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고려 역사

고봉산하(高峰山下)의「나절」陵

hellofine 2011. 3. 20. 15:43

고봉산하(高峰山下)의「나절」陵

 

恭讓王의 最後 審判場/高陽 崔承斗

동아일보 1932년 9월 14일

 

서경역(西京域) 밖엔 불 비치오.

안주역(安州域) 밖엔 연기로다.

그 사이 오고가는 이원사(李元師)여.

우리 백성(百姓) 건지시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오백사십년전 고려(高麗)시대에 백성이 망해가는 만월대(滿月臺)를 바라보며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돌아오는 이성계(李成桂)를 보고 부르는 동요이었다. 그 후 고려(高麗)의 운명과 같이 공양왕(恭讓王)의 신변도 차츰 차츰 위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공양왕 3년(1391년)의 봄은 왔다. 산과 들에는 푸른 풀과 붉은 꽃이 색색이 수놓아 들어가는 3월 어느 날이었다.

 

송악산(松嶽山) 밑에 고효히 잠든 송경(松徑)의 밤이 밝자마자 많은 백성은 술렁 술렁하고 백관들은 당시의 공양왕(恭讓王)을 모시고 당시의 남경(南京)(지금의 서울)으로 천도(遷都)도 할 겸 고양(高陽)으로 온 최영(崔瑩) 장군의 구원도 받을 겸 간단한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송경을 떠나서 경의(京義)가도를 밟아 벽제관(碧蹄館)에 들어서서 점심 수라를 들으려 할 때에 이성계(李成桂)의 추병(追兵)이 급하다는 전갈이 도착되었으므로 수라조차 마치지 못한 공양왕(恭讓王)은 경성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는 최영(崔瑩) 장군이 있는 고봉산(高峰山) 부근으로 가는 것이 좋다는 신하의 진언에 따라서 벽제관에서 서남간으로 피난을 하여 지금의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高揚郡 元堂面 元堂里)에다가 류진을 하고 이성계(李成桂)를 대진하여 싸우다가 중과부족이라 군사도 많거니와 인심조차 변하여 군사의 태반은 이성계에게 귀화하고 말므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저항할 바 없어 산속에 있던 조그만 연못에 뛰어들어 근 오백년간 고려(高麗)의 영화롭던 최후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었으며 최후까지 왕의 뒤를 따르던 대신도 천추의 한을 품고 이곳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중충한 밤이 되면 간간히 말굽소리가 요란하여 부근사람으로 하여금 곤한 잠을 깨이게 한다고 하는데 뒤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곳을「나절 陵」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공양왕(恭讓王)이 이곳에 와서 반나절을 임금 노릇하다가 죽었으므로 ‘나절 陵’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능(陵)은 지금 총독부 보안림(保安林)이 되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으므로 다행히 수목만은 울창하나 봄바람 가을비 오백여년간에 능상(陵狀)은 전부 헐벗고 비석은 거의 쓰러져서 글조차 찾기 어려운데 무심한 새소리만이 옛일을 지저기는 듯 하고 공양왕(恭讓王)이 최후를 마쳤다는 연못은 해마다 줄어들어 지금에는 형적만이 남아 있으나 아직까지 푸르름이 이끼와 섞이어 우중충하게 들어내 보일 때 일대의 갖은 영화를 한 몸에 싣고 있던 고려(高麗)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이 이곳에서 비참한 운명을 마칠 줄이야 누가 뜻 하였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