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문]
옛날에는 나라가 망하면 종묘사직이 없어질 뿐이었는데, 오늘날은 나라가 망하면 인종까지 함께 없어진다. 옛날에 나라가 멸망한 것은 전쟁 때문이었는데, 오늘날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계약 때문이다. 전쟁 때문에 망할 경우에는 승패를 겨루어 볼 수라도 있지만, 계약 때문에 망할 경우에는 스스로 멸망하는 길로 달려가게 된다. 아, 지난 10월 21일(양력 11월 17일)의 변고는 전 세계 고금에 없었던 일이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지만 스스로 외교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는 나라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국토와 국민이 있지만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어진 것이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으니 우리 삼천리 인민은 모두 노예이고 신첩(臣妾)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되었다면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다. 더구나 저들이 우리에게 교활한 속임수를 쓰는 것을 보면 우리 인종을 이 나라에 남겨두지 않으려는 속셈이 매우 분명하다. 남의 노예와 신첩이 되었는데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우리는 당당한 대한의 예의를 지키는 자주 백성인데 구구하게 원수 치하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루라도 더 살고자 구걸한다면 죽는 것보다 나을 게 있겠는가? 음지의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지 못하고 발에 밟히는 풀은 싹이 자라지 못하며 노예의 종족에서는 성현이 나지 못한다. 이것은 성질이 달라서가 아니라 압박과 굴복을 당하는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원문]
古之亡國也, 只宗社滅而已; 今之亡國也, 並人種而滅. 古之滅國也, 以兵革; 今之滅國也, 以契約. 以兵革, 則猶有勝敗之數; 以契約, 則自趍覆亡之塗. 嗚呼! 去十月二十一日之變, 是或全世界今古曾有之事乎? 我有隣國而不能自交, 使他人代交, 則是無國也; 我有土地人民, 而不能自主, 使他人代監, 則是無君也. 無國無君, 則凡我三千里人民, 皆奴隷耳, 臣妾耳. 夫爲人奴隷爲人臣妾, 而生已不如死矣. 况以彼狐欺狙詐之術之施於我者而觀之, 其不肯遺我人種於此邦之域者, 不啻較然矣. 然則雖欲求爲奴隷爲臣妾而生, 寧可得哉? ……況以我堂堂大韓禮義自主之民, 區區屈首於讐賊之下, 而欲丐一日之生, 豈有愈於死者乎? 下蔭之木, 枝葉不茂; 餘踐之草, 萌蘖不長; 奴隷之種, 聖贒不生. 此非其性質有異也, 其壓迫伏制之勢, 使之然也.
-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팔도의 사민에게 널리 고함[布告八道士民]」, 『면암집(勉菴集)』 제16권 「잡저(雜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