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死六臣)의 단종(端宗) 복위운동(復位運動)
신병주/한국역사연구회
'수양대군'의 압박 속에서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던 날 '성삼문'은 바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상징하는 옥새를 전해주는 비서의 자리인 예방승지의 직책에 있었다. 훗날 죽음으로 대항한 상대에게 옥새를 주는 임무를 수행했던 것은 '성삼문'과 '세조'의 기구한 운명으로 밖에 풀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날 옥새를 경회루 다락 아래에서 '수양대군'에게 전해준 후 '성삼문'은 울음을 터뜨렸고 절친한 친구 '박팽년'은 "차라리 옥새를 끌어안고 경회루에 빠져 죽자"고 하였다. 자괴감에 빠졌던 '성삼문'은 울부짖는 '박팽년'을 말리며, "'단종'께서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가 살아 있어야 다시 왕으로 올릴 수 있다’며 '단종'의 복위 운동을 도모할 것을 맹약하였다. '수양대군'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 절호의 기회, 사신 접대연, 그러나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성삼문', '하위지' 등은 '수양대군'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 세력들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 또한 이들 젊은 학자들에게는 불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계유정난 후 '성삼문'이 정난공신 3등에 올라간 것도 '수양대군'이 '성삼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조처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상왕으로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대한 이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고 정통성이 없는 왕 '세조'를 폐위시키고 '단종'을 왕으로 복위시키는 거사를 준비해 나갔다.
직책상 '수양대군'에게 어쩔 수 없이 옥새를 전달했던 '성삼문',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세조'의 신하가 아니었다. '성삼문'은 집현전에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무인인 '유응부'도 거사에 합류했다.
마침내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세조'는 단상에서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을 세우기로 하고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를 적임자로 지목하였다. 시해를 모의한 주동자들이 직접 '세조'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성삼문' 등은 이날을 거사일로 잡고 '세조와 세자(세조의 아들), '세조'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한 보다 치밀한 계획을 추진해 갔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한명회' 등이 연회 장소인 창덕궁 광연전이 좁고, 더위가 심하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말고 세자도 오게 하지 말 것을 청하자, '세조'가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거사 주모자들 간에는 의견이 엇갈렸다. '유응부' 등은 일이 누설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자고 했고, '성삼문'과 '박팽년'은 ‘별운검을 세우지 않고 세자가 오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거사 날짜를 다시 계획하자’고 하였다.
결국 거사는 연기되었고 '유응부' 등의 우려대로 내부의 밀고자가 나타났다. '김질'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거사가 연기되면서 불안해진 '김질'은 장인인 '정창손'을 찾아가 사전에 준비되고 있던 상왕 '단종 '복위운동의 전말을 알렸고, '정창손'은 그 길로 사위와 함께 궁궐에 달려가 '세조'에게 고변 사실을 알렸다. 즉시 '성삼문' 등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줄줄이 압송되었다.
(도판 1) 성삼문과 박팽년의 글씨
2. '세조'의 국문과 회유
'세조'는 친히 국문(鞠問)을 하면서 이들을 협박하고 회유하려 했으나, 이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의 부당성을 공격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성삼문'은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라며 '세조'를 자극하여 달구어진 쇠에 온 몸을 고문당한 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박팽년'은 '세조'를 일컬을 때 마다 ‘나으리’라고 하였고, '세조' 재위 시절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올린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음이 조사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그만큼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이다.
사육신을 비롯한 거사 참여자들 대부분은 달군 쇠를 몸에 집어넣는 등의 엄청난 고문을 당하였고 거열형(車裂刑:말이 끄는 수레가 죄인의 사지를 찢는 형벌)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화를 입은 인물은 사육신을 비롯하여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인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이 보인 충절과 의리는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이들의 정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중앙의 관직을 버리고 대부분 지방으로 들어가 성리학에 대한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면서 조선전기 사림파의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
3. 사육신묘가 7개인 까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이 사육신으로 확정된 것은 생육신으로 자처한 '남효온'이 「육신전」을 저술한 것에서 비롯된다. '남효온'의 문집인 『추강집』에 「육신전」이 기록되면서, '수양대군'의 불법에 맞서 저항한 이들의 명성은 재야의 사림(士林)들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남효온'은 '김시습'ㆍ'원호' 등과 함께 몸은 비록 살아 있어도 정신은 사육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생육신’으로 불린 인물로서 당시 체제에 저항하다가 처형된 사람들의 전기를 기록한 것은 상당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도판 2) 『추강집』중 「육신전」 부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육신에 대한 추숭 작업을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인 '숙종' 때였다. 원래 노량진 일대에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등의 묘가 있었는데 '숙종'이 이곳을 본 후 육신의 절의에 감동하여 관리들에게 명해 사육신묘에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면서 사육신묘가 공식화되었다.
1782년(정조 6)에 육신의 묘비인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그런데 현재 한강이 내려 보이는 노량진의 사육신묘에는 무덤 7개가 자리잡고 있다. 사육신은 6명인데 왜 7개의 무덤이 있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사육신묘에는 사육신 이외에 '김문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실록이나 『연려실기술』등의 기록에 의하면 '김문기' 역시 단종복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가 처형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효온'이 「육신전」을 저술하고 '숙종', '정조' 시대에 사육신에 대한 본격적인 추숭 작업을 실시하면서 사육신은 여섯 명의 인물로 고정되었던 것인데, 1970년대에 '김문기'의 후손들이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한 '김문기'의 행적이 기록된 자료를 제시하며, '김문기'도 사육신과 동등한 추숭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여러 곳에 탄원하였다.
그 결과 이미 조선시대 이래로 공식화 된 사육신의 명단에는 '김문기'의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사육신묘에 그의 가묘를 세워주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사육신묘가 7개가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김문기' 후손들의 적극적인 선조 추숭작업의 결과물이었다.
(도판 3) 사육신을 배향한 의절사에는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단종' 복위운동에는 여섯 명의 사육신만이 아닌 70여명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나, '남효온'이 그 중 가장 핵심인물인 6명의 행적을 기록한 「육신전」을 정리하고 이것이 후대로까지 이어지면서 ‘사육신’의 이름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김문기'의 후손들이 탄원하면서 사육신묘가 7개가 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사육신묘가 7개가 된 사연은 사육신 사건이 560년 전에 벌어졌던 역사 속으로 완전히 묻혀진 사건이 아니라, 현대에도 잠복되어 있는 사건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다른 미래에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한 선조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우리 선조도 사육신과 같은 역사적 인물임을 기록해 달라고 탄원할 지는 아무도 장담을 하지 못한다. 조선시대에 이미 역사적으로 정리된 사육신, 그리고 그들을 위해 조성한 사육신묘가 6개가 아니라 7개인 사실은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 '성삼문'과 '신숙주'의 얄궂은 운명 ◇
세종대 학문 연구의 산실 집현전 학자들은 '수양대군'의 쿠테타를 계기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그 중에서도 '성삼문'과 '신숙주'가 걸었던 서로 다른 길은 이들이 세종대에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눈 학자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세종'이 총애했던 학자로서 문장과 어학에 특히 뛰어나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열세 번이나 머나먼 길을 함께 오가면서 절친한 우정을 쌓은 사이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극단의 길을 가게 되었다. '성삼문'은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한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로 '수양대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맞서 저항하다가 처형으로 삶을 마감한 반면,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도와 '세조' 이후 승승장구하면서 '성종'대까지 국가의 원로가 되어 학문과 문화 창조의 위업을 쌓는 완전히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거사일에 '성삼문'은 "'신숙주'는 나의 평생의 친구이지만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결연한 의지를 폈지만, 거사가 연기된 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윤영손'이 '신숙주'를 죽이려고 할 때 이를 막아주는 마지막 우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죽음으로 의리를 지킨 '성삼문'이 충신의 대명사로 조선시대 내내 추앙을 받은 반면, '신숙주'는 뛰어난 학문적 자질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변절한 지식인이라는 꼬리표가 늘상 그에게 따라다니고 있다.
원래 녹두의 싹을 내어 먹는 나물로서, 두아채(豆芽菜)란 이름으로 불렸던 나물이 ‘숙주나물’로 바뀐 것에도 '신숙주'의 행적을 응징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증오가 담겨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만두 속을 만들 때 이 나물을 짓이기기 때문에 숙주나물을 통해 '신숙주'에 대한 분노를 풀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세조'대에서 '성종'대까지 조선전기 민족문화의 최고 주역이었던 '신숙주'에게 이처럼 가혹한 불명예가 붙여진 것에서 충절과 의리를 지고의 가치로 여겼던 당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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