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선계(璿系)

hellofine 2011. 7. 18. 17:21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선계(璿系)

 

연려실기술 제1권

 

선계는 이씨(李氏)이니 관향이 전주(全州)이다. 전주부는 본시 백제의 완산(完山)인데,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고,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구주(九州)의 수를 채웠다. 효공왕(孝恭王) 때에 견훤(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라 칭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9년에 신검(神劒)을 쳐서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고 고쳤다가, 23년에 다시 전주로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按撫使)라 칭하고, 14년에 12주 절도사를 설치하면서 이 땅을 순의군(順義軍)이라 이름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현종(顯宗) 때에 안남 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전주 사람이 원 나라 사신 야사부하[埜思不花]를 잡아가둔 일이 있었으므로 강등시켜 부곡(部曲)으로 만들었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로 만들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해에 자기의 본관이므로 완산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선원보략(璿源譜略)》

 

시조의 휘는 한(翰)이다. 신라의 사공(司空)으로 신라 태종왕의 10세 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은의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영조(英祖) 신묘에 전주 조경묘(肇慶廟)에 향사하였다.

2세 휘는 자연(自延)이니 시중(侍中)이다.

3세 휘는 천상(天祥)이니 복야(僕射)이다.

4세 휘는 광희(光禧)이니 정간(政干)이다. 선보(璿譜)에는 아간(阿干)이라 쓰였다.

5세 휘는 입전(立全)이니 사도(司徒)이다.

6세 휘는 긍휴(兢休)이니 고려에서 벼슬하였다.

7세 휘는 염순(廉順)이다.

8세 휘는 승삭(承朔)이다.

9세 휘는 충경(充慶)이다.

10세 휘는 경영(景英)이다.

11세 휘는 충민(忠敏)이다.

12세 휘는 화(華)이다.

13세 휘는 진유(珍有)이다.

14세 휘는 궁진(宮進)이다.

15세 휘는 용부(勇夫)이니 대장군(大將軍) 흥무위 대장군(興武衛大將軍) 겸 태자청도솔부솔(太子淸道率府率)이다.

16세 휘는 인(璘)이니 내시집주(內侍執奏)이다. 시중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극겸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묘는 삼척(三陟) 노동(蘆洞)에 있다. 혹은 내시집주 보승장군(內侍執奏保勝將軍)이라 한다.

17세 휘는 양무(陽茂)이니 장군이다. 상장군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묘는 삼척 서쪽 노동에 있고, 부인의 묘는 삼척 서쪽 동산지리(東山地里)에 있다. 혹은 신기위 도령 좌우위 중랑장(神騎尉都令左右衛中郞將)이라 한다.

 

삼척은 옛날의 실직국(悉直國)이다. 태조는 삼척이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시켰으며, 또한 부사(府司)와 고로(古老)에게 홍서대(紅犀帶)를 내렸다 한다. 목조 아버지의 능은 노지동(蘆地洞)에 있으며, 어머니의 능은 동산지리(東山地里)에 있다. 홍치(弘治) 기유 성종(成宗) 20년에 예조공사(禮曹公事)로 인하여 감사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군인들을 뽑아서 두 능의 허물어진 곳을 수축하도록 하였는데, 일을 시작할 때에 갑자기 금벌(禁伐)만 하고 수축은 정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것은 연대가 너무 오래되고 문적(文籍)에 징빙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인조(仁祖) 경진년(1640)에 박지영(朴之英)이 삼척의 능에 대한 꿈 이야기를 써서 올려, 능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 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의 임오년 비변사(備邊司) 계사(啓辭)에, “본조의 능은 목조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ㆍ환조(桓祖) 4조 외에는 모두 어디인지 모른다는 설이 이색(李穡)이 지은 태조 선묘기(太祖先墓記) 중에 실려 있고, 태백산(太白山)의 노동(蘆洞)에 목조의 아버지와 어머니 능이 있다고 하는 말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조종(祖宗) 때로부터 선조(宣祖)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여러 차례 그곳을 찾았다는 것이 삼척의 관등록(官謄錄) 중에 있고,작년에 이명한(李明漢)이 강원 감사로서 명을 받아 그곳에 가서 살펴 보고 올린 노동의 도형(圖形)이 보통의 묘와는 같지 않았습니다. 전에 성종(成宗) 때에 이미 그곳을 찾아 대신에게 의논하여 금벌만 하고 봉식(封植)은 하지 않았습니다. 선조 때에 감사 정철(鄭澈)이 봉식을 할 것을 청하므로 그때에도 역시 대신에게 의논하여 다만 성종 때에 하던 그대로만 하였습니다.삼척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성종(成宗) 때 찾았다는 노동은 참 노동이 아니고 실은 황지(黃池) 위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곳에 투장(偸葬)하였다고도 합니다. 선조 때 삼척 부사(三陟府使) 황정식(黃廷式)의 상소로 인해 한 차례 크게 찾았고, 그 뒤 다시 기축년과 경인년에 연이어 찾았습니다. 그러나 작년에 이명한이 살펴 본 곳은 성종 때에 찾아 놓고도 의심이 나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그곳이고 보니, 다시 참 능을 찾아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시골의 백성들은 사사로이 물으면 실상대로 얘기하다가도 관(官)에서 물으면 도리어 실정을 숨기니, 지금 이 일은 감사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안동과 삼척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워서 기한에 구애됨이 없이 방편을 써서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여,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난정첩(蘭亭帖)을 빼앗아 오던 일과 같이 하여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지천집(遲川集)》 ○ 《조야기문(朝野記聞)》 중 황지사적(黃池事蹟) 1권에 전후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8세 목조(穆祖)의 휘는 안사(安社)이다. 태조가 목왕(穆王) 덕을 펴고 의를 잡는 것을 목이라고 한다. 이라 추존하였다. 태종이 시호를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 더 올렸다. 고려 지의주사(知宜州事)의 벼슬을 하였고, 원 나라에 벼슬하여 남경 5천호소(南京五千戶所)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 지원(至元) 11년 갑술 고려 원종(元宗) 15년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태조실록 권수총서(太祖實錄卷首總書)》에 이르기를 목조(穆祖)의 기신(忌辰)은 12월이라고 하였고, 《동각잡기(東閣雜記)》또한 12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축년일록(逐年日錄》을 상고하니, 모두 3월 10일을 기신으로 삼았으므로 그대로 좇는다. 능은 덕릉(德陵)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에 있으니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목조(穆祖)는 경흥부(慶興府)에서 죽었다. 처음에는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장사하였다가 태종 10년 경인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 《동각잡기》에 함흥의 달단동(韃靼洞)이라고 하였다. 이다.

 

○ 비(妃)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는 본관은 평창(平昌)이니, 천우위(千牛衛) 장사공(長史公) 이숙(李肅)의 딸이다. □□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태조가 효비(孝妃)라 추존하였고, 태종이 시호를 더 올려 효공(孝恭)이라 하였다. 능은 안릉(安陵) 처음에는 덕릉(德陵)과 동원(同原)으로 경흥부(慶興府)에 장사하였다가, 태종 경인년(1410)에 이장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다.

목조는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사방에 나가 활동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 과거에 목조가 전주에 있을 때에,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와서 목조가 사랑하는 기생과 관계하므로 목조와 싸움이 벌어졌다. 지주(知州)가 노하거늘 목조가 지주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하였더니, 지주가 조정에 알려 군사를 동원하여 목조를 해치려 하므로, 목조가 미리 알고서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갔는데, 고을 백성 중 따라 옮기는 자가 170여호나 되었다.뒤에 강릉도의 안렴사(按廉使)가 새로 임명되니, 그가 바로 전주에서 목조와 싸우던 산성별감이었다. 목조는 장차 안렴사가 부임한다는 말을 듣고서, 가족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함길도(咸吉道)의 의주 용주리(宜州湧州里) 지금의 덕원부(德源府) 에 이르러 살기로 하였는데, 170여호가 또 모두 따라갔다. 얼마 후에 원 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 땅 지금의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에 있다. 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원 나라에서 목조를 5천호소 다루가치 원 나라 제도의 벼슬 이름 로 삼으니, 동북 방면의 사람들이 모두 목조를 진심으로 좇았다. 왕업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목조가 고려조의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가 되어서 고원(高原)에 진을 치고 원 나라 군사를 막았다. 이때 영흥 이북(永興以北)은 원 나라에 속하였는데, 원 나라 산길대왕이 와서 쌍성(雙城)ㆍ영흥(永興)에 주둔하여 철령 이북(鐵嶺以北)을 빼앗으려 하며 목조에게 원 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목조가 부득이 김보노(金甫奴) 등을 거느리고 항복하니, 때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이요, 송 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이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목조가 알동에 있을 때, 여진(女眞)의 여러 천호소에 이를 때마다 저들이 반드시 소와 말을 잡고 잔치하기를 여러 날씩 하였으며, 여러 천호가 알동에 이르면 목조도 역시 그렇게 하여 드디어 서로 자주 연회하였으니, 익조(翼祖)가 천호자리를 세습한 뒤에도 그렇게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경흥부 남쪽 12리쯤 되는 적지(赤池) 가운데 둥근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가 35보(步)이고, 둘레가 90보이며, 사면으로 물이 고여 있어 사람들이 통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목조의 덕릉은 이 봉우리 위에 있는데, 장사 때에 중국인이 와서 자리잡아 준 곳이다. 태조가 제군사(諸軍事)가 되었을 때에, 길주 안무사(吉州按撫使) 이원경(李原景)으로 하여금 가서 성묘하게 하였다.진무(鎭撫) 백충신(白忠信)은 원래 원경의 부하로서 원경과 함께 생포된 자인데, 본래 풍수지리를 잘 알았다. 원경에게 말하기를, “이 능의 자손에서 왕이 될 자가 나겠다.” 하니, 원경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용비어천가》 태종 10년 경인에 야인(野人)의 난으로 인하여 두 능을 함흥의 합란북(哈蘭北)으로 옮겼다. 《동각잡기》

19세 익조(翼祖)의 휘는 행리(行里)이다. 태조가 익왕(翼王)으로 추존하였으며, 생각이 깊고 원대한 것을 익이라 한다. 태종이 강혜 성익(康惠聖翼)이란 시호를 더 올렸다. 원 나라 조정에서 천호(千戶)를 세습시켰다. 덕원(德源)의 적전사(赤田社)에서 나서, □□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능은 지릉(智陵) 안변(安邊) 서쪽 서곡현(瑞谷縣)에 있으니 임좌 병향(壬坐丙向)이다. 표석이 있다. 이다.

 

○ 비(妃)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는 본관이 등주(登州)이고, 호장(戶長) 기열(基烈)의 딸이다. □□ 9월 20일에 승하하였는데, 태조가 정비(貞妃)로 추존하였으며, 태종이 정숙의 시호를 더 올리고, 능은 숙릉(淑陵) 문천(文川) 동쪽 초한사(草閑社)에 있으니 갑좌경향(甲坐庚向)이다. 표석이 있다. 이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점 성해지니, 여진 여러 천호의 부하들이 모두 익조에게로 쏠렸다. 여러 천호가 시기하여 해칠 것을 꾀하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장차 북쪽 지방에 가서 사냥하고 오겠으니, 만나는 것을 20일간 중단하자.” 하였다. 익조가 허락하였는데,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익조가 친히 해관성(奚關城)에 가다가 길에서 물통을 이고 손에는 사발을 들고 오는 한 노파를 만났다. 익조가 목이 말라 물을 청하니, 노파가 사발을 씻어 물을 올리며, 말하기를 “당신은 모르십니까. 이곳 사람들이 실은 당신을 해치려고 청병(請兵)하러 갔는데, 당신의 위엄과 덕망이 아까우니, 내가 알려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익조가 급히 돌아와서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서 적도(赤島)에서 만나기를 약속하고, 자신은 손부인(孫夫人)과 함께 경흥 뒷고개에 이르러서 알동의 들판을 바라보니, 적의 기병이 가득찼으며 선봉 3백여 명이 거의 다가왔다. 익조가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서 해안에 이르니, 해안에서 적도 지금 경흥부 남쪽 40리에 있는데, 주위가 12리이다. 에 이르기까지 수면의 넓이가 6백 보나 되었다.원래 조수(潮水)도 없는데다 깊어서 건널 수도 없고 약속하였던 배도 오지 않아 어찌할 수가 없던 차에, 문득 물이 백여 보만 남기고 물러가서 익조가 부인과 백마를 함께 타고 건넜다. 따르는 사람들이 다 건너고 나니, 물이 다시 크게 밀려왔으므로 적이 왔다가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 갔다. 북방 사람들이 지금까지 말하기를, “하늘이 도운 것이지, 인력은 아니다.”고 한다.

 

○ 익조가 토굴을 만들고 살았는데, 그 터가 지금도 있다. 알동 사람들이 익조가 적도에 있음을 듣고 모두 따랐다. 후에 익조가 덕원부(德源府)에 돌아가서 사니, 경흥 백성들이 저자에 가듯 많이 따라갔다. 《여지승람》

 

○ 원 나라 세조(世祖)가 왜(倭)를 칠 때, 천하의 병선이 우리나라에 모였다. 고려 충렬왕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큰 배를 만들고 장수를 뽑아서 정예병을 거느리고 가서 왜를 치게 하였다. 이때 익조 역시 원 나라 조정의 명령으로 와서 참가하였다. 충렬왕을 공손히 뵈니 충렬왕이 이르기를, “그대는 원래 본국의 벼슬하던 집안 사람이니, 어찌 근본을 잊었겠는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20세 도조(度祖)의 휘는 춘(椿)이다. 태조가 도왕(度王) 마음이 능히 의를 마련하는 것을 도(度)라 한다. 으로 추존하였으며 태종이 공의 성도(恭毅聖度)의 시호를 더 올렸다. 함흥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나서, 지정(至正) 2년 임오 고려 충혜왕(忠惠王) 후 3년 7월 24일에 승하하였다. 고려조에서 찬성사를 추증하였으며, 능은 의릉(義陵) 함흥 동쪽 운전사(雲田社)에 있으니 임좌병향(壬坐丙向)이다. 표석이 있다. 이다.

 

○ 비(妃)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는 본관이 문주(文州)이고, 원조(元朝)의 천호(千戶)이며, 본조의 증 문하시중(贈門下侍中)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광(光) 박씨 족보에는 이름을 한보(韓甫)라 하였다. 의 딸이다. □□ 7월 23일에 승하하였다. 태조가 경비(敬妃)로 추존하였으며, 태종이 경순(敬順)의 시호를 더 올렸다. 능은 순릉(純陵) 함흥 동쪽 동명사(東溟社)에 있으니 임좌병향(壬坐丙向)이다. 표석이 있다. 이다. 익조가 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도조(度祖)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 이름으로는 학얀테물[學顔帖木兒]이었다. 《동각잡기》

 

○ 3남 3녀를 두었다. 1남은 자흥(子興) 증 병조판서 이고, 2남은 곧 환조(桓祖)이며, 3남은 자선(子宣) 완산백(完山伯) 이다. 장녀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출가하였으며, 2녀는 다루가치 금마분(金馬粉)에게 출가하고, 3녀는 허중(許重)에게 출가하였다.

 

○ 세상에 전하기를, 도조가 젊었을 때 백룡이 현몽하여 말하기를, “나는 적지(赤池)의 백룡인데, 흑룡이 내가 사는 곳을 뺏으려 하오. 그대는 활을 잘 쏘니, 나를 위하여 쏘아 주시오.” 하였다. 도조가 다음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못가로 가니 과연 두 용이 싸우고 있었는데, 주객을 분간하지 못하겠으므로 그대로 돌아왔다.그날 밤에 백룡이 또 현몽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쏘지 않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두 용이 싸우는데, 흑과 백을 분간하기 어려워서 쏘지 못하였다.” 하자, 말하기를 “내일 먼저 오는 것이 나이니 반드시 기억하라.” 하였다. 도조가 아침에 가서 보니 또 두 용이 싸우고 있었다. 뒤에 온 용을 쏘아서 단번에 허리를 명중시키니, 객룡(客龍)이 흘린 피가 적지에 가득 찼다. 그래서 ‘사룡연(射龍淵)’이라 부른다. 《여지승람》

 

21세 환조(桓祖)의 휘는 자춘(子春)이요, 자도 자춘이다. 태조가 환왕(桓王) 땅을 개척하고 먼 곳을 복속시킴을 환(桓)이라 한다. 으로 추존하고, 태종이 연무 성환(淵武聖桓)의 시호를 더 올렸다. 연우(延祐) 2년을 을묘 고려 충숙왕 2년 에 탄생하였는데, 공민왕을 섬겨서 태중대부 사복경(太中大夫司僕卿)이 되었으며, 집 한 채를 주어서 살게 하였다. 벼슬이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이르고, 몽고 이름으로는 우룻부하[吾魯思不花]였다.지정(至正) 20년 경자 공민왕 9년 4월 갑술에 승하 《통국통감》 《고려사》 《태조실록》에 모두 신축년 4월 30일 경술로 썼는데, 이색(李穡)의 문집에 있는 환조의 옛 비와 정총(鄭摠)이 지은 정릉 비문이 모두 경자년 4월 갑술이라 썼으므로, 이제 그것을 따른다. 하니, 나이 46세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증하고, 능은 정릉(定陵)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으니 을좌신향(乙坐辛向)이다. 경자년 8월 병신일에 장사하였고, 이색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는데 뒤에 정총이 지은 것으로 바꿨다. 이다.

 

○ 비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는 본관이 영흥이고, 원조(元朝)의 천호(千戶)이며, 본조의 증 판문하 영흥백 정효공(靖孝公) 한기(閑奇) 최씨 족보에서의 이름은 한기(漢奇) 의 딸이다.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으며, □□ 2월 24일에 승하하였다. 태조가 의비(懿妃)로 추존하였으며, 태종이 의혜(懿惠)의 시호를 더 올렸다. 능은 화릉(和陵) 정릉(定陵)과 같은 산이다. 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사자(嗣子)는 태조이고, 장녀는 삼사 좌사(三司左司) 조인벽(趙仁璧)에게 출가하였다. 1남 원계(元桂) 이씨 소생 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완산군(完山君)을 봉하였으며, 2남은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의 소생이다. 였다.

 

○ 환조의 장사 때, 태조가 함흥에 있으면서 길지(吉地)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마침 길 가에서 스승과 제자 두 중이 쉬면서 스승이 제자 중에게 동산(東山)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곳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산이 세 갈래로 내려온 것 중, 가운데 낙맥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것 같습니다.” 하였더니, 스승이 말하기를, “네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는데 오른손이 긴요한 것 같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 하였다.얘기하는 것을 마침 태조의 집 종이 엿듣고 달려와서 태조께 아뢰니, 태조가 말을 재촉하여 따라가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중을 만나 매우 간절히 청하여 드디어 함께 와서 지성으로 절하며 청하여 그 장지(葬地)를 얻었다. 《북로 능전지(北路陵殿志)》 ○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이와 조금 다르다. 두 중 가운데 나이 많은 이는 나옹(懶翁)이고, 나이 적은 이는 무학(無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랐으며, 점점 자라면서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니 군사들이 즐겨서 따르고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그가 승하하니 사대부가 다 놀라면서, “동북면(東北面)에 인물이 없어졌다.” 고들 말하였다. 정릉(定陵)의 옛 비문이다.

 

 

[주B-001]고사본말(故事本末) : 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

 

[주C-001]선계(璿系) : 선(璿)은 왕실의 존귀함을 표시한 것인데, 선계는 왕실의 세계(世系)를 말한 것이다. 《선원선보(璿源璿譜)》도 이와 같다.

 

[주D-001]진흥왕이 …… 설치하였고 : 이 말은 저자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전주부(全州府) 건치연혁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이는 사실과 다르다. 즉 《여지승람》 고호를 비사벌(比斯伐, 比自火) 이라고 했는데,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6년(555) 봄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했다.’는 기사를 같은 ‘비사벌’ 이라고 인식한 결과이다.《삼국사기》에 나오는 ‘비사벌’은 지금은 경상남도 창녕(昌寧)을 말한다.

 

[주D-002]봉식(封植) : 분묘를 봉축하고 주위에 나무를 심는 것.

[주D-003]투장(偸葬) : 남의 분묘 부근에 몰래 장사 지낸 것.

 

[주D-004]난정첩(蘭亭帖) 을 …… 일 : 당 태종이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첩 진본(眞本) 을 구하려는데,지영(智永)이라는 중이 그것을 감추고 내놓지 않으므로, 태종이 소익(蕭翼) 으로 하여금 본색을 감추고 지영을 찾아가 여러 날을 두고 온갖 흉계를 써서 난정첩을 훔쳐 왔다는 고사.

[주D-005]지주(知州) : 고려 때 주의 장관, 지금의 시장ㆍ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