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숭조의 바른 이해

환조대왕의 작명(作名)의 의미

hellofine 2010. 5. 8. 22:04

 

桓祖大王의 아드님 作名의 意味

 

 

 환조대왕(桓祖大王)이 16세에 맞이한 첫째 부인이셨던 한산이씨(韓山李氏)는 불행히도 장남인 완풍대군(完豊大君, 1330년 출생)이 4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시고, 이듬해 다시 영흥최씨(永興崔氏)를 맞아들여 2남 성계(成桂, 충숙왕 4년 1335년 출생, 훗날의 太祖)와 정화공주(貞和公主)를 낳으셨으며, 후일 다시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를 맞아들여 3남 화(和, 충목왕 4년 1348년 출생, 훗날의 義安大君)을 낳으셨다.       ⟪太祖實錄 總書

 

환조대왕(桓祖大王)은 유서 깊은 가문(家門)의 가업(家業)을 이어 갈 것을 세 아드님의 이름 글자를 통해 그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이름에 원(元)자를 넣어 원계(元桂)라 하여 장자(長子)임을, 태조(太祖)의 이름에는 성(成)자를 넣어 성계(成桂)라고 하여 차자(次子)임을, 의안대군(義安大君)의 이름에는 화(和)자를 사용하여 삼자(三子)임을 명시하였다.

 

원(元)과 성(成) 그리고 화(和)는 천도(天道)의 사상(四象) 원리를 표상하는 개념인 원형이전(元亨利貞)과 관련된 말이다. 원(元)은 시생(始生), 시원(始原), 근거(根據)를 뜻하는 개념으로 그것이 으뜸 장자 근원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성(成)은 완성 및 종성(終成)의 의미로 시생(始生)과 함께 사용하여 시종(始終)의 생성(生成)을 뜻한다. 그리고 화(和)는 의(義)와 관련된 개념으로 의(義)가 리(利)로 나타난다.

 

⟪周易 乾卦⟫ 문언(文言)에서는 말한다.

원(元)은 선(善)의 어른이요,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요, 이(利)는 마땅함의 어울림(和)이며, 정(貞)은 일의 줄기이니, 군자(君子)가 어짐을 몸에 지님이 넉넉히 사람의 어른일 수 있으며 모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넉넉히 예(禮)에 합함이며 만물을 이롭게 함이 의리(義理)에 마땅히 응함이며, 바르고 굳셈이 족히 일을 주장함이니 군자는 이와 같은 네 가지 덕(德)을 행(行)하는 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건(乾)은 선(善)하고 형통(亨通)하고 이롭고(利) 바르다(元亨利貞)고 하였다.

 

文言曰 元者는 善之長也ㅣ오, 亨者는 嘉之會也ㅣ오 利者는 義之和也ㅣ오 貞者는 事之幹也ㅣ니 君子ㅣ 體仁이 足以長人이며 嘉會ㅣ 足以合禮며 利物이 足以和義ㅣ며 貞固이 足以幹事1니 君子ㅣ 行此四德者ㅣ라. 故로 曰乾元亨利貞이라.  ⟪周易 乾卦⟫

 

이를 계절(季節)에 견주면 원(元)은 봄이고, 형(亨)은 여름이며, 이(利)는 가을, 정(貞)은 겨울이다. 다시 사람의 도리(道理)로 견주면 원(元)은 모든 선(善)의 머리가 되는 어짊(仁)이요, 형(亨)은 하늘의 아름다운 도리로 행하는 예(禮)가 되며, 이(利)는 하늘의 마땅함이 모든 만물에 성취되는 의로움(義)이고, 정(貞)은 하늘의 덕을 쫓아 모든 일을 주장하는 지혜로움(智)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하늘의 어진 덕(德)을 몸에 지녀야 사람들의 어른일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할 수 있어야 예(禮)에 합할 수 있으며 만물을 이롭게(利) 할 수 있어야 족히 (하늘 이치의) 마땅함(義)에 응함이며, (하늘 이치의) 바름을 굳게 지켜야 일을 주장할 수 있으니 군자는 이 네 가지 덕(德)을 실천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건괘(乾卦)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완풍대군(完豊大君)과 태조의 이름을 시생(始生)과 종성(終成)의 관계로 설정하여 역사의 전환점을 넘어서 새로운 역사를 여는 종시(終始) 계대(繼代)의 사업을 할 것을 소망하였고, 삼자(三子)인 의안대군(義安大君)의 이름을 화(和)로 정하여 의(義)가 행하여지는 왕도 정치가 구현되기를 소망하였다. 3형제에게 부여한 이름자를 통하여서도 환조대왕(桓祖大王)께서 선진(先秦) 유학(儒學)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세 아드님들이 선진 유학에 근거하여 살아가기를 바랐음을 알 수 있는 바이다.

 

또한 세 아들을 키우며 항상 천도(天道)에 따라 인사(人事)에 응하라(順天應人) 고 하여, 오직 올바른 정치를 통해서만 세상을 구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음(濟世安民)을 가르쳤다. 천지(天地)는 생명을 낳아 기르고자 하는 어진 덕(好生之德)을 본성(本性)으로 하기 때문에 천도에 순응하여 인사에 응하는 것은 결국 어진 정치를 펼쳐서 백성들이 함포고복(含哺鼓腹)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원리인 의(義)의 실천은 물론, 형제간에 우애(友愛)를 지극히 돈독하게 하라고 하여 예(禮)의 실천을 특히 강조하였다.

 

환조대왕(桓祖大王)이 원(元)나라 신인(神人)으로부터 얻었다는 세 형제에 대한 논평이다. 신인(神人)은 완풍(完豊)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빼어난 자태를 낳아 어진 풍모가 세상을 덮고 밝은 지혜가 끝이 없다. 뜻은 선인의 발자취를 좇아서 드러내는데 있으므로 용성(龍星)을 경계할 만하다. 형(荊)도 아니고 만(蠻)도 아니니 태백은 어디로 갔는가, 후일 국정이 바로 잡아지면 응당 오래도록 쌓은 덕망이 빛나리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조(太祖)에게 말하기를 “화계(華蓋)가 동쪽에 이르니 자리와 녹[位祿]을 겸비하였다. 하늘에 응하고 사람이 따르니 자손이 창성(昌盛)할 것이다. 그러나 세 가지 어려움을 경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의안(義安)에 대하여 말하기를 “녹(祿)과 말(馬)로 몸을 부지하고 지혜와 꾀가 빼어나니 충성을 다하여 돕고 인도하여 처음과 끝을 한마음으로 한다. 두 마리의 말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태조(太祖)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의안대군(義安大君)은 태조를 도와서 새로운 왕조의 개창(開創)에 참여할 것이나 완풍(完豊)은 두 형제와 달리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의 세 아드님들은 소시(少時)부터 유달리 우애가 깊어 성년(成年)이 되어서도 항상 같은 곳에 거처(居處)하며 고락(苦樂)을 같이 하였다. 또한 모두가 영특하고 무예(武藝)에 출중하여 공민왕 5년(1356) 쌍성(雙城) 탈환에는 아버님(桓祖大王)을 도와 공을 세웠고, 이후 고려 조정에 출사(出仕)하여 그 무렵 우리 강토를 쉴 새 없이 침범해 노략질을 하였던 왜구(倭寇)와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명성을 떨쳤다.

 

완풍대군(完豊大君)은 1388년(고려 우왕 14) 고려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하여 우군도통사인 태조고황제의 회군에 처음에는 고려의 충신으로서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회군에 협조하게 되었다. 1393년 개국 후(태조 2) 회군2등공신에 봉해졌다.

 

위화도(威化島) 회군 이 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옹립의 기운이 높아지자 공은 대대로 은혜를 입어 온 고려왕조(高麗王朝)를 모반(謀叛)할 수도 없고, 한편 형제로서의 효우(孝友)를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고려 충신이었던 완풍대군(完豊大君)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지켜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太祖高皇帝)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여라.” 유언하고,  필명시(畢命詩)를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음독 자결(自決)하였다.

 

이 시의 전구(轉句)와 결구(結句)를 보면, 죽음의 진퇴양난(進退兩難) 어려움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취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 아니라 천명(天命)의 봉행(奉行)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공은 자정(自靖)을 통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왕조의 건국에 반대하는 세력에게 천명(天命)이 도래하였음을 일깨움으로서, 당신에게 주어진 계대(繼代)의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새로운 이념의 이상 국가 구축을 위한 참여에 아무런 장애가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완풍(完豊)의 자진(自盡)은 겉으로 보면 물리적 생명을 끊은 절명(絶命)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필명(畢命)이었다. 곧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유감없이 봉행한 정명(正位凝命)이었던 것이다.

 

의안대군(義安大君)은 1392년(太祖 1)에 순충좌명개국(純忠佐命開國) 1등공신 녹권(錄券)을 사급(賜給)받고 의안백(義安伯)으로 봉작되었다. 이 녹권은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1986년10월13일 국보 제232호로 지정되었다. 1393년(太祖 2) 회군1등공신에 서열되었으며, 1398년(태조 7) 의안공(義安公)으로 진봉(進封)되었고, 판문하부사 겸 영의흥삼군부사(判門下府事兼領議興三軍府事)에 제수(除授)되었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정사(定社)1등공신의 첫머리에 서열(序列)되고, 1400년(정종 2)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훈으로 좌명(佐命)공신에 서열 되었다. 대군은 전후 4차에 걸쳐 공신에 피봉되었고, 도합 570결(結)의 공신권(功臣券)을 받아 조선 초기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1401년(태종 1)에는 조선 개국 후 최초로 의안공(義安公)은 의안대군(義安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고, 1407년(태종 7) 7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408년(태종 8)에 돌아가니 향년 61세였으며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승하한 지 다섯달 뒤였다. 1410년(태종 10) 7월 종묘 태조고황제 묘정에 같이 배향(配享)되었다.

 

이로서 환조대왕(桓祖大王)께서 세 아드님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강조한 맹자(孟子)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인(聖人)은 한사람의 무고(無辜)한 생명을 해쳐서 천하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銘心)하고 또 명심하라는 가르침에 그대로 따름으로서 왕도 정치의 원리인 의(義)의 실천은 물론, 형제간에 우애(友愛)를 지극히 돈독하게 하여 예(禮)의 실천을 남겨 후손(後孫)에게 감명(感銘)을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