遂히 田制를 크게 改革하니 人民이 다 太祖의 德을 *歌하고 또 當時 民間에는 「木子爲王」이라는 讖言이 유행하야 일반의 人心이 太祖로 歸順함이 多한 中猛虎有翼과 가티 趙浚 南誾 鄭道傳 河崙 裵克廉 趙仁沃 趙璞 等 50人餘文武官이 다 太祖를 推載코자 하니 革命의 氣雰은 점차 滿都에 濃厚하게 되엿다. 그러나 한가지 忌博되는 人物은 鄭圃隱이엿다. 그는 崔都統의 死한 後로 일개 羽翼을 失하얏스나 아즉 德望이 朝野에 多하고 또 그의 徹底히 忠君愛國의 心은 비록 萬馬의 力이라도 能히 挽回치 못하얏다. 아모리 太祖와 가튼 武力은 업슬지라도 그가 在世한 以上에는 王氏의 寶位를 누가 감히 覬窺치 못할 形勢이엇다. 그럼으로 太祖는 평소에 야심이 有하나 먼저 下手치 못하고 다만 시기의 到來를 企望할 뿐이엿다. 그러나 急進派인 太宗과 趙英珪 等은 먼저 鄭圃隱을 殺害하지 안으면 안이될 줄 알고 壬申 4월 初4일에 善竹橋에서 鄭圃隱을 椎殺하얏다. 이 鄭圃隱의 死는 高麗王朝의 最後悲幕인 동시에 李祖登極宴의 祝賀砲이엿다. 同年 7 월 16일에 李太祖는 上記 裵克廉 南誾外諸人의 推載에 因하야 恭讓王을 廢하고 開城壽昌宮에서 位에 卽하니 多年企圖하던 半島의 主權은 遂히 李氏에게 歸하고 太祖의 時年은 58歲엿다(王氏 34世 凡475년)
可憐龍孫葬魚腹<39>
원래 李太祖는 무슨 根據잇는 名門遺族이거나 德望家學者도 안이요 一個塞外에 漂流하던 武將으로 一時 武力에 의하야 半島의 主權을 掌握하고 當時 開城에는 王氏의 宗族과 麗朝의 遣臣이 基多하야 人心이 아즉 舊朝를 思하는 傾向이 有함으로 此를 統治하고 經持함에 太祖는 극히 困難한 것을 覺悟하고 若心講究하얏다. 例의 封建的 時代의 英雄의 野心을 遺憾업시 發露하야 먼저 王族과 遺臣의 撲滅策을 實現하고 一方으로 그의 懷柔策을 採用하얏다. 그는 卽位翌月에 高麗王祖宗廟를 撤毁하야 麻田郡에 移하고
(太祖가 王氏의 宗廟를 毁하고 其 木主를 大船에 載하야 臨津江에 浮하얏더니 其船이 逆浮하야 麻田縣江 上佛寺前에 自泊함으로 太祖가 其 佛像을 他處로 移한 後 木主를 安置하고 名하야 曰崇義殿이라 하얏다.)
廢王瑤는 恭讓君으로 降封하야 原州에 移하얏다가 다시 杆城에 遷하고 또 干氏의 全族은 다 江華 巨濟兩島에 分置하엿다가 翌年 5월에 命을 下하야 王氏의 巨濟에 在한 자를 出陸케 하고 才藝가 有한 자를 登用할 旨를 전하더니 3년에 至하야 東萊縣令 金可行 場官 朴仲質 等이 國家의 安危와 王氏의 運命을 密城盲人 李興茂에게 卜하다가 發覺되고 또 叅贊 朴葳도 關孫가 有하다 告하는 자가 有함으로 此를 捕拿治罪하고 恭讓王 及 其二子는 三陟으로 移遷하고 出陸한 王氏를 전부 巨濟로 復遷하더니 未幾에 謀臣의 勸誘에 의하야(刑曹 及 臺聯 凡12回上言) 三陟에 在한 恭讓王三父子를 絞殺하고 江華 及 巨濟에 在한 王氏一族을 다 海에 投하야 殺하고
(初에 太祖가 王氏를 殺코자 하되 罪名이 無함으로 諸王氏를 舟에 載하고 水泳 잘하는 자를 同乘케 하다가 中流에서 海中에 잠입하야 其 舟底를 穿하야다 沈死케 하엿는데 其 時에 一王氏와 親한 僧이 海岸에 在하야 手를 擧하고 呼하니 그 王氏가 一聯句를 衫袖에 血書하야 海岸에 投한바 其 詩曰一聲搖櫓滄波外借問山 僧泰爾何云云이라 하니 僧이 詩를 見하고 통곡하얏다.)
惟獨 廢王瑤의 弟瑀는 其女가 太祖七男芳蕃에게 嫁한 故로 僅히 免死하야 歸義君으로 封하고 麻田의 廟祀를 奉케 하얏다. 그러나 太祖는 아즉 안심하기 不能하야 隊히 令을 中外에 下하고 王氏의 餘族을 盡索하야 誅戮하고 또 麗朝의 裔가 안이로서 王姓인 자도 其 母姓을 從케 하얏다. (太祖가 王氏의 族譜를 按하야 王氏를 일일이 搜殺하는데 夢에 王建太祖가 大怒하야 曰 余가 三韓을 統合하얏거늘 그 功을 知치 못하고 我와 子孫을 滅族함은 何故이냐 汝家도 酷禍를 당할 日이 不遠하리라 하니 太祖가 警覺하고 僅히 一頁에 殘在한 王氏를 免除하얏는데 그 后其子三人이 被死한 후에 太祖가 後悔하얏다.) 그리고 또 麗朝舊臣中에 名德이 有한 者는 擧皆誅竄하니 其中 最히 酷禍를 被한 이는 車諫議原*(당시 소위 4功臣 河崙 趙英珪 咸傳林<40> 鄭道傳 等은 다 車門*婿인데 太宗과 陰謀하고 松麻兩原에서 一夜에 門族 80餘人을 虐殺하고 其 姻婭族戚도 다 極邊에 流竄하얏다.) 李牧隱의 子 種學 及 其門弟 李崇仁 禹易東先生家 等이오. 其外 吉治隱 元天錫 趙狷 南乙珍 等 所謂 杜門洞 70餘人은 모도 山林에 隱遁하야 節을 守하고 開城人은 登極慶科에 不應함으로 連坐하야 幾百年停擧를 命하고 또 太祖自身이 北道武人出身이오 西北의 인심이 强悍함으로 後日子孫에게 遺虞가 잇슬가 恐하야 顯用을 禁하얏스니 이것은 千古에 其比가 無한 惡辣政策이라 云치 안이치 못하겟다.(其實은 太宗과 謀臣輩의 做出할 일이 만코 太祖가 직접으로 한 일은 적엇다.)
國號曰朝鮮
上述함과 如히 太祖는 威壓과 懷柔의 정책으로 인심을 정복하는 동시에 萬般의 制度를 一新코자하야 먼저 國號를 改할새 和寧 朝鮮兩者로 論議하다가 朝鮮이라 改하야 天下에 頒布하고 또 國都를 開城에 仍置하는 것은 統治上 여러 가지 障害가 有함을 생각하고 高麗王朝와 인연이 最遠한 地方을 선택하다가 公州 鷄龍山下(只今 所謂 新都)에 地를卜하고 3년 甲戌에 役을 始하얏다. 그러나 水源이 不足하고 교통이 또한 불편하야 도저히 國都에 적합치 안이함으로 神夢을 托하야 중지하고(國費만 허비하고 공사를 중지하면 國家威信이나 人心統御에 관계가 有할가 恐하야 이에 夢에 神人이 言하되 鷄龍山은 500년후 鄭氏의 所都요 李氏의 都邑은 漢陽이라고 하얏다고 稱托하얏다.) 神僧武學과 鄭道傳의 言을 從하야(當時 河崙이 또한 漢陽에 都하기를 䟽請하얏다.) 卽時 漢陽에 新都를 定하야 宮闕을 成하고 冬10月에 百官을 率하고 移都하얏다. 그리고 太祖는 또 高麗의 政令 及 法制의 得失沿革等에 關한 書目을 具錄하야 群臣과 討議하고 舊官制를 倣하야 都評議使司(掌國政) 義, 興三軍府(掌軍政)를 置하고 또 備庫를 置하야 軍需를 供케 하고 兵符의 制를 設하야 國內國外를 물론하고 兵符의 信이 업스면 兵을 擅動히 못하게 命하며 尙又 經濟六典(治, 禮, 敎, 政, 刑, 工典 等이니 鄭道傳이 纂하고 河崙이 訂正함)을 纂하며 都城을 築하고(丙子) 外交는 明國과 修好를 함은 물론이고 또 女眞을 招安하니 당시에 琉球 及 *羅 等 國이 風을 望하고 方物을 獻하며 來朝하얏다.
然而太祖의 政治革命은 上述과 如하거니와 社會制度上 及 敎化上革命은 두가지로 볼 수가 잇섯스니 一은 佛敎를<41> 抑壓하고 儒敎를 振興케 함이오. 一은 武를 賤히 하고 文을 尙함이다. 이것은 結局 高麗가 佛敎와 武人으로 인하야 國家가 衰亡한 것을 鑑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一般社會의 局面을 일대변혁하는 동시에 후일 李朝가 또 儒敎와 文弱으로 하야 衰亡케 하는 端緖를 啓하얏다 云치 안이치 못하겟다.
誰知禍起蕭牆內
太祖는 高麗王氏의 一族과 及 舊臣을 一網打盡하야 外間覬覦의 患을 根滅하얏슴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天下는 아주 泰平無事하야 龍樓의 高枕을 安히 하고 臥而治之할 줄로 알엇섯다. 그러나 登極한지 未久에 禍가 蕭牆의 內에 起하야 骨肉相爭의 悲慘한 劇을 연출하얏다. 원래 太祖는 8人의 王子가 잇섯스니 6人(鎭安大君芳雨 永安大君芳果(定宗) 益安大君芳毅 懷安大君芳幹 靖安大君芳遠(太宗) 德安大君芳衍)은 神毅王后韓氏의 소생이오 撫安大君芳蕃 及 宜安大君芳碩兩人은 神德王后康氏의 소생이엿다. 然而 太祖 卽 位初에 功臣 裵克廉 趙浚 鄭道傳 等이 世子冊封하기를 䟽請한바 克廉 等은 靖安大君이 開國의 功이 有함으로 그를 世子로 封하기를 主張하얏스나 太祖는 芳蕃에게 意가 在함으로 즉시 결정치 못하다가 君臣이 屢次相議한 결과 遂히 末子 芳碩으로 世子를 확정하니 諸王子의 불평이 물론 多大하얏섯다. 何時던지 見權趨勢를 能事로 知하는 鄭道傳 南誾의 徒는 忽然히 芳碩에게 附隨하고 其 承位를 안전케 하기 위하야 諸王子를 除却하랴고 明國의 諸皇子封土의 例와 가티 諸王子를 各道로 分封할 事를 청하얏섯다. 그러나 太祖가 聽치 안이함으로 다시 최후의 陰謀를 하야 7년 戊寅 8월에 太祖가 병석에 잇슴을 奇貨로 思하고 殿門 內外에 兵士를 埋伏하고 諸王子를 召하야 殺害하기로 計畫하얏섯다. 然而其黨 李茂潛이 變을 고하매 太宗은 卽時 趙浚 金士衡과 상의한 후 武士를 親率하고 道傳及誾과 卞仲良家를 襲하야 三人 及 其黨수십인을 軍前에 斬殺한 後 翌朝에 趙浚等이 百官을 率하고(其時左政丞) 太祖에게 鄭南 等의 죄를 고하고 또 世子改封할 事를 强請하니 太祖가 不得已 此를 允許함으로 諸臣은 이에 太宗으로 世子를 推戴하얏다. 그러나 그는 固辭함으로 인하야 永安大君으로 遂히 世子를 封하고 또 太宗 及 諸臣은 다시 太祖에게 芳碩 芳蕃의 出外를 强請하야 路上에서 擊殺하니 翌月에 太祖는 遂히 定宗에게 禪位하고 其後定宗 2년에는 知中樞 朴苞와 懷安大君芳幹이 太宗에게 불평을 抱하고 亂을 起하다가 또 被誅하니 此는 李朝開國後初有의<42> 骨肉慘變이엿다.
所謂 咸興差使
芳碩芳蕃 等 兩愛子가 非命에 死하고 또 繼하야 芳幹이 死하매 太祖의 太宗에 대한 惡感은 실로 극도에 달하야 一日이라도 安過하기 不能하얏다.(又 芳碩의 同腹妹慶順公壬의 夫興安君李濟가 芳碩의 亂에 連坐되야 被死하얏슴으로 太祖가 친히 公主의 髮을 削하고 潛然이 流涕하얏다) 太祖는 位를 禪하는 卽時에 金剛山으로 往코자 하다가 不果하고 其後 太宗元年 3월에 新都漢陽(太祖 3년에 漢陽에 遷都하얏다가 太宗元年에 舊都開城으로 還하매 遊한다 稱하고 金剛山에 往하얏다가 遂히 安邊에서 留하야 屢月이 되도록 還宮치 안이하니 太宗이 都承旨朴錫命을 遺하야 還宮을 請하되 聽치 안이 하다가 諸臣의 極勸에 의하야 强히 歸宮하얏다. 그러나 평생의 怨恨을 抱한 太祖는 恒常鬱悒不平하더니 太宗 2년 11月 夜에 飄然이 王宮을 떠나 楊洲 逍遙山에 가서 別殿을 設하고 居留하다가 다시 咸興本宮으로 갓섯다. 그때에 太宗은 太祖의 問安使를 履次 送하얏스나 다 太祖에게 被殺하고 生還치 못하니 世에 仍히 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겨서 至今까지 消息업는 사람을 가르처서 咸興差使라고 한다. 其時 問安使로 往한 人中 著名한 이는 成獨谷 璘과 朴忠愍 淳과 神僧 無學 等이니 成璘은 白馬布衫으로 過客의 行色을 하고 本宮附近에 가서 飯을 炊하엿더니 太祖가 望見하고 宦官을 送하야 來故를 問하니 璘이 答하되 私事가 有하야 來하얏다가 日이 暮하야 滯宿한다 하엿더니 太祖가 疑치 안이하고 召하야 見하니 璘이 從容이 人倫處變의 道를 陳함으로 太祖가 變色하고 怒하야 曰汝가 汝主를 杜護함이 아니냐고 하니 璘이 曰하되 臣이 만일 그러하면 臣의 子孫이 반듯이 目이 盲하리라 하니 太祖가 信하고 其 言을 聽하야 意를 回하얏다.(劅�後 璘의 長子至道가 盲目하고 至道의 子龜壽 及 其孫이 다 盲目하고 次道는 또한 無子하니 世人이 言讖이라 稱하얏다.)
半在江中半在船
又知中樞 朴淳(陰城人)은 子母의 馬가 相離哀鳴함과 子母의 鼠가 相抱墮死하는 事로 諷勸하야 太祖의 回都할 允許를 得하고 歸하는데 太祖의 近臣이 또 淳을 殺하기를 청하니 太祖가 이에 人에게 釰을 賜하고 曰하되 淳이 만일 龍興江을 渡하얏거던 追치 말고 渡치 안이하얏거던 殺하라하니 이것은 太祖가 대개 朴淳이 이미 江을 渡하엿슬 줄로 推測하고 한 일이엿다.<43>
그러나 使者가 追한즉 淳은 僅히江을 渡하는지라 使者가 급히 舟를 停케 하고 其腰를 斬하니 淳이 死에 임하야 一句의 詩를 吟하야 曰 半在江中半在船이라 하얏다. 후에 太宗은 畵工으로 其像을 畵하야 御前에 置하고 其妻 任氏는 訃를 聞하고 自刎하야 死하얏다.
그리고 또 無學은 초에 太祖를 보고 수십일을 두고 太宗의 죄악을 極言하니 太祖가 信함으로 其機를 乘하야 다시 言하되 太宗이 罪過가 有함은 사실이나 殿下의 愛子가 다 죽고 但히 有爲의 人物이라고는 太宗뿐이니 그까지 마주 棄遠하면 殿下平生에 辛苦한 大業을 將次 誰에게 托하리요 하엿더니 太祖가 遂히 悔하야 還都하얏다 한다.
然而 太祖가 歸還하는 日에 太宗이 郊外에 往하야 迎할새 河崙이 上啓하되 太上皇의 怒가 아즉 全然永解치 안이한 이상에는 안심할 수 업스니 遮日의 高柱를 大木으로 하야 避身하는 만일의 備를 하라 하니 太宗이 其言을 採用하고 *服으로 太祖를 迎謁하니 太祖가 一見하고 과연 怒氣가 大發하야 彤弓白羽箭으로 太宗祖을 射함으로 太宗이 卽時 避身하야 高柱에 隱하니 太祖가 遂히 弓을 投하고 歎하야 曰 天意는 역시 할 수 업다 하고 父子相抱하고 泣하얏다.
이에 先하야 太祖가 咸興에 歸하얏슬 時에 故舊父老가 牛酒를 持하고 來賀함으로 太祖는 卽席에서 詩一首를 吟하야 諸老에게 與하야스니 其詩에 曰
「休道騰鱗北海間, 莫言今日錦衣還. 我行不是歌豊沛, 却愧明皇蜀道難.」
琴基洞前逢佳人
이것은 太祖少年時代의 일이엿다. 太祖는 元來豪俠不凡함으로 幼時로부터 兒童과 遊戱하되 軍伍를 作하고 自己가 大將이 되야 群兒를 號令指揮하니 衆人이 다 非凡히 思하얏나 그가 15, 6세때엿다. 그는 樵童과 가티 날마다 남의 森林을 樵伐하기로 일삼앗섯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자기가 先導가 되고 群童中命令에 不服하는 자가 잇스면 處罰을 斷行하니 群兒가 모다 慴伏하얏섯다. 그런데 一日은 群牧과 約束하되 明日은 某富豪家의 山林을 樵伐할더이니 약속시간에 來치 안이하면 首를 斬한다 하니 群兒가 應諾하고 往하얏다. 그러나 그 翌日에 一兒가 遲參함으로 그는 其兒의 首를 지개에 懸하고 斬殺하니 群兒가 다 驚走하고 그도 또한 罪를 피하야 逃走하얏섯다. 이리 저리 隱避하다가 一日은 安邊郡琴基洞(今高山驛南方)에 至하니 때는 마츰 夏月이라 일기가 甚熱하고 口가 渴함으로 路傍에서 汲水하는 處女에게 水를 청한즉 그 처녀가 水를 與하되 柳葉을 入하야 與하니 太祖는 口渴한<44> 판이라 아모 말도 안이하고 먹엇스나 다시 생각한즉 이상도 하고 괫심도 하야 責하는 말이 이미 人에게 水를 給하면서 엇지 柳葉을 入하야 不潔케 하느냐 하니 그 처녀는 答하되 당신의 形色을 본즉 급히 逃避하는 사람과 갓고 또 極熱한 時에 冷水를 급히 飮하면 病이 生할가 恐하야 柳葉을 入하야 不潔을 吹棄하는 동안에 喘息을 休케 하노라고 그리하얏다 하니 太祖가 크게 놀나고 敬服하야 遂히 其家에 往하야 數日을 留宿하고 彼此婚約을 結하얏스니 此가 卽 安川府院君韓卿의 女 神懿皇后엿다.
萬家鷄一時鳴
이것도 역시 太祖의 微時의 일이엿다. 太祖는 安邊 엇던 村家에서 留宿하는데 夢에 人家에 入하야 三椽을 負出하고 또 萬家의 鷄가 一時에 鳴하며 春杆의 聲이 四隣을 動하고 鏡이 破하고 花가 落하는 것을 보고 主婆에게 言하니 主婆가 言하되 이것은 極히 貴夢인즉 秘密에 付하고 雪峯山에 가서 異僧에게 問하라 하니 太祖가 其 言과 如히 雪峯山에 가서 僧無學에게 問한즉 僧이 답하되 「三椽을 負함은 王字요. 鷄聲은 高貴位니 王位에 登할지요. 春聲은 德加東이니 德을 東方에 펼지며 花落成實하고 鏡破有聲이니 당연히 朝鮮의 君王이 될 夢兆라 하니 太祖가 心獨喜自負하야 이로부터 無學을 師로 事하고 후일 登極 후에 그 기념으로 雪峯山에 釋王寺를 창건하얏다 한다.
李之蘭과 李太祖
李之蘭의 本姓名은 佟豆蘭이니 女眞部落에 世居하다가(岳武穆後裔云) 元末에 亂을 피하야 北靑에 移住하얏섯다. 그도 역시 太祖와 가티 少時부터 騎射를 잘 하얏섯는데 出獵하다가 太祖와 相遇하고 一見에 心을 許하야 日로 交遊하얏다. 太祖와 그가 咸興에 在할 時에 서로 射를 試하기 위하야 村家婦女의 汳水하는 것을 보고 太祖는 其盆을 射中하고 之蘭은 某水가 出하기 전에 泥丸을 射하야 補充하니 人이다 歎服하얏다. 그러나 之蘭은 恒常 太祖를 猜忌하야 害코자 하얏슴으로 一日은 太祖가 便所에 往함을 見하고 之蘭이 三矢를 連射하엿더니 太祖가 그 三矢를 다 手에 持하고 泰然 笑하야 曰丈夫가 무슨 小兒의 作戱를 하느냐 하니 之蘭이 크게 敬服하야 다시는 異心을 두지 안코 死生의 誼를 結하고 太祖의 南征 정벌할 時에 항상 同往하야 大功을 成하엿섯다. 其後 太祖 登極 후에 그는 職을 辭하고 髮을 祝하야 僧이 되고 世上의 功名을 斷絶할 意를 示하니 太祖가 안심하고 諸功臣 中에 之蘭이 獨히 禍를 면하얏다.<45>
무엇보다도 精神修養에 注力
李太祖는 文武兩藝를 專攻할 뿐 안이라 특히 精神修養에 전력하야 名山大川과 名刹古寺에 足蹟이 가지 안은 곳이 업섯다. 특히 江原의 金剛山, 安邊의 雪峯山, 全羅의 智異山, 月出山, 開城의 松岳山에서 그 多年間 書도 讀하며 天에 祈禱도 만히 하고 또 日月星辰 등에도 다 祈禱를 하얏다. 그것은 물론 迷信的이 안이요 一個 精神修養이엿다. 그가 祈禱를 하던 중에 異蹟이 만헛지마는 其中에 한가지는 松岳山山祭時 일이엿다. 그는 松岳山에서 山祭를 지내고 왓서 엇던 村家에서 자는데 엇더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자기가 그 前夜에 旅行을 갓다가 旅舘이 업서서 城隍堂에서 잣더니 深更에 누가 와 城隍을 차지며 말하기를 今夜에 李成桂 三韓의 王이 되랴고 山祭를 지내니 가티 가자고 한즉 그 城隍이 答하기를 今夜는 客이 잇서서 가지 못하니 獨行하라 하더니 조금 잇다가 그 사람이 또 와서 하기를 成桂가 祭物은 굉장히 차리엿스나 不潔하야 諸神이 다 歆饗치 안이하얏다 하고 가더라고 云云하니 太祖가 怪異히 생각하고 다시 일주간 齋戒를 하고 致祭를 하며 또 그 사람으로 城隍堂에 가서 留宿케 하엿더니 과연 그 前夜에 왓던 손이 또 와서 말하기를 今夜에는 祭物이 다 淨潔하야 諸神이 잘 歆饗하엿는데 未久에 李氏가 朝鮮의 王이 되게 한다 하더라 하니 太祖가 듯고 心獨喜自負하야 其後부터 王位占奪의 決心을 하얏다 한다.
嗚呼·當年意氣今安在
然而太祖登極後 535년인 금일에 山河는 依舊하고 그의 手植한 本宮과 雪峯의 松은 四時蒼然하나 그의 王家大業은 벌서 浮雲流水와 如히 痕跡이 업게 되고 최종의 皇上인 隆熙帝가 또한 春風에 零落하는 李花를 伴하야 奄然히 白雲의 鄕으로 仙御하섯스니 녯을 생각하고 이제를 볼 때에 誰가 능히 感慨無量의 淚를 금할 수 잇스랴. 만약 太祖의 靈靈이 今日까지 잇다하면 비록 地下에서라도 一掬의 淚를 下치 안이치 못할 것이다. 최후에나 다시 李太祖의 三角山登臨詩二首를 소개한다.
登白雲臺
引手攀蘿上碧峯 一菴高臥白雲中. 君將眼界爲吾土 楚越江南豊不容.
突丌高峯接斗魁 漢陽形勝自天台 山蟠大陸擎三角 海曳長江出五臺<46>
<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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