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hellofine 2010. 7. 3. 16:41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이한우 지음/요약본

조선 500년을 돌아보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7년에 걸쳐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왕조실록 번역판을 완독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며 묻는 것이 바로 ‘조선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 어떻게 달랐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필자는 늘 이렇게 답한다. ‘거기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기에는 우리와 거의 똑같은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물론 조선시대 사람들과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이 같을 수는 없다. 그들의 역사적 조건과 경험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사적 조건 및 경험과 판이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군주제 국가였고, 지금은 민주정 국가이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고 지금은 신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조선은 자유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라였으나 지금은 자유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이다. 무엇보다 조선은 중국의 변방에 붙어 어렵사리 그 존재를 이어온 힘없고 가난한 국가였고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부유한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500년에 걸쳐 형성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자유 민주국가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 조선은 식민지라는 과도기를 거쳤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정확히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탄생했을 때, 많은 한국 국민들에게 조선은 혐오와 배척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일제 치하에서의 식민 생활을 가져와 백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준 만악의 원흉, 혹은 뿌리로 간주됐다. 36년 식민지 체험은 피식민자들에게는 깊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남긴 것이다. 자기 역사에 대한 비하는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건설이 가속화될수록 점차 제도화되고 관습화되었다. 조선의 재발견은 대한민국이 하나의 나라로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는 90년대 중반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재발견은 곧 식민지의 정신적 외상에서 자유로운 젊은 학자들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마침 그 무렵 조선왕조실록 번역이 완성되고 정보화 작업도 추진되었으며, 실록은 조선의 역사 500년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지평을 열어주었다. 2000년대 들어 실록을 통한 새로운 역사 보기가 붐을 이루게 된 데는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 흐름에는 필자도 속해있다. 필자의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먼저 국왕의 교육과 리더십에 초점을 맞췄다. 더불어 조선 국왕과 재상들의 정치 형태를 면밀하게 추적하는 데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의 정치 형태와 현재의 정치 형태는 상당히 유사했다. 상하 관계, 최고 권력자를 둘러싼 암투, 기득권층과 신진 세력의 반복되는 충돌 등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거기에도 우리와 거의 똑같은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관(通觀)하는 체험을 하게 되면서 막상 직접 역사 자료들을 보니, 예전에 책이나 학자들로부터 보고 배웠던 것들과 다른 사실들도 많았다. 그보다도 당연히 알려져야 할 것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채 내팽개쳐져 있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팠다. 알려져야 할 것들이 묻혀 있으면 우리 역사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조선시대의 역사 자체가 빈곤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우리 후손들의 역사 의식이 빈곤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됐다. 자기화의 결핍에 대한 반성이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보는 것은 곧 자신을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조선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배워서 안 될 것은 배우지 않는 지혜는 온전히 우리 몫이다. 조선인들이 오늘날의 한국인보다 뛰어난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서슴지 않고 ‘역사의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의식이란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세를 말한다. 물론 세종대왕이라는 위대한 국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조선이 고려 500년 역사를 총 정리하는 작업을 완성한 것은 1451년(문종 원년)이다. 조선이 탄생한 지 정확히 60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한민국 탄생 60년이 넘도록 조선 500년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60년 역사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역사를 둘러싼 지식인 사회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두 번째로 실록을 통관하면서 새삼 알게 된 것은, 왕권(王權)이 강할 때는 나라도 강했고, 신권(臣權)이 강할 때는 나라가 쇠약해지고 내우외환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신하들이 득세하면 결국 붕당이 생기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다. 이것은 필자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실록 자체가 가르쳐 주는 엄정한 교훈이다. 조선 전기에는 비교적 왕권이 강했고,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왕권이 약화된다. 아마도 현재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다 보니 강한 왕권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지만, 조선의 역사를 살피면서 그런 거부감이 개입돼서는 안 될 것이다. 즉, 민주주의와 강한 리더십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존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 의식은 이 책 전반에 깔려 있다.

 

조선은 군주의 나라이다 - 흥미로운 일화와 사건으로 왕들의 삶을 재구성하다

 

국왕은 하나같이 지존(至尊)이요, 최고의 권력자였다. 또한 그들은 모두 별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싫건 좋건 한 국왕의 시대는 그 국왕의 성격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조선의 어느 특정 시대를 알고자 하면 먼저 그 당시 국왕의 성격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조선의 국왕을 모르고서는 조선의 기본 골격을 알 수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군주국가 조선의 이야기를 하면서 군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잔 술의 정치, 애주가 세조의 주석 정치: 세조는 쿠데타를 통해 즉위하지만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질이 참 많은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는 친형제뿐 아니라 임금 자리에 있던 조카(단종)까지 죽였기 때문에 적어도 사필(史筆)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평가는 일단 유보해 둔 채 인간 세조를 들여다보면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스케일이 컸고 문무를 거의 완벽하게 겸비한 호걸의 전형이었다. ‘세조’ 하면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는 대단한 애주가였다. 스스로도 호음지벽(好飮之癖)이 있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애주나 호주(好酒)보다는 호주(豪酒)하는 데 있었다. 너무 많이 마셨다. 횟수도 너무 잦았고 한 번 마시는 양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사실 세조에게 술자리는 단순한 유흥이 아닌 통치 행위였다. 세조 8년 12월, 세조가 술자리에서 세자에게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술을 마시고자 하면 너와 여러 장상(將相)들하고만 마셨다. 결코 궁첩(宮妾)들과 마시지 않은 것은 네가 본 바이다.”

 

세조 시대를 ‘주석정치(酒席政治)의 시대’라고 명명한 사람은 최승희 전 서울대 교수(국사학)이다. 최 교수는 세조가 이처럼 지나치게 자주 종친, 공신, 재상, 대신들에게 술자리를 베풀어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조로서는 왕위의 명분과 정통성에 흠이 있으므로 불안하였다. 따라서 종친, 공신, 재추(宰樞, 의정부와 중추부의 고위 관리)들을 친왕 세력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친화책의 일환으로 술자리를 자주 베풀고 함께 취하였다.’ 더불어 과음 상태에서 실수하는 신하들을 걸러 낼 수 있었기에 세조는 더욱 술자리를 중시하였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이렇게 풀이했다. ‘세조는 이처럼 종친, 재추, 승지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면서 그들과 친화하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었고, 그의 왕위와 왕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효과도 함께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분명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호색(好色)은 아니었다. 실제로 세조는 정희왕후 윤씨 외에 근빈 박씨라는 딱 한 명의 후궁만 두었다. 호주(好酒)형 호걸이었던 셈이다.

 

너희가 선조를 아느냐! 선조에 대한 오해를 풀다: 우리에게 선조는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임금으로만 남아 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조 시대에 인재가 가장 번성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선조 특유의 위임 통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는 중요한 사실은 전혀 모른다. 교과서에서조차 추호의 의심도 없이 가르치는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실록으로 추적해 보았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선조가 율곡의 건의를 받아들여 10만 군사를 양병했다면 임진왜란 때 그처럼 무력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선조는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율곡의 건의를 제대로 수용도 못한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임금이라는 부수적 결론도 도출된다. 과연 10만 양병설은 율곡이 제창했으며 선조는 무능하기만 했던 임금일까?

 

선조 15년(1582년)은 관리로서 율곡 이이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선조는 누구보다 이이를 총애하고 있었다. 당시 선조는 이이에게 병판을 맡기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지금 조선의 병력이 고려만 못한데다가 100여 년 동안 태평을 누린 까닭으로 국방이 소홀해져서 남몰래 이러한 점을 몹시 걱정해 왔으나 적합한 인물을 얻지 못했는데, 경이 항상 개혁을 하여 기강을 세우고자 하였으니 국방의 일을 맡아 폐단을 없애고 양병(養兵)의 구상을 만들면 나라에 다행한 일이겠노라.” 그러나 이이는 자신은 병사(兵事)에 문외한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이에 선조는 “국방 강화의 핵심은 양민을 확대하고 국고를 튼튼히 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니 호조판서를 지낸 그대가 적격”이라며 이이의 병판 임명을 강행했다.

 

선조의 명을 받은 이이는 2개월여가 지난 선조 16년(1583년), 소위 ‘10만 양병설’이 포함된 6개조의 개혁안을 선조에게 올린다. 그의 양병론(養兵論)은 양민론(養民論)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민력(民力)이 고갈되면 제갈량이 있다 해도 외적을 막아낼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그는 서얼 허통(庶孼 許通, 서자와 그 자손의 관직 진출 제한을 푸는 것)과 양민 확충을 통해 민력을 키운 다음 그것을 기반으로 10만 정도의 병력을 양성하면 국방이 튼튼해질 것이라는 안을 제시했다. 이때 선조나 이이가 우려했던 외적의 침입은 일본이 아니라 북방 오랑캐였다. 그런데도 마치 이이가 임진왜란을 예견이나 한 듯이 10만 양병설을 주창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왜곡이다.

 

하지만 이이의 양병론은 홍문관(문과 급제자의 최고 엘리트 코스.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의해 무력화되고 만다. 당시 홍문관에는 류성룡이 부제학으로 있었다. 홍문관은 사헌부와 사간원(오늘날 검찰과 언론기관)이 국헌(國憲)을 문란케 하는 병판 이이의 주장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이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이가 양민을 확충하는 방안으로 제시한, 노비들을 일정기간 평안도와 함경도에 살게 한 다음 양민으로 승격시켜 주자는 제안은 조선의 국체인 신분제를 흔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류성룡은 ‘평화로운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란(禍亂)의 단서를 여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자칫 단순논리로 치부될 수도 있다. 이이는 옳았고 류성룡은 틀렸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것은 아니다. 실은 둘 다 옳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국가의 목표를 놓고 볼 때 이이는 강병을 우선시하는 주장이고 류성룡은 부국을 우선시하는 주장이다. 만일 상황이 위급하다면 이이의 주장이, 그렇지 않을 경우는 류성룡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물론 일본이 침략함으로써 이이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지만, 실은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보다는 평화의 시기가 훨씬 길기 때문에 류성룡의 주장 또한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칼날 위 군주의 길을 가다 - 벨 것인가, 베일 것인가? 왕들의 정치 생존법을 밝히다

 

조선의 정치사는 왕과 신하 사이의 파워 게임의 역사였다. 조선은 절대군주제였음에도 왕들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그리고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조선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혹은 정치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아는 것은 조선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압록강을 넘으며 익힌 왕들의 국제 감각: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옛날 역시 국가 최고 지도자의 국제 감각은 필수적이었다. 국제 감각과 관련해 눈길이 가는 대목은 월경(越境)체험, 즉 국경을 넘어본 경험이다. 여기서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정확한 영토 감각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왕 27명 중 조선 반도 밖으로 한 번이라도 나가 본 임금은 태조, 태종, 세조, 효종, 현종이다. 물론 이들의 월경은 모두 임금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조선의 임금은 원칙적으로 국내에서조차 먼 거리 여행이 금지돼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이미 고려 때 장수로 명성을 날리며 여러 차례 압록강을 건너 요동 정벌에 나선 바 있고, 태종이나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사신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묘하게도 조선 전기에 월경 체험이 있었던 이들 3인 모두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그런데 조선 500년 동안 명이나 청의 황제를 대면했던 임금은 딱 두 명뿐이다. 태종과 인조다. 중국 황제와의 대면이 왕들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앞서 소개했듯이 태종 이방원의 경우는 1394년 11월(태조 3년), 조선에서 올린 외교문서에 불경스러운 표현이 들어 있다는 명 태조 주원장의 트집을 무마하기 위해 지금의 남경인 명나라 금릉에 가야 했다. 금릉으로 가는 도중 북경에서 얼마 후 제3대 황제가 될 연나라 왕, 영락제를 만났다. 두 잠룡(潛龍,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의 만남이었다.

 

인조의 경우는 1637년(인조 15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청 태종과 굴욕적 대면을 했다. 바로 병자호란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에 인질로 가게 된 것은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그는 그곳에서 청나라와 조선의 중재역할을 했다)인데, 왕들의 국제 감각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때 소현세자가 귀국해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랐더라면 조선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이 부질없지만은 않다. 당시 소현세자는 심양과 북경을 오가며 청나라로 급격하게 밀려들던 서구 문물의 실상을 상세하게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 감각을 가진 세자와 청나라와의 은밀한 결탁 가능성에 대한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의구심 때문이었는지, 소현세자는 불행하게도 의문사했다. 죽은 소현세자 뒤를 이은 것은 아우인 봉림대군(인조의 둘째 아들, 효종)이었다. 그도 청나라에서 8년 간의 인질생활을 한 바 있었기 때문에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북벌을 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북벌의 결실은 전혀 얻어 내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가설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능동적 월경(越境)은 강력한 권력 의지와 연결되어 왕권 장악을 불러올 수 있지만, 인질과 같은 수동적 월경은 복수심만을 불태우는 극단의 명분론으로 치닫게 될 수 있다고.

 

왕권과 신권, 실록에서 격돌하다!: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 조선 개국의 영웅이자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국왕 이성계가 7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1409년 8월 28일, 태종은 총애가 깊었던 춘추관 영사(領事) 하륜을 불러 『태조실록』 편찬을 명한다. 하명을 받은 하륜은 즉시 실무 사관들에게 “임신년부터 경진년까지의 사초(史草, 사관이 기록하여 둔 역사 기록의 초고)를 모두 거두어들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말단 실무직인 기사관들이 찾아와 따지듯이 물었다. “예전의 역사서를 보건대 모두 3대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전조(前朝, 고려) 때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조실록』을 어찌 오늘날에 편수할 수 있습니까?” 이유 있는 항의였다. 하륜은 정반대로 “옛날 역사서는 바로 다음 임금 때 이뤄졌소”라며 묵살했다. 이에 기사관들도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반박한다. “태조의 구신(舊臣)이 태조의 실록을 찬수(撰修)하면 후세의 의논이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역사 서술의 객관성 내지 공정성과 관련하여 정곡을 찌르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는 한 인물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적어도 한 세대, 30년은 흘러야 한다고 말한다. 기사관들은 같은 맥락에서 반박했던 것이다. 태종을 제외한다면 최고의 실권자였던 하륜은 당대 최고의 경세가요 노련한 정객이었다. 그는 신진 사관들의 주장을 일거에 묵살하며 이렇게 말한다. “태조의 일을 한때의 일만을 기록하는 젊은 사관이 어떻게 다 빠짐없이 기록하였겠소? 족히 사실로 삼을 수 없소! 마땅히 노성(老成)한 신하가 죽지 않았을 때에 본말(本末)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실록을 만들어야 하오.(…)” 두 측의 주장은 마치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신진과 노장의 역사관 충돌을 보는 듯하다. 원로 하륜의 주장과 신진 사관들의 주장은 각기 일장일단(一長一短)을 갖고 있는데, 결국 하륜의 주장이 관철되어 이후 조선에서는 선왕이 죽으면 바로 다음 대에서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실록 열람과 관련해서는 연산군을 빼놓을 수 없다. 1498년(연산군 4년)에 터진 무오사화(戊午士禍)는 바로 실록 편찬을 둘러싼 훈구 세력과 신진 세력의 충돌이었다. 사사건건 아버지 성종을 내세워 자신을 압박해 오던 신진 사림(士林)에게 연산군이 결정적으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 바로 무오사화였다. 7월 13일, 연산군은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린다.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에서 실록을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는데, 평시라면 이 말이 가하다. 그러나 지금 큰일을 상고하려고 하는데 완강히 불가하다고 하니, 이는 반드시 꺼리는 내용이 있어서다. 의금부에 내리어 국문하도록 하라.” 연산군이 실록을 열람했음은 물론이다. 그로 인해 실록 편찬자들은 두고두고 ‘이제 실록은 폭군을 만나면 언제든지 공개될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편찬에 임해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실록을 보고자 왕권과 신권이 부딪친 것은 조선 왕조 초기의 이야기였다. 조선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경우 대체적으로 전반기에는 왕권이 강했고 후반기에는 신권이 강했다. 왕권 대 신권의 강약은 역사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전반기에는 왕이 선대의 기록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후반기로 가면 아예 신하들이 이미 완성된 실록을 다시 써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신권 강화로 인한 당쟁의 여파였다. 이제 역사 서술을 둘러싼 싸움은 임금과 신하가 아니라 신하와 신하 사이에서 일어난다. 『숙종실록』은 영조 초 노론(老論)의 주도로 편찬됐다. 그러나 얼마 후 소론(少論)이 득세하면서 수정 내지 개수를 시도하려 했지만 노론의 힘이 여전히 막강했기 때문에 극히 일부를 손대는 선에서 그쳤다. 그래서 이름도 『숙종보궐정오』다. 약간 보충하고 미미한 오류를 바로 잡았다는 뜻이다. 아마 소론이 막강했다면 『숙종개수실록』이나 적어도 『숙종수정실록』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당대 세력들의 투쟁 기록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대한 현재 세력들의 기록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력 투쟁이나 역사 투쟁 모두 승리 못지않게 정당성(혹은 정통성) 확보가 필수적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정당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승리는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역사 왜곡과 재평가를 구별하는 척도는 결국은 정당성이다.

 

왜 우리는 명신보다 충신을 기억하는가? - 왕을 이끌고 돕고, 때로는 배반한 신하들을 살펴보다

 

현대사 수십 년 동안 폭정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우리는 명신보다 충신에 더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명신이 유능한 인재라면 충신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을 위한 방책을 내놓고 꾸준히 실천한 인물들이 충신, 간신의 이분법 때문에 평가절하되고 있는 사실은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의 역사, 역사의 현실 속에 좀 더 깊이 몸을 담갔던 명신들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그래서 늦었지만 필요하다.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1865년(고종 2년) 9월 10일, 우리가 흔히 조대비라고 부르는 대왕대비가 특명을 내렸다. 정도전에게 특별히 훈봉(勳封-개국공신)을 회복해 주고 시호(諡號)를 내려 주라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목이 날아간 지 무려 467년 만에 드디어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467년간 조선 사회에서 정도전이라는 이름 석 자는 배척의 대상이었다는 뜻이었다.

 

우선 왜 이때 어린 고종을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하던 조대비가 정도전의 훈봉을 회복해주었는지 그 맥락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실은 조대비의 작품이 아니라 조대비를 뒤에서 움직이던 흥선대원군의 결정이었다. 경복궁 복원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던 구상을 갖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복원에 맞춰 경복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던 정도전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경복궁 복원의 의미를 더 높이려 했던 것이다(경복궁은 창업 군주인 이성계가 자기 위엄을 과시하고 종묘사직의 번창을 기원하며 지었으나 이방원이 바로 경복궁 앞에서 난을 일으켜 아버지의 측근인 정도전과 남은을 제거하고 이복동생들까지 죽였다. 이방원에게 경복궁은 흔쾌한 공간일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태종 이후 정궁(正宮) 경복궁은 국왕들의 주된 활동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의례를 위한 공간으로 성격이 바뀐다). 즉 467년 동안 어느 임금도 하지 못했던 정도전의 정치적 복권을 단행함으로써 자신이 경복궁 복원에 얼마나 큰 정치적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내외에 과시하려는 계산이었다. 이처럼 정도전은 뜻밖에도 자신이 전각의 이름을 지었던 경복궁 덕분에 조선 말기에나마 음지를 벗어나 양지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467년 동안 정도전은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우선 그를 죽인 태종이 정도전과 관련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를 살펴보자. 1차 왕자의 난이 끝난 바로 다음날부터 정도전의 이름 앞에는 ‘개국공신’ 대신 ‘간신’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수시로 개국 당시 상황을 언급하며 정도전을 폄하했다(정도전은 한때는 태종 이방원과 학문을 이야기하던 동료이자 아버지 태조를 도와 같이 사선을 넘나들던 혁명동지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태조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추대한 후 7년 동안 막강한 권세를 누리자 이방원과는 최대의 정적이 되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주살했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태종은 조선 건국을 한사코 반대했던 정몽주를 충신으로 높인 반면, 정도전은 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영구히 복권시키지 말 것을 명했던 것이다. 태종은 개국공신에서 정도전을 배제하는 것 외에는 정도전 가족들에 대해 유화적 태도로 일관했다. 태종 때 정해진 정도전에 대한 애매한 조치, 즉 후손들에게는 제약을 주지 않되 정도전 본인의 명예는 철저하게 무시하는 조치는 이후 하나의 국시(國是)처럼 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런 경우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 적당히 복권됐지만 정도전은 1865년, 고종 2년에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겨우 복권됐다. 흥선대원군의 결정은 이런 오랜 역사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드는 하나의 ‘결단’이었다.

 

관가를 알면 조선이 보인다 - 조선 500년을 지탱해온 관가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다

 

조선왕조는 왕에 의해 지배됐지만, 그 왕의 수족으로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움직인 것은 바로 조선의 관리들이다. 조선 관아의 변천사는 곧 조선 역사의 변천사였다. 때문에 조선 조정 내의 다양한 부처들을 살펴보면 왕권과 신권, 신권과 신권 등 권력의 다양한 역학관계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조선의 청와대 비서실, 승정원: 흔히 왕명을 받드는 승정원에서는 6승지가 있었다. 승지는 6조의 참의나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등과 같은 종3품 당상관이었다. 그러나 같은 승지라 하더라도 하는 일에 따라 내부 서열이 있었다.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都承旨)는 6조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높은 이조(吏曹)를 담당했다. 그래서 도승지를 이방승지라 불렀다. 이런 식으로 좌승지는 호방승지, 우승지는 예방승지, 좌부승지는 병방승지, 우부승지는 형방승지, 동부승지는 공방승지라고 일컬었다. 이와 같은 승정원 제도가 완비된 것은 세종 때다.

 

승지들은 국왕이 3정승이나 3사(三司, 홍문관․사헌부․사간원)와 의견 충돌을 빚을 때 국왕에게 필요한 논리를 제공하고 밀사의 역할을 하는 등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대체적으로 임금이 유약하면 승지들의 역할이 커지는 반면 임금이 강건한 성격일 경우 승지들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승지는 지존(至尊)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기 때문에 하기에 따라서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도 있었다. 세조 때의 한명회나 정조 때의 홍국영이 그런 경우다. 수양대군(세조)은 쿠데타를 감행한 직후 측근 권람을 좌부승지, 한명회를 동승부지로 두어 단종을 ‘감시’토록 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한명회는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 등을 거쳐 권력의 핵심으로 단계단계 나아갔다. 훗날 한명회는 정승에까지 오른다. 정조의 최측근 홍국영도 정조의 즉위와 함께 동부승지에 ‘발탁’된다. 한 달 만에 좌승지에 오른 홍국영은 4개월 만에 도승지에 오른다. 승지로서는 말단인 동부승지에서 최고위직인 도승지로 뛰어오른 것이다. 홍국영은 이후 3년 가까이 도승지로 있으면서 전횡을 일삼다가 ‘권력 남용’으로 퇴출되고 만다. 이처럼 같은 종3품이라도 승정원 승지를 거친다는 것은 국왕과의 친분을 쌓으면서 각종 국정 현안을 국왕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훗날 정치력 발휘가 요구되는 의정부 등의 최고위직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각양각색의 조선 사람들에게서 진짜 조선을 찾다

 

어떤 기준이나 척도를 들이대느냐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달라지겠지만, 실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보다 못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분명 생활여건이나 과학 기술, 근대적 가치관 등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우리보다 못했다고 과연 자신할 수 있을까? 역사를 파고들수록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으로 보인다.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조선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호가 훌륭하다고 인생이 훌륭한 건 아니다?: 고려 말 식자들 사이에는 눈길을 끌 만한 유행이 있었다. 호(號)에 숨는다는 뜻의 ‘은(隱)’자를 붙이는 것이었다. 고려 말 명신 이인복(李仁復, 1308~1374년)은 나무꾼(樵)으로 숨어살고 싶다는 뜻을 담아 호를 초은(憔隱)이라고 했다. 목동을 꿈꿨는지 이색(李穡, 1328~1396년)은 호가 목은(牧隱)이었고, 이방원에게 주살당한 정몽주(鄭夢周, 1337~1392년)도 채소밭(圃)에서 살고 싶다 해서 포은(圃隱)을 호로 삼았다. 정도전의 원한을 사 조선 개국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이숭인(李崇仁, 1349~1392년)도 호가 도은(陶隱)인 것을 보면 질그릇이나 만들며 살고 싶었나 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년)는 쇠붙이를 다루는 대장장이의 꿈을 갖고 있었을 테고, 그밖에도 농은(農隱), 야은(野隱), 어은(漁隱) 등이 있었다. 하나같이 글 읽는 선비이자 피 말리는 정쟁에 몸담았던 사람들인데 농어민 같은 민초들을 동경했다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산군 때부터 사화가 이어지면서 조선에도 은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중종 때 조광조가 변을 당한 기묘사화(1519년)가 일어나자 사림들 사이에 은둔 의식이 퍼지면서 ‘집 재(齋)’ 자로 끝나는 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야에 숨어 지내며 재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이나 길러 내고 싶다는 심정의 발로로 보인다. 사림의 거두 이언적(李彦迪, 1491~1553년)은 주자학을 따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시로 호를 회재(晦齋)라고 했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주희의 호가 바로 회암(晦庵)이었다. 이처럼 ‘재’로 끝나는 호를 썼던 사람들은 주로 거기에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담으려 애썼다.

 

‘은’이나 ‘재’로 끝나는 호들은 대부분 신중하게 조심하며 살자는 뜻인데, 호의 의미가 실상과 부합했는지는 사람마다 별개다. 하긴 예나 지금이나 관직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고, 제 때에 나오기는 또 얼마나 더 어려운가? 주역에서도 ‘지지지지(知至至之)’는 ‘지종종지(知終終之)’라 했다. ‘나아갈 때를 알아 거기에 나아가고 마칠 때를 알아 그것을 마쳐라’ 그만큼 진퇴가 어렵기 때문에 주역 첫머리부터 이를 강조했을 게다. 호로써 다짐하는 정도로는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왜 그들은 조선을 거부했는가 - 난세의 민심에서 조선의 치부를 읽다

 

반란이나 역모 발생 여부를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얼마나 광범위한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지를 어느 정도 판가름할 수 있다. 때문에 후반기로 갈수록 민란의 발생 빈도가 높아지는 것은, 특정 정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조선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절망적인 항의의 표시로 볼 수 있다. 조선 역사의 흐름을 볼 때 반란이나 역모의 발생 빈도나 규모를 함께 고려한다면 훨씬 입체적으로 그 시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유언비어사 500년: 조선 500년은 유언비어(流言蜚語) 500년이다. 흉언(凶言), 유언(流言), 난언(亂言), 흉서(凶書), 괘서(掛書), 벽서(壁書)가 시대별로 난무했다. 조정은 이것들을 모두 ‘역심(逆心)’의 발로로 여겨 입수되는 즉시 내용을 보지 않고 불태워 폐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특히 익명서(匿名書)는 무고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여 무조건 폐기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세에는 언로가 넓어 유언이 줄어들지만 난세에는 각종 유언비어와 익명서가 난무하게 마련이다. 즉 유언비어의 과다(寡多)로 치난을 가릴 수 있는 것이다.

 

유언비어나 흉언은 아무래도 쿠데타나 반정으로 집권한 태종, 세조, 중종, 인조 때 많을 수밖에 없었다. 중종의 경우는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등 부정적 유산도 남겼지만, 비교적 선정을 펼치려 노력한 임금의 하나다. 그런 중종도 줄곧 각종 유언비어에 시달려야 했다. ‘누구는 무엇 때문에 감사(관찰사)가 됐고 누구는 어찌해서 수령이 됐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유언비어를 잠재우는 힘은 무엇일까. 중종 6년 5월 3일에는, 3정승이 국가의 현안과 관련해 중종에게 올린 건의 중에 유언비어의 폐단과 그 해법을 제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요즘 시중에는 유언비어를 전파하여 시비(是非)를 현란(眩亂)시키기도 해서 기어이 중상하려 하니, 사람들이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서 각자 자기 몸만 보존하려고 합니다. 이 풍습이 그치지 않으면 … 그 폐해가 앞으로 구제하기 어렵게 될 것이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순박한 데로 돌이키는 전이(轉移)의 기틀이 임금의 한 마음에 있기는 하지만 그 책임이 재상(宰相)에게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순박한 데로 돌이키는 전이의 기틀, 즉 올바른 정치와 정직의 기풍이 유언비어를 막는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것이다.

 

‘데마고그’란 선동가를 말한다. 민주사회에서 늘 경계해야 할 집단이 바로 이 선동가 그룹이다. 그러나 선동은 민주제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군주제나 귀족제 사회에서도 항상 지뢰처럼 숨어 있다가 작은 실수라도 발생하면 터져 나오곤 했다. 그러나 선동 역시 정치가 정상적으로 흘러가면 군주제건 민주제건 발붙일 공간이 없다. 세종 때 이렇다 할 역모나 반란이 사실상 한 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대신 세조처럼 무자비한 쿠데타로 집권할 경우, 백성들에게 선동이 먹혀들 위험성은 그만큼 커진다. 결국 세조 13년에 발발한 이시애의 난은 정권의 뿌리를 흔들 만큼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다. ‘이시애가 한 번 그 난리를 선동하자 온 도(道)가 메아리치듯이 이에 응하였다.’ 선동의 힘은 바로 이 메아리에서 나온다. 메아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선동은 선동이 아닌 것이다. 물론 모든 선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는 정치적 투쟁의 노력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오의 한마디는 결코 선동이 될 수 없다. 진실에 기초한 주장이나 의견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선동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의 여부가 판명되기 때문이다.

 

 어렵게 될 것이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순박한 데로 돌이키는 전이(轉移)의 기틀이 임금의 한 마음에 있기는 하지만 그 책임이 재상(宰相)에게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순박한 데로 돌이키는 전이의 기틀, 즉 올바른 정치와 정직의 기풍이 유언비어를 막는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것이다.

 

‘데마고그’란 선동가를 말한다. 민주사회에서 늘 경계해야 할 집단이 바로 이 선동가 그룹이다. 그러나 선동은 민주제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군주제나 귀족제 사회에서도 항상 지뢰처럼 숨어 있다가 작은 실수라도 발생하면 터져 나오곤 했다. 그러나 선동 역시 정치가 정상적으로 흘러가면 군주제건 민주제건 발붙일 공간이 없다. 세종 때 이렇다 할 역모나 반란이 사실상 한 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대신 세조처럼 무자비한 쿠데타로 집권할 경우, 백성들에게 선동이 먹혀들 위험성은 그만큼 커진다. 결국 세조 13년에 발발한 이시애의 난은 정권의 뿌리를 흔들 만큼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이 컸다. ‘이시애가 한 번 그 난리를 선동하자 온 도(道)가 메아리치듯이 이에 응하였다.’ 선동의 힘은 바로 이 메아리에서 나온다. 메아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선동은 선동이 아닌 것이다. 물론 모든 선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는 정치적 투쟁의 노력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오의 한마디는 결코 선동이 될 수 없다. 진실에 기초한 주장이나 의견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선동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의 여부가 판명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