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五백년 야사 ③
국민보 제三천三백五十八호 신한국보 제一百호
발행일 1955-11-23
충절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
태조(太祖)가 창왕(昌王)을 폐하시던 날에 제장과 여러 신하들이 모여 모두 인군(人君)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덕이 없노라 사양하였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던 것이다. 정포은(鄭圃隱)이 스승이 되어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그는 당시 제일의 명현(名賢)이었다. 그리고 일편단심 왕씨 조정만을 위하는 터이었다. 태조가 정정당당한 죄목으로 최영(崔瑩)을 죽이고 우왕과 창왕을 내쳤는바 그로서도 구태여 좌단할 재주가 있었고 다시 왕씨를 가려 지상으로 섬기는 바에 포은 인들 무슨 힘으로 태조를 반대하랴. 다만 태조의 기상과 권력을 보건데 필경 나라를 옮겨 갈듯 함으로 꺼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승 자리에 앉아서 아름답고 좋은 제도를 많이 설비하였다.
그리하여 미구에 당할 나라에도 태평한 기상이 있었고 뒤에 일어난 태조의 법제까지가 그것을 준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고려(高麗)를 위하여 만고의 충신 현상이었다. 그러나 결코 이조(李朝)를 위해서 해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는 왕씨를 위하는 마음이 철석같았고 물망 높은 재상으로 정사를 베풀었으므로 태조의 강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태조(太祖)는 천명(天命)을 기다렸으나 배극렴, 조준, 정도전, 하륜 등은 태조를 추대하려고 성화같이 일을 재촉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꺼렸기는 포은이 있었으므로 태종(太宗)에게 가만히 말하였다. ‘포은을 살려두고는 일이 되지 않겠으니 그를 없애버립시다’. 태종도 그 심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가 일대에 명현이요, 백성의 흥망을 한 몸에 모으고 있음 아는지라 섣불리 살해키 어려웠다.
한 번은 의지기를 떼볼 양으로 잔치를 베풀어 놓고 포은을 청하였다. 태조와 한자리에 좌정시킨 다음에 태종이 친히 술을 부어 권하면서 노래 한 곡조를 지어 뜻을 떼 보자 포은은 저 유명한 단심가로서 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태조는 그 노래를 듣자 그의 뜻을 물었다.
이지란(李之蘭)은 개연탄식하며 말하였다.
‘천명이 있을진대 그 한사람으로 하여 성사치 못할 이가 없겠는데 어찌 차마 도덕군자요, 명현인 그를 살해하려고 하십니까. 이 사람은 비록 무식한 인물이오나 그 일에는 참여치 못하겠소이다.’ 태종도 그 말이 지당할 줄 알았다. 그러나 포은을 그냥 두고 기달릴 수도 없는 사태라 비장한 마음으로 심복장사 조영구를 불러 분부하였다. 그대는 군기고의 쇠도릿개를 가지고 선죽교 근처에 가서 은신하고 있다가 내일 아침 포은이 조회에 들어가는 길에 그곳을 지날 터이니 내달아서 때려죽이고 와서 회보하였다 라고 말을 마치고는 그는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이때에 포은(圃隱)은 태조(太祖)의 기세와 태종(太宗)의 동정으로 보아 필경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군을 위하는 그의 마음에는 검은 구름이 엉기었다. 그러나 제어할 능력은 그에게도 없었다. 다만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올 뿐 어느 날 조복을 입고 말에 올라 조회의 들어가는 때였다. 멀리 바라보니 어떤 장대한 사람이 쇠도릿개를 땅에 질질끌고 갔다. 포은은 선뜻 오는 예감이 있었다. 곧 녹사를 보고 말하였다.
‘오늘은 공기가 매우 험악하다. 나는 이미 정한 마음이 있으나 구태여 피하고자 하지 않거니와 너는 공연히 화를 당할 까닭이 없으니 피하여라.’ 일이 있을 줄 알고 당신은 명을 바쳐도 하는 수가 없지만 녹사가 잘못 죽을까 염려함이었다.
녹사 김경조는 공민왕 때에 시중벼슬을 한 김구주의 아들이었다. 성질이 충직 강개한 사람으로 평일에 포은의 충성을 우러러 받들었던 터이었으므로 이제 포은의 마지막 말을 듣고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상공께서 변을 당하실 바에는 소인이 어찌 혼자 살기를 도모하리까. 뫼시고 가겠읍니다.’
아무리 말려도 기어이 따랐다. 포은은 마지 못하여 다른 하인들만 떼어 보내고 녹사만 데리고 말을 손수 끌고 갔다. 도중에 성여완의 집에 들어갔으나 그는 없었다. 그는 전에 정승을 지낸 일이 있는 분으로 포은과는 정도한 친구였다. 그 집에 술맛이 좋았다. 그리하여 술도 얻어 마실 겸 작별을 하러 들어간 것인데 그는 출타 중이었다.
녹사를 시켜 하인을 불러내어 안에 들어가 술을 많이 가져오라 했으므로 안에서는 평일에 흔히 와서 술을 마시는 포은 상공인줄 알았다. 술을 많이 진배 하였는데 포은은 몇 잔이고 거듭하였다. 그리고 녹사도 서너 잔을 먹인 다음 술상을 들여보내고 문밖에 나왔다. 말을 타시는데 말머리가 뒤로 가게 하여 타신다.
녹사가 포은께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말을 거꾸로 타시는 까닭을 묻자 포은은 대답하기를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와 살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기가 싫어서 술을 많이 먹었고 앞으로 달려들어 때리는 것을 보기가 싫어서 말을 둘러 타는 것이다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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