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면암(勉菴)의 고언(苦言)은 아직도 유효하다

hellofine 2015. 7. 29. 03:07

 

면암(勉菴)의 고언(苦言)은 아직도 유효하다

[번역문]

  옛날에는 나라가 망하면 종묘사직이 없어질 뿐이었는데, 오늘날은 나라가 망하면 인종까지 함께 없어진다. 옛날에 나라가 멸망한 것은 전쟁 때문이었는데, 오늘날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계약 때문이다. 전쟁 때문에 망할 경우에는 승패를 겨루어 볼 수라도 있지만, 계약 때문에 망할 경우에는 스스로 멸망하는 길로 달려가게 된다.
  아, 지난 10월 21일(양력 11월 17일)의 변고는 전 세계 고금에 없었던 일이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지만 스스로 외교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는 나라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국토와 국민이 있지만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어진 것이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으니 우리 삼천리 인민은 모두 노예이고 신첩(臣妾)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되었다면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다. 더구나 저들이 우리에게 교활한 속임수를 쓰는 것을 보면 우리 인종을 이 나라에 남겨두지 않으려는 속셈이 매우 분명하다. 남의 노예와 신첩이 되었는데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우리는 당당한 대한의 예의를 지키는 자주 백성인데 구구하게 원수 치하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루라도 더 살고자 구걸한다면 죽는 것보다 나을 게 있겠는가? 음지의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지 못하고 발에 밟히는 풀은 싹이 자라지 못하며 노예의 종족에서는 성현이 나지 못한다. 이것은 성질이 달라서가 아니라 압박과 굴복을 당하는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원문]

古之亡國也, 只宗社滅而已; 今之亡國也, 並人種而滅. 古之滅國也, 以兵革; 今之滅國也, 以契約. 以兵革, 則猶有勝敗之數; 以契約, 則自趍覆亡之塗. 嗚呼! 去十月二十一日之變, 是或全世界今古曾有之事乎? 我有隣國而不能自交, 使他人代交, 則是無國也; 我有土地人民, 而不能自主, 使他人代監, 則是無君也. 無國無君, 則凡我三千里人民, 皆奴隷耳, 臣妾耳. 夫爲人奴隷爲人臣妾, 而生已不如死矣. 况以彼狐欺狙詐之術之施於我者而觀之, 其不肯遺我人種於此邦之域者, 不啻較然矣. 然則雖欲求爲奴隷爲臣妾而生, 寧可得哉? 
……況以我堂堂大韓禮義自主之民, 區區屈首於讐賊之下, 而欲丐一日之生, 豈有愈於死者乎? 下蔭之木, 枝葉不茂; 餘踐之草, 萌蘖不長; 奴隷之種, 聖贒不生. 此非其性質有異也, 其壓迫伏制之勢, 使之然也.

 
-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팔도의 사민에게 널리 고함[布告八道士民]」, 『면암집(勉菴集)』 제16권 「잡저(雜著)」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74세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익현이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의병 활동에 나서기 직전에 쓴 포고문의 서두이다. 그는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까지 지낸 조선 말기의 학자이고 문신이다. 그러나 격변하는 시대는 그를 책상에서 벗어나 직접 무기를 들고 투쟁의 최전선에 선 의병장으로 만들었다.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병자수호조약을 맺는다. 부산 인천 원산 개항, 조선에서 일본인의 치외법권 인정, 일본의 한반도 연안 측량 허용, 일본 화폐 통용과 무관세 인정 등을 골자로 하는 이 조약은 그럴싸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한반도 침략을 허용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때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와서 이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黑田淸隆)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에도 그는 적신(賊臣) 처벌과 국정 쇄신을 요구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이 조약을 성사시킨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토죄를 청하는 두 차례의 상소를 올린 다음 곧이어 직접 의병활동에 나선다.

  이 글을 쓴 다음해인 1906년 최익현은 전라도로 가서 낙안 군수를 지낸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그해 음력 윤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출발한 최익현의 의병부대는 정읍, 순창, 곡성으로 진군하며 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곧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조서가 내렸고, 이 명령에 따라 일본군이 아닌 전라 감영의 진위대가 의병의 진격을 막았다. 최익현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 같은 동포끼리 싸울 수는 없다 하여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양측이 모두 그 명령을 듣지 않고 총격전을 벌였다. 의병은 흩어지고 최익현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일본군 헌병 사령부에 구금되었다. 4개월 후 다시 대마도로 압송돼 위수부 경비대에 갇혀 있다가 그곳에서 함께 갇힌 임병찬에게 유소(遺疏)를 구술하고 음력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순국했다.

  이후 석방되어 돌아온 임병찬이 유소를 바치면서 전한 최익현의 마지막 모습은 이렇다. 대마도에 도착한 직후 일본인 장수가 갓을 벗기고 머리를 깎으려고 협박하자 최익현은 그를 꾸짖고 ‘목을 끊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 살 수는 없다.’며 단식을 감행했다. 곧 일본인 대장이 와서 사과하며 밥 먹기를 권했지만 ‘너희들이 주는 밥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계속하다가 ‘음식 값은 대한에서 보내온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3일 만에 단식을 풀었다. 그러나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데다가 풍증(風症)까지 겹쳐서 결국 그곳에서 사망했다.

  19세기의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참으로 무력한 나라였다. ‘무지’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청나라와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생각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세력에 잠식당하는 청나라를 보면서 국제 판도를 파악하고 대처할 방법을 모색하는 대신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쇄국의 길을 택해 스스로를 세계사에서 열외 시킨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 결과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국가의 모든 이권이 외국으로 넘어가고 내정의 자주권을 잃고 외교권까지 넘겨주었으며 결국에는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고 36년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전쟁 아닌 계약으로 망한 나라의 말로였다.

  지금도 잠깐만 방심하면 누가 어떤 조약으로 우리의 무엇을 빼앗아갈지 모르는 상황 속에 있다. 경제적으로도 외국 자본이 이미 깊숙하게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고, 동시에 우리 기업들도 해외에 많이 나가 있다. 총칼이 아니라 조약으로 우리 국부를 지켜야 하는 시대다. ‘오늘날은 조약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던 100년 전 면암의 외침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 오늘이다.


  

  
글쓴이 : 김성재
  •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 번역위원
  • 주요 번역서
    -  정조대 『일성록』 번역 참여
    - 『고문비략(顧問備略) 』, 사람의무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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