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숭조의 바른 이해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의 당위성(當爲性)

hellofine 2010. 5. 18. 11:58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의 당위성(當爲性)

 

≪ 李 鴻 儀 ≫

 

근래 역사적(歷史的)인 사실도 모르는 일부 몰지각(沒知覺)한 사람들이 태조고황제께서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으면 요동 땅을 장악한 옛 고구려와 같은 거대(巨大)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등 허무맹랑(虛無孟浪)한 말들을 하는데 당시의 실정을 여러 역사서(歷史書)에서 찾아 그 회군(回軍)의 당위성(當爲性)을 논(論)하고자 한다.

 

1. 명(明)과 원(元)의 실정(實情)

 

원(元)나라의 세력은 순제(順帝) 말년에 이르러 나날이 약해져 가는데 반하여 남방(南方)에서 일어난 주원장(朱元璋)은 금능(金能, 뒷날 南京)을 근거지로 양자강(楊子江) 남북을 점차로 평정하여 오왕(吳王)이라 칭하며 국가의 체제를 갖추더니(공민왕 13, 至正 24), 마침내 중국 남쪽 전체를 석권하자 금능(金陵)에서 황제(皇帝)라 칭하고 국호(國號)를 명(明)이라 하고 연호를 홍무(洪武)하 하였다(공민왕 17, 1368). 이가 곧 명(明)나라 태조(太祖)이며 그 해 4월에 수륙(水陸)으로 대군을 보내어 원(元)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을 점령하고 다시 추격을 하니 순제(順帝)는 응창(應昌)으로 도망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공민왕 19, 1370).

태자가 뒤를 이으니 이가 곧 북원(北元: 몽고로 되돌아간 元)의 소종(昭宗)이다. 응창도 명군에게 함락되니 소종(昭宗)은 다시 화림(和林: 몽고 초기의 도읍지)으로 피하여 겨우 여맥을 보존하게 되었다.

 

2. 동녕부 정벌 (東寧府 征伐)

 

공민왕 초년에 원(元)나라의 세력이 만주에서 쇠퇴하자 압록강 이서(以西)의 팔참정벌(八站征伐)이 있었고 원(元)의 세력이 몽고(蒙古)로 물러가자 동녕부정벌(東寧府征伐)이라는 북벌(北伐)까지 하게 된 것이다. 동녕부정벌은 기철(奇轍)의 아들인 기새인테므르(奇塞因帖木兒)가 그의 아버지(高麗本國에서 주살됨)의 원수를 갚고자 요(遼:遼陽), 심(瀋:瀋陽)의 지방관(地方官)인 김백안(金伯顔: 平章事)등과 동녕부에 응거하고 있었다. 이에 공민왕은 그 18년(1369)동서북면의 요새(要塞)에 만호(萬戶) 천호(千戶)를 배치하고, 동년 12월에 이성계(太祖高皇帝)를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로,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원수겸평양윤(西北面元帥兼平壤尹)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로, 양백연(楊伯淵)을 부원수(副元帥)로 하여 장차 동녕부를 쳐 북원(北元)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려 하였다.

 

다음해 19년(1370) 정월에 이성계(太祖高皇帝)는 기병(騎兵) 5천, 보병 일만을 거느리고 황초령(黃草嶺)과 설한령(雪寒嶺)을 넘어 압록강을 건넜다. 그 때에 동녕부동지(東寧府同知) 이오르테므르(李吾魯帖木兒:李原景)는 올라산성(兀刺山城)을 지키고 있으며, 험지(險地)에 응거하여 항거하려 하다가 이성계(太祖高皇帝)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무기를 버리고 300여호를 이끌고 항복하였으며, 그의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위하(麾下)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지키다가 마침내 처자를 버리고 밤을 타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이성계(太祖高皇帝)는 올라산성(兀刺山城)을 평정하고 원(元)의 추밀원부사 배주(拜住:고려에서 賜姓名 韓復)와 양백연(楊伯淵)등이 동녕부 두목 50여인을 이끌고 항복하도록 만들었다.

 

동년(1370) 8월에는 이인임(李仁任)을 도통사로 하여 안주(安州)에 주둔케 하고 지용수(池龍壽), 이성계(高皇帝), 임견미(林堅味)등은 의주(義州)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너 요성(遙城)을 진격하였다. 요장(遙將) 처명(處明)이 항전하다가 마침내 항복하니 기새인테므르(奇塞因帖木兒)는 도망가고, 그의 일당인 김백안(金伯顔)을 사로 잡았다(11월). 그러나 고려(高麗)의 출정군은 일단 개선하였는데 그때에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를 시켜 요(遙), 심(瀋)인에게 알리기를 ⌜요양(遙陽)은 본래 우리나라 국계(國界)이다. 대군이 또 출정하게 되면 선량한 인민에게 해가 미칠까하니 강을 건너 우리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양식과 종자를 주어 각각 편안히 업에 종사케 하리라⌟ 이렇게 하여 만주 지방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압록강 이남으로 불러드려 살게 하였다.

이때야 말로 요양(遙陽) 땅 전체를 우리 국토로 만들 천재일우의 기회였는데 고려 국내 사정이 그렇지 못하였다(1370).

 

3. 고려 국내 실정(實情)

 

고려 공민왕(高麗 恭愍王)은 총명하고 품성이 인후하여 초년에는 정치에 몰두하여 많은 치적(治績)을 나타내었으나, 왕후 노국공주(魯國公主)가 훙거(薨去)한 뒤에 비통함이 도를 지나 심지(心志)를 상실하여 실정을 거듭하기에 이르렀고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신임하여 모든 정사(政事)를 신돈에게 일임하다시피 하게 되니, 신돈은 자기의 정적(政敵)을 모조리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왕은 자제위(子弟衛)을 설치하여 미소년(美少年)을 머무르게 하여 풍기(風氣)가 문란해지고 특히 홍륜(洪倫)이란 소년은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까지 하게 되는 불상사가 있자 왕은 홍륜과 이를 밀고한 최만생(崔萬生)을 죽이려다가 오히려 그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1374년9월).

 

4. 철영위(鐵領衛) 설치 통고

 

고려의 동녕부 정벌후 20년 가까운 사이에 명(明)은 중국 전토를 거의 석권하고 만주지방의 호족인 나하추(納哈出)도 명나라에 항복하였으니(1387) 스스로의 병력으로 요동을 완전히 움켜지고 있었다. 이때에 몽고 내륙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원(元)을 칠려고 하는데 고려(高麗)에서는 그때가지도 비밀리에 원(元)에 사신을 보내고 있는 처지였다. 이 점을 알고있는 명(明)은 후환(後患)을 없애기 위하여 철영위 설치(鐵領衛 設置)를 통고 하였던 것이다(1388).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려(高麗)에서 이중국교(二重國交)를 하지 않았으면 철령위 문제도 없었을 것으로 사료됨⌟

 

고려 조정에서는 이 문제로 오도(五道)에 명을 내려 성을 수축케하고 여러 장군들을 북방의 변경에 보내어 대비케 한 다음 박의중(朴宜中)을 명(明 )에 보내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 고원(高原), 영흥(永興), 정평(定平), 함흥(咸興), 공험진(公險鎭)까지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고 철영위 설치를 중지해 달라고 교섭하는 한편 최영(崔瑩)은 중신회의를 열고 졍료위(定遼衛-遙陽)를 정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모든 중신들이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화의(和議)를 하자고 하였으나 최영(崔瑩)은 왕돠 비밀리 회의를 하여 요동(遙東)을 정벌키로 하였다. 최영은 요동 정벌의 비타당성을 위국충정(爲國忠情)에서 직언한 이자송(李子松)을 사형에 처하고 누구도 반대를 못하게 하였다. 이 때에 이성계(太祖高皇帝)는 용벙상(用兵上) 4가지 합당치 못한 조건(四不可論)을 말씀 드렸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5. 왜구(倭寇)의 침구(侵寇) 상황

 

위화도 회군의 10년 전부터의 왜구(倭寇)의 침구(侵寇) 상황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으나, 대충 큰 사건만 하여도 다음과 같다.

 

禑王 5(1379) 5월 진주(晉州) 풍천(豊川)에서 왜구가 관아 및 민가를 불 살음.

禑王 6(1380) 8월 왜선 500척 진포(鎭浦)에 침입, 선주(善州) 상주(尙州)를 불태움.

                    9월 태조고황제 운봉(雲峰)에서 왜구대파(荒山大捷)

                  10월 왜구 김해부(金海府)를 불 살으다.

禑王 7(1381) 2월 왜구 영해부(寧海府)를 불 살으다. 나세(羅世)를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 황상(黃裳)을

                         서강도원수(西江都元帥)로 하고 연해 요충지 15곳에 원수(元帥)를 배치하다.

                    3월 울진, 삼척, 평해, 영해, 영덕등지에 침구 삼척현을 불 살으다.

                    5월 영해부에 침구, 안동병마사 정남진(鄭南晉) 왜구와 싸워 16급 참하다.

                    6월 왜선 김해부(金海府)에 칩입한 것을 원수 남질(南秩)이 격퇴시킴.

                    7월 왜구 경남 고성에 침구, 남질이 적과 싸워 참 8급 참하다.

                  11월 보령현(保寧縣) 밀성군(密城郡)에 칩입한 것을 지병사 이흥부 참3급 참하다.

禑王 8(1382) 3월 왜구 삼척, 울진, 우계, 영월, 예안, 영주, 순흥 등지에 침입, 강원도 상원수 조인벽 부원수 

                         권현룔 왜적과 싸워 30급을 참하다.

                    5월 영춘현 회양부(淮陽府)등에 침입, 변안열 한방언 등이 참 30급 말60필 뺏음.

                    6월 왜구, 경산 대구 계림 등지에 침구

                  10월 왜구, 남원에 침구, 경상도 조전원수 심우로(沈于老) 참외 3급 참하다.

                  10월 왜선 50척 진포에 침구, 해도원수 정지(鄭地)가 싸워 군산도 까지 쫓아서 4척을 불 살으다.

禑王 9(1383) 5월 해도원수 정지 왜구를 대파, 적선 17선을 불 살으고, 적의 죽은시체가 바다를 덮다. 병마사 

                          윤송중(尹松中) 전사.

                    6월 왜구, 경상도 길안, 안강, 기계, 영주, 의홍, 의성, 선주 등지에 침입.

                          충청도 단양, 제천, 주천, 평창, 영주, 순흥 등지에 침입.

                    7월 대구,경산,선주,인동,지례,금산 등지에 침입, 우하(禹夏) 모든 병마사를 독려하여 왜구와

                          싸워 참 8급, 순흥에서 참 6급, 교주 강능도 도체찰사 최공철(崔公哲) 방추역에서 왜구와

                          만나 참 8급, 말 50필뺏음. 왜적 1300 여인 춘양, 영월, 정선 등지에 침입.

                    8월 적의 수는 많고, 우리군사는 적어 매번 싸움에 아군이 불리하여 부원수 윤가관(尹可觀)은

                          안동, 예안에서 적과 싸워 패배.

                          왜적 200여기 괴산, 정영 등지에 침구, 옥천, 보령을 적에게 함락당함.

                          공주목사 최유경(崔有慶) 판관 송자호(宋子浩)등이 적과 싸워 전사. 문달한(文達漢), 김사

                          혁(金思革), 박수년(朴壽年) 등 공주 반룡사에서 참8급, 김사혁이 목천까지 추격하여 참 

                          20급 참하다.

                    9월 회양부(淮陽府) 참락됨. 교주도 안염사(安廉使), 정부도(鄭符道) 왜적에게 패하여 장비 및

                          인장 모두 탈취 당함.

                  11월 청풍군에 침입한 왜구, 도순찰사 한방언(韓邦彦) 금곡촌에서 참8급 참하다.

禑王10(1384)2월 진포, 7월 구례 함락 당함. 8월 양산, 10월, 11월 청하현, 함양군 침구.

禑王11(1385)3월 영강현, 4월 교주도 양주, 7월 단주, 옹진, 기린도 평해부 등지에 침구.

                    9월 왜선 150척 함주, 흥원, 북청, 합란등처에 침구, 여러 장수들이 패하였으나 태조고황제께서

                         물리침.

禑王13(1387)1월 4월, 8월 왜구 강화에 침구, 10월 임주,한주, 홍산현 침구, 도순문사 왕승보(王承寶) 적에게

                         패함. 11월 광주, 12월 정읍현에 침구.

禑王14(1388)5월 위화도 회군

                         왜구의 침해는 고려 말 40년 동안에 걸쳐 연안지방은 물론이요 내륙지방에까지 파상적으로

                         미치게 되어 인적(人的),물적(物的)피해와 이에 대한 방어 및 격퇴의 군사행동으로 고려의

                         국력은 크게 소모 되었다.

昌王 1(1389)2월 대마도 정벌을 단행, 경상도원수 박위(朴萎)는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진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살으고 여사(慮舍)를 거의 다 태워 버렸으며, 뒤이어 원수(元帥) 김종연

                        (金宗衍),최칠석(崔七夕),박자안(朴子安)등이 처나와 피로민(被盧民) 100여명을 찾아내는

                         등 자못 큰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왜구의 세력은 한풀 꺾인듯 간혈적으로 출몰

                         하는 정도였다.

 

6. 태조고황제의 공료(攻遼) 4불가론(四不可論)

 

1) 적은 나라로 큰 나라를 역(逆)하는 것이 옳지 않다.

   조그만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호하는 방법이며, 대국을 침범한다는 것은 종묘나 사직을

   위해서나 백성을 위하여 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농사철에 군사를 동원하게 되면, 농사가 주업인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식량이 부족할 뿐 아니

    라 군량 보급이 어렵게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3)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앞에서 논한 회군 10년 전부터의 왜구 침범 사항과 같이 계속되는 침구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상태에서

   총병력을 요동으로 집결시키면 그 틈을 타서 남쪽 전체를 침범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

   할 것이다.

 

4)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여름철에는 활줄이 풀리고 병사나 말들이 다 같이 함께 지쳐있다. 또한 큰 강과 장마로 군량의 보급이 어렵

   게 되면 진퇴가 곤란하게 된다.

 

위의 4불가론(四不可論)이야말고 지극히 타당성이 있는 정론임에도 친원파(親元派) 최영(崔瑩)과 왕은 받아드리지 않고 더욱 진군만 독촉하였다. 태조고황제께서는 다시 상소하기를⌜꼭 대계(大計)를 이룩하려 할진대 대가(大駕)를 서경(西京)에 머물려 가을을 기다려 출사(出師)토록 하소서. 화곡(禾穀)이 들에 덥혀 대군(大軍)의 식량이 족하게 되면 그 때 북치며 진군하사이다. 지금은 출사(出師)할 때가 아니니 요동의 한 성(城)을 빼앗는다 해도 우수(雨水)가 바햐흐로 내려 군(軍)은 전진할 수가 없을 것이며, 싸움이 오래 끌리고 식량이 결핍할 것이니, 이는 다만 화를 재촉할 뿐이외다⌟ 고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아니 하였다.

 

이상과 같은 상황임에도 신흥대국 명(明)과 교전을 하였다면, 명군(明軍)의 말발굽에 전국은 짓밟히게 되고, 남쪽은 왜구로 인하여 패해가 되고 말았을 이 자명(自明)한 사실을 얼빠진 망상자(妄想者)들이 헛된 입을 놀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참고서적 : 金庠基 著 高麗時代史, 李弘植 博士編, 國史大事典 王朝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