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의 법궁(法宮), 경복궁(景福宮)
홍순민/한국역사연구회
1. 궁궐(宮闕) : 왕이 사는 집, 국정(國政)의 본산(本山)
궁궐이란 무엇인가? 궁궐이란 “왕이 사는 곳”이다.
왕조 국가 조선에서 국왕은 주권자요 통치자였다. 행정부의 수반, 법의 제정자이자 집행자, 군대의 통수권자, 국가의 원수, 백성들의 어버이, 하늘의 대행자로서 어느 누구도 그 권위 앞에 복종해야 하는 성스러운 존재였다.
왕도 인간이기에 산다는 것은 우선 먹고, 입고, 자고 하는 일상생활을 뜻한다. 그러나 일반인들도 그렇지만 특히 왕은 산다는 것이 그저 일상생활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왕조사회의 주권자요 통치자인 왕이 산다는 것은 공적인 활동, 곧 통치행위를 한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렇게 궁궐은 왕의 사적인 일상생활과 공적인 통치행위를 하는 공간이라는 양 측면이 있는데,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그 가운데서도 통치행위를 하는 공간이라는 점이 더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은 궁궐을 벗어나는 일이 매우 드물고, 왕이 직접 수행하는 모든 일이 거의 궁궐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궁궐은 국정(國政)의 본산(本山)이요, 최고의 관부(官府)이다. 조선 후기의 정조 역시 “궁궐은 임금이 거주하면서 다스리는 곳이다. 사방의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신민이 둘러 마음을 향하는 곳”이라 말하였다. 2. 법궁(法宮)―이궁(離宮) 양궐체제(兩闕體制)의 변천(變遷)
서울에는 궁궐이 모두 합하여 다섯이 있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 그것이다. 서울에는 궁궐이 왜 다섯이나 되는가? 그렇게 된 배경에는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깔려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왕이 궁궐 하나만으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
화재, 전염병, 병란, 혹은 요변(妖變)이나 정치적 파란이 발생하여 더 이상 어느 한 궁궐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이를 떠나 머물 또 다른 궁궐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에서는 대체로 두 개의 궁궐을 유지 경영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법궁(法宮)은 경복궁이요, 둘이면서도 하나로 연결되어 사용되었던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離宮)으로 쓰였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서울과 궁궐들을 모두 파괴함으로써 첫 번째 양궐체제는 무너졌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은 경복궁은 버려 두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는 한편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仁慶宮)과 경덕궁(慶德宮)을 새로 지었다.
<그림 1> 겸재 정선이 그린 폐허가 된 경복궁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는 인경궁은 헐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는 데 쓰고 경덕궁은 계속 궁궐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합하여 동궐(東闕)이라 불리면서 법궁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영조대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뀐 경덕궁은 서궐(西闕)로 불리면서 이궁이 되었다. 3. 경복궁(景福宮) 중건(重建)과 파괴(破壞)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 생부(生父)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는 방편으로서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경복궁은 고종 5년(1868)에 중건 공역이 일단락되어 7월 2일 고종이 임어하였다.
그렇지만 이 때 영건된 건물이 그 이후 변함없이 유지된 것은 아니다. 앞 절에서 서술한대로 그 이후에도 일부 건물이 추가로 조영되었고, 또 화재로 인해 없어지고 다시 중건되는 등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었다.
그 첫번째 대화재(大火災)는 앞서 언급한 고종 10년(1873) 12월 10일에 일어난 것이다. 이 때의 화재로 자경전(慈慶殿)을 비롯해서 내전 일곽의 건물들이 다수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을 중수하는 일은 그리 급하지 않게 진행되어, 고종 12년(1875) 5월 28일에 가서야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고종 13년(1876) 11월 4일에 또 다시 교태전(交泰殿)에 불이나 인지당(麟趾堂), 건순각(建順閣), 자미당(紫薇堂), 덕선당(德善堂), 자경전(慈慶殿), 협경당(協慶堂), 복안당(福安堂), 순희당(純熙堂),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흠경각(欽敬閣), 사정전(思政殿), 강령전(康寧殿) 등 내전(內殿) 일원이 거의 다 소실되었다. 이 때 피해를 본 건물의 규모는 836간에 달하였다. 이 화재로 인한 피해는 건물 뿐만 아니라 내전에 보관되어 있던 인장과 서적 등도 포함되었다.
왕의 대보(大寶)와 동궁(東宮)의 옥인(玉印)은 간신히 구해 냈으나, 왕명(王命)을 내리는 문서에 찍는 계자인(啓字印)을 비롯해 동궁의 달자인(達字印), 그리고 역대 왕들이 어필(御筆)과 서적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 화재로 고종과 왕실은 계절이 겨울이라 바로 이어할 수가 없어서 우선 경복궁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3월 10일 창덕궁으로 다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자주 이어하다가,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겪고 이듬해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公使館)으로 “이필주어(移蹕駐御)”, 이른바 파천(播遷)을 하면서 경복궁은 더 이상 왕이 임어하지 않는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 34년(1897)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환궁(還宮)할 때, 돌아온 궁궐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닌 러시아 공사관에 인접한 경운궁(慶運宮)이었다. 경운궁은 광해군대 이후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환궁하기 위해서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운궁을 중수(重修)할 때 소요 자재를 경복궁의 일부 전각을 헐어다 썼다. 이 때부터 경복궁은 제 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융희(隆熙) 연간에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경복궁은 더욱 수난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15년에 일제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紀念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경복궁의 건물들은 근정전, 사정전, 강령전, 교태전, 경회루와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등 주요 건물들 몇 채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헐려 없어졌다.
<그림 2> 현재 경복궁 경회루 모습
그 자리에는 물산공진회를 위한 대규모의 전시관들과 관련 건물들, 그리고 돈사(豚舍), 우사(牛舍), 계사(鷄舍) 등이 들어섬으로써 경복궁은 본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었다.
일제는 물산공진회가 끝난 다음에는 곧바로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1916년 6월에 시작하여 1926년 10월에 끝났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중인 1917년 11월 10일 당시 순종(純宗)이 머물고 있던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 일대에 큰 불이 났다. 이 불로 없어진 전각들을 다시 지으면서 경복궁의 강령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및 그 일대 부속 건물의 구재(舊材)를 이건(移建)하기로 결정함으로써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까지 남아 있던 강령전과 교태전마저 없어졌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거의 완공할 무렵인 1926년 7월 22일부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해체하기 시작하여 그해 11월 20일 광화문 해체를 완료하여 경복궁 궁성의 동쪽으로 옮겼다. 이렇게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앞에 대규모의 석조 건물이 들어섬으로써 경복궁은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경복궁은 내부의 전각들이 거의 없어진 빈 궁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면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잊혀진 궁궐이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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