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史上)의 로맨스
이은상(李殷相) 述, 함흥차사(咸興差使)
(1930. 01, 16 - 22 東亞日報 連載)
1. 발단(發端)
고려의 왕조는 꿈속에 사라지고 ‘태조(太祖)’께서 조선(朝鮮)이란 이름으로 새로이 건국하신 뒤이었다. 어느 날 ‘태조’께서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등 몇몇 대신들을 내전으로 불러드리시고 세자 세우는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고 물으시었다.
거기에 앉은 대신들은 다 같이 『평시(平時)에는 적자(嫡子)로 세우고 난세(亂世)에는 공(功)있는 아드님으로 먼저 봉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하고 아뢰니 그것은 ‘태조’의 건국에 누구보다도 가장 그 공이 큰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 ‘태종(太宗)’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때에 장뒤에 대신들의 의론을 엿듣고 있던 ‘신덕왕후(神德王后)’가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옴으로 그날의 의론은 겨우 머리만 끌어낸 채 그대로 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그 까닭은 대개 이러하다.
일찍이 ‘태조’에게 두 분 왕후가 계시었으니 그 한분은 ‘신의왕후(新懿王后) 한씨(韓氏)’요, 또 한분은 ‘신덕왕후 강씨(康氏)’였다. ‘신의왕후’는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와 뒷날 정종(定宗)이 되신 ‘방과’(芳果)와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와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과 뒷날 태종(太宗)이 되신 ’방원(芳遠)‘과 방안대군(芳安大君) ’방연(芳衍)‘, 여섯 분의 아드님과 밑 두 분의 공주님을 낳으셨고, ’신덕왕후‘는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과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 두 분의 아드님과 밑 한분 공주를 낳으셨다.
그러나 이때는 ‘신의왕후’는 벌써 돌아가셨고 그 첫째 아드님 ‘진안대군’도 진작 ‘태조’께서 창업하시기 전에 죽었으며, 또 그 여섯째 아드님 ‘덕안대군’도 어릴 적에 죽었고 다만 ‘신의왕후’가 낳으신 ‘정종’, ‘방의’, ‘방간’, ‘태종’ 네분 형제와 ‘신덕왕후’가 낳으신 ‘방번’, ‘방석’ 두 분 형제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태종’으로서 세자를 삼아야 한다는 뜻을 비추어 말하는 대신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되었다가는 자기의 몸에서 난 ‘방번’이나 ‘방석’이 세자의 자리를 얻지 못하리라 염려하여 ‘신덕왕후’는 그날의 의론을 끝맺지 못하도록 일부러 큰소리로 울어 그 울음소리가 ‘태조’와 밑 대신들의 귀에 들리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뒤로는 어떠한 대신이던지 감히 나서서 ‘태종’으로 세자를 봉하심이 옳다고 상주하지도 못하였고 또 ‘태조’도 그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하시었기 때문에 ‘신덕왕후’의 간절한 주청을 따라 마침내 그 몸에서 난 두 아드님 중에서 ‘방번’은 광패(狂悖)한 사람이었기에 피하고 그 다음 되는 ‘태조’의 막내 아드님 ‘방석’으로서 세자를 삼으시었다.
‘방석’이 세자의 자리를 얻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그 쪽을 따르고 뿐만 아니라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들은 ‘방석’에게 붙어 ‘신의왕후’에게서 난 네 분의 왕자를 장차 없애버리자고 까지 꾀하였다.
그리하여 무인(戊寅), 태조7년, 1398년 가을에 왕께서 병환에 계심을 틈타 정도전들은 왕께서 이어(移御)하시는 일로 여러 왕자들을 부르신다고 하여 대궐로 들어오는 기회에 안으로 도당(徒黨)을 숨겨 두었다가 큰일을 내자고 의론 하였다. 그 꾀를 알아낸 전참찬(前參贊) ‘이무(李茂)’라는 사람이 그 때 근정문(勤政門)밖에서 여러 형들과 함께 모여 늘 숙직하고 있는 ‘태종’에게로 급히 달려가 그 일을 가만히 미리 고 하였다.
이때에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元敬王后)’가 그 소문을 듣고 종(奴) ‘김작은이(金小斤)’를 보내어 후(后)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났다고 거짓 전하였다. 그리하여 ‘태종’은 곧 환저(還底)하시어 서로 한참이나 밀의한 뒤에 ‘태종’은 다시 후가 울며 잡는 옷자락을 떨치고 일어나시며, 『어찌 죽음이 두려워 가지 못하리오! 여러 형님들이 지금 대궐 안에 계시매 가서 앞일도 의론도 해야겠는데... 』하고 문을 나서니 후는 따라 나가며『부디 조심하시소, 부디 조심하시소 』하고 문안으로 돌아 들어오며 그 아우 대장군(大將軍) ‘민무구(閔無咎)’와 장군(將軍) ‘무질(無疾)’을 불러 의론하고 병마를 갖추어 변이 있을 때에 응하기로 해 두었다.
‘태종’이 저(底)를 떠나 경복궁(景福宮)에 들어간 때는 사방은 어두어 진 때이었다. 마침 안에서 한 소관(小官)이 나오며 『지금 상감께서 병환이 중하시어 피접코져 하심으로 여러 왕자들은 다 입내(入內)하라 하시옵니다.』하고 말을 전한다. 이 말을 듣고 왕자들은 내전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미리 들어둔 말도 있을뿐더러 전과 달리 궁문에는 등불하나 달리지 않고 컴컴한 채로 있음을 더욱 이상히 여겨 ‘태종’은 잠깐 머뭇거리며 이 일을 어떻게 할까 하는 무거운 근심으로 머리를 깊이 숙이고 생각하였다.
그때에 ‘태종’의 형 ‘익안대군’과 ‘회안대군’과 밑 상당군리백경(上黨君李伯卿)이 뒤쫓아 오며 『정안군(靖安君)! 정안군! 이 일을 장차 어이 하리? 』하고 급히 부른다. 『무슨 소리를 이리 크게 하시오』하고 ‘태종’은 옷가슴을 치며 탄식하는 소리로 『어찌할 바 모르겠소』하였다. 그리고 다 같이 영추문(迎秋門)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태종’은 다시 형들을 향하여,『우리 형제는 광화문(光化門)밖에 말을 세우고 있어 다만 천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어찌할 길이 없나보오』하면서 그래도 마음에 근심스러워 한쪽으로 사람을 급히 달려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등 몇몇 정승들을 부르니 ‘조준’ 들은 이 급한 소식을 듣고 갑옷 입은 군사들을 많이 데리고 ‘태종’에게 이르렀다.
‘태종’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저우기 한쪽으로 안심되는 듯 하였다. 그러자 조금 후에는 여러 대신들과 백성들도 모여 들었다. ‘태종’은 무사들을 거느리고 ‘정도전’의 행색을 염탐하였더니 때에 ‘정도전’ ‘이직(李稷)’들은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앉아 등을 밝히며 밀의하며 밤이 깊도록 마시고 웃고 하는데 그 집종들은 모두 쓰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이것을 안 ‘태종’은 ‘이숙번(李叔蕃)’으로 하여금 짐짓 그 집 용마루에 화살을 쏘아 떨어뜨리었으나 종시 그들은 알지 못하고 즐겨 놀 뿐이었다. 인하여 그 집에 불을 놓으니 그제야 발칵 뒤집혀 ‘도전’은 놀라 나오며 그 비대한 몸을 뒤룩거리면서 판봉상민부자집(判奉常閔富豪)으로 달려 들어가 숨었다.
‘민’부자는 뛰어 나오며 『어떤 배불룩이가 우리 집으로 뛰어 들어 왔소』하고 고함을 지르므로 군병들이 달려 들어가 뒷 구석에서 ‘정도전’을 잡아내어 ‘태종’ 앞에 데리고 왔다.
『만일 나를 살려만 주신다면 힘을 다하여 보좌하오리다 』하고 손모아 빌며 ‘태종’을 우러러 보는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이놈 네가 왕씨(王氏)를 망해 놓더니 또 이씨(李氏)를 망치려 하느냐』하고 ‘태종’은 한칼에 ‘정도전’을 베어버리고 말았다.
또 ‘남은(南誾)’은 그길로 미륵원포막(彌勒院圃幕)으로 도망하였으나 병사들이 뒤 쫓아 죽이었고, 다만 ‘이직(李稷)’만은 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지붕위로 올라가 불 끄는 척 하여 겨우 그 목숨을 살렸다. 그 때에 궁중에서도 그 불빛을 보고 철기(鐵騎)의 소란이 있음으로 방포(放砲)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던 그 밤의 새벽녘에 상께서는 이어하시었다.
‘조준’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태조’에게 들어가 ‘정도전’과 ‘남은’ 들의 죄상을 상주하고 다시 이어 세자를 고쳐 봉하시기를 주청하였다. 왕께서는 곧 세자 '방석‘을 부르시어 한숨을 지우시면서 『네게 평탄할 일 일다』하시고 더 말을 이으시지 아니하신다. 방석도 비장한 얼굴로 절하며 나가려 할 때에 세자비 ’현빈(賢嬪)‘이 달려들어 ’방석‘의 옷자락을 휘어잡고 『이대로 가려오? 어쩌려고 나가려오?』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한다.
그러나 ‘방석’은 입을 다문 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 그 목숨을 잃었고 또 그 형 ‘방번’도 더 살지를 못하였다. 이 ‘정도전의 난’이 있은 그날 밤에 ‘정종’은 마침 기도(祈禱)하시는 일이 있어 소격전(昭格殿)에 가시어 재숙(齋宿)하시더니 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도보로 성을 넘어 독음촌(禿音村) 어떤 집으로 몸을 피하시었다가 이튿날에야 모시러 간 사람들을 따라 돌아 오셨다.
때에 모든 대신들은 나아와 ‘태종’으로 세자를 삼으심이 좋겠다고 상주하였으나 ‘태종’은 그 형님 ‘정종’에 자리를 사양하였다. ‘정종’은 웃으시며 『당초의 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안’의 공이거늘 어찌 내가 그 자리를 얻을 수 있겠소』하고 듣지 아니한다.
그러나 ‘태종’도 또한 어디로 보던지 형님을 두고 먼저 나설 수는 없어 그대로 굳이 사향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정종’은 『그럼 그리하오, 나도 또 좋은 도리가 있으니.. 』하고 그 자리를 승낙하니 세자는 곧 ‘정종’으로 봉해졌다. 그 때에 ‘태조’는 너무나 그 마음이 불안하셨다. 『이 자리가 무엇이건데 이것으로 인하여 형제가 서로 피를 흘렸는고...』 하시고 홀로 쓸쓸히도 눈물을 지으시던 끝에 필경은 그 마음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정종’에게 선위(禪位)하시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종‘이 즉위 하셨으나 이태가 채 못 지나 또한번 세자 봉하는 일로 큰 싸움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태종‘과 그의 형 ’방간‘과의 싸움이었다. ’방간‘의 군병과 ’태종‘의 군병이 서로 교전(交戰)까지 하여 끝내는 ’방간‘이 패하게 되니 ’태종‘의 일파에서는 ’방간‘을 벌 달라고 주청하였다. 그러나 ’정종‘은 윤허(允許)하시지 아니하시고 마지못해 다시 그 청을 들어 ’방간‘을 토산(兎山)에 안치(安置)하시었다.
이튿날 ‘하륜(河崙)’들이 『‘몽주(鄭夢周)의 난’에도 ‘정안군’이 없었던 들 큰일을 어찌 이루었을 것이며 먼저 번 ‘도전(鄭道傳)의 난’에도 ‘정안군’이 아니었던 들 어찌 오늘을 볼 수 있으오리까, 그리고 또한 어제 일만 하더라도 하늘 뜻과 백성의 마음을 가히 알겠아 오니 청컨대 일찍 위호(位號)를 정 하시옵소서 』하고 주청하니 ‘정종’께서도 『옳으리니, 또한 내 뜻이로다』하시고 ‘정종’은 곧 그 아우 ‘태종’으로 세자를 세우셨다.
그러나 ‘태종’은 세자의 자리란 그것으로 그 마음이 기쁘지 아니하였던지 그 뒤로 늘 ‘정종’을 보일 적이면 눈을 바로 뜨지를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날은 ‘정안왕후(定安王后)’가 ‘정종’에게 『전하(殿下)여, 전하께서는 어찌 그 눈을 못 보십니까, 원컨대 이 자리를 어서 내어 놓으셔서 그 마음을 평안하게 하소서 』하고 간하여 ‘정종’도 마침내 ‘태종’에게 전위(轉位)하시고 말았다.
이때는 벌써 ‘태조’ 께서도 그 아들 ‘태종’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크게 아픔을 받으시었고 또 얼굴조차 대하기가 싫으시어 대궐을 떠나 함흥(咸興)에 있는 본궁(本宮)으로 가계시며 어느 때는 인세를 탄식도 하시었으나 한쪽으론 마음에 못을 박아준 ‘태종’의 그림자나마 보이지 않는 것이 시원도 하시었다.
2. 박순(朴淳)의 주검
‘태종’이 즉위하시어 정사를 잡으시기는 하였으나 날과 달이 갈수록 그 마음에 다만 하나 걸리시는 것은 ‘태조’께서 함흥으로 주필(駐蹕)하신 그것이었다. ‘태종’은 비로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태조’에게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사신을 보내기만 하면 보내는 족족 그들의 그림자는 다시 볼 수가 없었다.
‘태조’께서는 함흥본궁에 계시며 ‘태종’이 보내는 문안사(問安使) <이 문안사라는 것이 곧 흔히 말하는 차사(差使)임>를 보시고는 그 전하는 말을 듣기 조차 싫고 또 ‘태종’을 생각 하시게
<사진> 박순 사당 되는 그것이 곧 그 마음을 그지없이 스스로 괴롭히시는 일이기 때문에 화살을 쏘아 뜻에 없으신 일을 하시매, 한번 가는 문안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저승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함흥으로 갔던 차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돌아오지 못함으로 ‘태종’은 답답한 마음을 품으신 채, 또 다시는 누구를 뽑아 문안사로 보내고자 못하시고 신하들도 또한 누구하나 스스로 나서지를 아니 하였다.
그 때에 판승추부사(判承摳府使) ‘박순(朴淳)’이란 사람이 있어 ‘태종’에게 나아와『이번에는 신이 태왕(太王)께 보이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뜻을 봉달 하도록 하겠사옵니다 』하며 스스로 가면 못 오는 문안사가 되기를 주청하니, 이 ‘박순’은 ‘태조’가 창업하시기 전부터 서로 사귐이 있던 옛 벗이었다. ‘박순’은 무엇을 생각하였던지 곧 문안사의 길을 떠나며, 사신이 타는 수레(車)같은 것은 부리지 아니하고, 어이 한 새끼 달린 어미 말(母馬) 한 마리를 잡아타고 갔다.
‘박순’이 함흥에 들어가 행재소(行在所)에 가까이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짐짓 그 새끼 말을 따로 떼어 나무 아래다 매어두고 다시 어미 말만 이끌고 들어가다가 그 새끼 말과 서로 멀리 건너다보이는 곳에 어미 말도 메어두고 ‘태조’를 보이니 ‘태조’도 ‘박순’이만은 옛날의 친구이든지라 반가이 맞아 한자리에 앉으셨다.
그 동안에 어미 말과 새끼 말은 앞발과 뒷발로 뛰고자 하며 빙빙 돌면서 마주 부르는 듯 목이 터지도록 울었다. ‘태조’께서는 오래간만에 서로 만나는 기쁨에 ‘박순’으로부터 잠깐 동안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하도 밖에 말울음 소리로 요란하기 때문에 ‘태조’께서는 이상하게 여기시며, 『밖에 이 무슨 소리가 이다지 요란하게 들리는고?』하고 물으시었다.
‘박순’은 물러서 허리를 깊이 굽히고, 『네, 전하께 젓(惶恐)사옵니다. 신이 타고 온 말이 그렇게 요란스럽게 우나 봅니다』하고 아뢰면서 ‘태조’의 다음 말씀을 기다리는 듯이 엎드리어 고개를 들지 아니한다. 『허어! 그럼 그 말이 무슨 일로 그다지 요란스럽게 운단 말인고? 』하고 ‘태조’는 다시 한번 물으신다. 『네, 신이 올적에 우연히 새끼 딸린 말을 타고 오게 되었사옵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어미의 새끼를 같이 몰고 왔다가 길에 걸림이 되옵기로 그 둘을 따로 떼어 매었더니 저렇게 애를 끊는 듯이 부르짖는가 보옵니다 』하며 ‘박순’은 말마디마다 힘을 들여가며 말 하였다. 그리고 더 무슨 말을 붙여 아뢰지도 아니 하였다.
‘태조’는 얼른 그 ‘박순’의 말뜻을 알아내었다. 『오냐, 네가 나를 비유하여 이러한 일을 하였구나』하시고 속으로 생각하시매, ‘박순’이 조차 미운 사람으로 보이셨다. 그것은 ‘박순’의 말 한마디로 또다시 ‘태종’의 기억이 떠오르시어 맑아 졌던 마음에 흐린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딘지도 모르게 슬픈 생각이 드는것도 억제할 수가 없으시었다.
‘태조’는 ‘박순’을 몇 날 동안 묵어가게 하시며, 어떤 때는 후원 속을 같이 거니시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마주 앉으시어 지나간 옛날의 기억을 서로 이야기도 하셨다. 그렇게 몇날 동안을 지내면서도 ‘박순’은 ‘태조’에게 돌아가시자는 뜻을 조금도 입 밖에 나타내지를 아니하고 다만 기회를 기다리기만 하였다.
어느 날, 그 날은 ‘태조’께서 ‘박순’과 더불어 바둑을 두고 노시었다. 한참동안이 지난 뒤 바둑이 반판쯤 되었을 때에 공교롭게도 처마 끝에서 새끼를 안은 쥐(鼠) 한 마리가 떨어져서 어미, 새끼가 서로 품으며 죽기까지 놓지를 아니한다. ‘박순’이 그것을 보고 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하며 스스로 생각하자 곧 바둑판을 물러나와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전하여』 하고 쥐를 가르치면서 다시 말을 이어『저 쥐를 보소서, 저러한 미물(微物)도 죽기까지 어미와 자식의 정이 저렇듯 하옵니다. 전하여! 이제야 저것을 보고 인륜의 지중함도 아는 듯 하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천의(天意)를 돌리시사 회란(回鑾)하심이 어떠시나이까 』하며 엎드린 채 ‘태조’를 우러러 보면서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닦는다.
‘태조’께서는 ‘박순’의 눈물을 보시고 ‘박순’의 간곡한 말을 들으시고 그제야 마음에 있는 슬픔을 참을래야 더 참을 수도 없으시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박순’에게 돌아오기를 허락하시었다. ‘박순’은 ‘태조’의 허락을 듣고 눈물을 거두며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 어깨의 가벼워짐을 느끼면서 기쁜 얼굴로 ‘태조’에게 세 번 절하고 그곳을 떠났다.
‘박순’이 떠나간 뒤에 행채의 여러 신하들은 ‘박순’이 ‘태조’의 곁을 떠난 줄 알고 ‘태조’에게 들어가 『‘박순’도 돌려보낼 수는 없아오니 청컨대 허락 하소서』하고 세 번, 네 번 역청(力請) 하였다. 그러나 ‘태조’께서는 한마디의 대답이 없으셨다. 『‘박순’이 더 멀리 가기 전에 어서 명령을 내려 주소서』신하들은 이렇게 주청하기를 쉬지 아니 하였으나 ‘태조’께서는 좀시 대답을 아니 하시다가 얼마가 지난 다음에, 『지금쯤은 ‘박순’이 용흥강(龍興江)을 벌써 건넜으리라 』하고 속으로 ‘박순’의 간 길을 헤아려 보신 뒤에야 칼을 내어 주시며,『그런데 가기는 가라마는 만일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거들랑 더 쫓지는 말지어다 』하시고 말씀을 부쳐 허락하시었다.
그러시고도 ‘태조’께서는 마음에 근심이 되시어 무사가 말을 달려 뒤를 쫓음을 보시고 섰다 앉으셨다 하시었다. 그 때야 말로 마침 ‘박순’은 늙은 몸이었는지라 줄곧 쉬지 않고 갈수가 없었고, 또 공교롭게도 병을 얻어 중도에서 쉬고 쉬고 늦게야 용흥강에 이르렀다. 그동안에 ‘박순’을 죽이려는 칼든 무사는 말위에 높이 앉아 나는 듯이 달렸다.
그리하여 ‘박순’이 배위에 막 올라 탄 때에는 그의 목숨을 빼앗을 무사도 그곳에 이르렀다. 무사는 배위에 막 오른 ‘박순’을 향하여 ‘태조’의 명령이니 칼을 받으라고 하였다. ‘박순’은 빙그레 웃으며, 『늙은 몸이 할 일을 마쳤으매 이제 죽다 한(限) 하리오! 』하고 직립한 자세에 고요히 눈을 감고 칼을 기다리니 순식간에 ‘박순’의 몸은 두 동강이 나, 반은 뱃장위에 반은 강물 속에 풍덩실 떨어져 잠기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반몸은 물에 들고, 반몸은 배위에 있네』(半在江中半在船)하는 노래가 불리었다. ‘태조’께서 이 상보를 들으시고 크게 놀라시며, 『‘박순’은 못 버릴 좋은 벗이었다. 그와 맺은 약속을 그냥 어길 수는 없으리라 』하시고 손을 부비며 슬피 우시었다.
‘태종’도 이 소식을 듣고 ‘박순’을 아깝게 여겨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 반신(半身)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박순’의 아내 임씨(任氏)도 그 소식을 듣고 남편을 따라 스스로 그 몸을 없앴다.
3. 다른 문안사(問安使)
‘태조’께서 회란하시게 되기까지 문안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거니와 ‘태조’의 마음을 돌린 이들도 ‘박순’이 밖에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 뛰어나게 손을 꼽으라면 ‘성석린(成石璘)’과 ‘무학국사(無學國師)’ 같은 이가 될 것이다.
- 성석린(成石璘)
‘성석린’은 ‘태조’와 오랜 사귐이 있던 사람으로서 ‘태종’에게 자청하여 문안사로 가게 되었다. ‘석린’은 흰말(白馬)을 타고 베옷을 입고 지나가는 길손처럼 하여 함흥에 들어갔다.
행재소에 가까이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말은 나무에 붙들어 매어두고 길가에서 밥 짓는 모양을 하였다. ‘태조’께서 그것을 바라보시다가 속으로 『이상한 길손이로고...』하며 생각 하시었는지 중관(中官) 하나를 불러 가보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중관이 ‘석린’에게 이르러 어떠한 사람인지를 물으니 ‘석린’은 고개를 들어 ‘태조’가 보낸 중관을 바라보며, 『네, 나는 ‘성석린’이란 사람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 어디까지 가는 길에 이곳에 들렸다가 마침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고 하니 할 수 없이 여기서 밥을 지어 먹고 아무 곳에 참(店)에나 들어 쉬고나 가렵니다 』 하고 대답 하였다.
중관이 이 말을 듣고 다시 돌아가 ‘태조’에게 그 일을 주달하니 ‘태조’께서 그 말을 듣고 적이 기뻐하시며 다시 중관을 보내 이 ‘석린’을 들어오게 하시었다. ‘석린’이 중관을 따라 들어와 ‘태조’께 보이고 이윽하여 고요한 말소리로, 『전하여! 세상에 지중하다, 지중하다 하는 일이 많기는 많사와도 인륜(人倫) 위에 더한 것은 없을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상량 하소서』하고 말씀을 드리니 금시 ‘태조’께서는 얼굴에 변색을 지으시며,『그래 경도 경의 임금을 위하여 이곳으로 와서 은근히 내 마음을 눅이려는 것인가 』하고 큰 소리로 꾸짖으신다.
‘석린’이 한걸음 물러앉으며, 『신이 감히 그럴 수가 있겠사옵니까, 만일에 그러 하옵다면 신의 자손이 반드시 눈이 멀리라고 맹세 하옵니다 』하며 머리를 깊이 숙인다. 그러면서도 ‘석린’은 그 마음에 어쩐지 알 수 없이 자기의 한말이 스스로 거리끼었다. ‘태조’는 ‘석린’의 말을 들으시고 그 진심으로 위함인 것을 믿으시어 마음에 돌아오실 뜻이 일어나시었다. 그 뒤로 기이할사! 과연 ‘석린’의 자손에게서 눈먼 이들이 생기었다.
- 무학국사(無學國師)
‘무학국사’는 본시부터 ‘태조’와 여간 친교 하던 사이가 아니었던 만큼 ‘태종’의 조정에서는 ‘무학’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들 말이 있었다. 그리하여 ‘무학’이 ‘태종’의 명령으로 문안사가 되어 함흥에 계신 ‘태조’에게 이르니 ‘태조’께서 노하시며, 『대사도 또한 그러한 말을 하려고 왔는가』하시었다. ‘무학’은 웃으며,『전하는 어찌 그리 양해하시지 못하십니까? 빈도(貧道)가 일찍이 전하를 모시고 서로 친한지 수십 년이 아니옵니까, 이제 특별히 전하를 위로 하고자 왔사옵니다 』하니 ‘태조’께서 그제야 얼굴빛을 곱게 가지시며 몇 날 동안 같이 유하시기로 하였다.
그러나 몇 날 동안 유하며 ‘무학’은 ‘태종’의 단처(短處)를 입 밖에 말하지 아니하였다. 수 십일이 그렇게 지나니 ‘태조’는 ‘무학’을 확실히 믿으시게 되었다. 그제야 어느 날밤, 밤은 깊어 고요한데 ‘무학’은 미로서 입을 열어, 『아무개(太宗)는 진실로 죄가 있사옵니다. 그러나 전하는 자식을 사랑하시어 그 일을 다 잊으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이제 끊어진다면 전하의 평생신고의 큰업(大業)을 장차 뉘손에 맡긴단 말이오. 원컨대 세 번 생각 하소서 』하니 ‘태조’도 그 말에는 깊이 느끼시고 회란하기를 허락하시었다. ‘무학’은 ‘태조’에게 더 지체 없이 떠나시기를 재차 권하였다.
4. 태조(太祖)의 회란(回鑾)
‘성석린’, ‘무학’, ‘박순’ 등 여러 문안사들의 말을 들으시고 ‘태조’는 마침내 회란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들어오고자 아니 하시고 처음에 소요산(逍遙山)까지 오시어 몇 달 동안을 머무시었다. 그러다가 다시 풍양(豊壤)으로 오시어 거기에서는 행궁(行宮)을 지으시고, 또 얼마 동안을 거하시었다. 그러신 다음에야 입성(入城)하시기를 허락하시었다.
그러고도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가기는 간다마는 그 꼴을 내 어찌 본단 말인고! 』하시며 못 마땅하신 듯 입맛을 다시시었다. 그 때에 ‘태종’은 친히 들 밖에 나가 ‘태조’를 맞으시려 하였다. ‘태종’이 출교(出郊) 하시려는 것을 보고 ‘하륜(河崙)’이 ‘태종’에게 들어가, 『상왕(上王)의 진노하심이 아직 다 풀리시지 아니 하셨을 터이오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아오리다. 들 밖에 차일(遮日)<햇빛을 가리는 천막>을 치시되 한 가운데 세우는 기둥은 몇 아름되는 큰 나무를 쓰심이 가할 줄 아옵니다.』하고 아뢰니 ‘태종’도 그 말의 뜻을 알아 들으시고 이에 열 아름이 넘는 큰 나무로 기둥을 삼아 장막을 치게 하고 그 속에서 ‘태조’의 회람을 기다리시며, 크게 상하시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었던 만큼 돌아오신다는 것도 근심이 되어 고개를 숙이셨다 드셨다 하시며 얼굴에는 무거운 괴로움이 드시었다.
이윽고 ‘태조’께서 그곳에 이르시니 장막속의 ‘태종’을 바라보시고는 금시로 얼굴에 노하신 빛이 나타나시며 쌓이고 쌓이었던 미운 생각이 불현 듯 일어나시어 활을 앞으로 들고 백우전(白羽箭)을 급히 걸어 ‘태종’을 향하여 기껏 쏘시었다. ‘태종’은 당황해 하시며 미리 준비해 둔 기둥 뒤로 화살을 피하여 몸을 숨기시니 ‘태조’가 쏜 화살은 기둥위에 와 무섭게 박히었다.
그제는 어찌할 수 없는 터이라 ‘태조’께서도 노하셨던 얼굴을 펴시고 웃으시면서,『하늘이 돌보는 일이니 낸들 어이하랴! 』하시고 품속으로부터 국보(國寶)를 내어 주시면서, 다시 말씀을 이어,『원하는 것이 이것이니 이제는 가져가!』하시었다. ‘태종’은 눈물을 흘리시며 세 번 절하고 사양한 뒤에 국보를 받아 지니시었다.
그리고 ‘태종’은 잔치를 베푸시고 ‘태조’에게 잔을 드리려 하시었다. 그 때에 ‘하륜’ 등이 ‘태종’께서 잔을 부으시는 곳에 들어가, 『잔을 잡으시고 헌수(獻壽) 하실 때에도 친히 받드심은 불가하옵니다. 마땅히 중관을 시키시어 잔을 드리게 하소서. 』하고 가만히 아뢰었다.
‘태종’도 그 말을 들으시고 그러함이 옳겠다고 생각하시며 중관들을 사이에 넣어 잔을 올렸다.
‘태조’께서 잔을 받드시어 마시기를 그친 다음에 또 한번 웃으시며, 『참으로 천운이라 아니할 수 없군! 』하시고 소매 속으로부터 무쇠 방망이를 꺼내 내시어 앉으신 자리 곁에 ‘꽝’하고 치며 놓으신다. ‘태종’과 가까이 앉았던 여러 대신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때로부터 ‘태종’은 마음을 놓으시고 정사를 잡으셨으며, ‘태조’도 별궁에 거하시며 지난날의 온갖 일을 다 잊어버리시고 남은 해를 평안히 지내시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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