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경국지색(傾國之色) 미인(美人)
중국에는 고금을 통틀어 최고로 꼽히는 이른바 4대 미인이 있다.
찡그린 얼굴도 그렇게나 아름다웠다는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인 당 현동의 애첩 양귀비(楊貴妃),
잘룩한 허리가 요즘 말로 24인치 이하였던 것으로 유명한 조비연(趙飛燕),
역시 서한(西漢)때의 흉노족 왕에게 바쳐지는 비운의 여인 왕소군(王昭君)...
등이 주인공으로 역사는 이들을, 재앙의 조짐을 처음부터 보유한 채 타고난 천하일색이라 평하고 있다. 미인은 엄청난 화(禍)의 근원이라는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대로 자의는 아니라도 누구 하나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폐를 끼치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니까. 심지어 이중 일부는 멀쩡히 잘 나가는 나라까지 망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경국지색(傾國之色/한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게 할 만한 미인)이라는 말마저 만들어 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풍운아로 유명한 오자서(伍子胥)의 연인으로 아직도 기억되는 서시(西施)는, 춘추전국시대 말기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인 월(越)왕 구천(句踐)에 의해 오(吳)왕 부차(夫差)에게 미인계를 위한 뇌물로 바쳐져, 오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가장 유명한 경국지색의 모텔로 알려지고 있다(구천은 아버지 윤상(允常)이 죽은 위 왕위를 이어받자마자 오왕 합려(闔閭)와 싸워 그를 죽였다. 그러자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섶나무 위에서 자며 복수심을 불태웠다고 한다. 2년 후인 BC494년에 구천은 부차에게 패배하여 회계산(會稽山)에 숨었다가 버티지 못하고 용서를 빌어 오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 후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쓸개를 핥으면서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썼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끝내 부차를 꺾어 사살하게 만들고, 서주(徐州)에서 제후와 회맹하여 패자(覇者)가 되었다).
서시(西施)는 춘추전국시기에 월(越)나라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서시는 평소 심장병이 있어 자주 찡그렸는데, 이마를 찌푸려도 여전히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을 보고, 이 마을의 추녀가 자기도 서시처럼 하면 아름다워 보일까 하여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걸어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 추녀의 모습을 보고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황급히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효빈:效嚬,‘찡그림을 본 받는다`는 의미로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말)
어느 날 맑고 투명한 강변위에 서 있는데, 물고기들이 강물에 비친 서시의 얼굴을 보고 헤엄치는 방법을 잊고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侵魚)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양귀비(楊貴妃)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 당나가 망하는 데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래 수왕(壽王)의 비로 있었으나 운명의 장난에 의해 시아버지 현종의 눈에 들어 불륜의 비극과 당의 쇠락을 부채질하는 요인을 동시에 잉태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고 또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艶)’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뭄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아름다움을 과시하던 양귀비는 화원을 산책하며 무심코 함수화 한송이를 건드렸는데 양귀비의 손에 데인 함수화의 잎이 말려 버렸다. 양귀비의 미모에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하여 수화(羞花)라고 하였다.
실제 그는 각종 사서에 의해 할머니 측천무후가 완전히 문을 닫게 했을 당나라를 ‘개원(開元)의 치(治)’로 다시 일으킨 성군 현종을 미색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한 것도 모자라 안록산(安祿山)에게 반란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녀는 이로 인해 자신 역시 위기에 몰리자 38세에 자살하고 만다.
왕소군(王昭君)은 오랑케에게 바쳐지는 그 자신의 신세만큼이나 비극적인 대재앙을 남에게 강요한 경우에 속한다. 서한 원제(元帝)의 후궁인 그는 당시 선천적인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재원으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황제의 총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워낙 많은 후궁들을 일일이 볼 수 없었던 원제가 후궁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는 명을 내렸지만, 다른 후궁들처럼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안하 아름다운 얼굴이 제대로 원제에게 어필하지 못한 탓이었다. 나중에 이 기막힌 진실을 안 원제는 화공을 모조리 길거리에서 공개 참수하는 기시(棄市)에 처했다.
왕소군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비파를 잘 탔다고 하는데 어느 날 비파를 타고 있을 때, 기러기들이 날아가다가 날갯짓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땅에 떨어졌다 해서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조비연(趙飛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허리 하나만으로도 성제(成帝)를 휘어잡은 채 황음(荒淫)에 빠지게 해 훗날 그가 중국 최초의 복상사(腹上死) 황제가 되는 기록을 세우게 했다. 이 점에서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조비연을 대체할 4대 미인으로 꼽히는 후한시대의 초선(貂蟬)도 비슷하다.
하루는 황제와 조비연이 호숫가에 있는데 어디선가 강풍이 불어 춤을 추던 조비연이 휘청하여 호수로 빠지려 했다. 황제가 황급히 조비연의 발목 한쪽을 잡았으나 황제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비연은 작장중무(作掌中舞/손바닥위에서 춤추자)라고 불린다.
모시던 주인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의중을 간파, 간신 동탁(董卓)과 머리 텅 빈 터미네이터 여포(呂布) 사이에서 사랑의 줄타기를 타다가 여포가 동탁을 죽이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한다. 이 경우는 한 여인의 은인에 대한 보은의 일념과 우국충정이 동기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방아야 하나, 아무려나 동탁과 여포는 초선으로 인해 인생을 망쳐버렸다.
어쨌든 이들 4대 미인들도 약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 자타 공인의 경국지색이기는 하나 각각 지나치게 작은 귀, 엄청나게 큰 어깨와 발, 심한 암내가 나는 겨드랑이, 너무 거친 피부 등 하나같이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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