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조오백년총평(漢陽朝五百年總評)
개벽 제71호, 발행년월일 1926년 07월 01일
필자 : 안재홍(安在鴻), 기사형태 : 논설
一. 緖說
史를 論함은 容易치 아니하다. 이를 輕輕히 하는 것은 不可할 뿐 아니라 도리어 無謀에 가까운 일이다. 外交史 文學史 등 特殊化한 一面을 論함은 專門的 見識을 要하는 것인만큼 一面으로 도리어 簡易한 바 있지마는 일반적으로 論評하는 것은 매우 容易치 아니한 일이다. 이미 完備한 史料가 있고 혹 大成된 史書가 있을진대 實에 의하여 論을 내림이 그다지 어렵지도 않겠지마는 朝鮮서와 같이 史料가 完備치 못하거나 完備하였으되 整理되지 아니한 경우에 있어서는 이를 論함이 자못 至難에 가깝다. 漢陽朝 500年史와 같은 것은 列朝의 記錄이 거의 完備되었지마는 그의 浩繁함이 사람마다 다 閱할 수 없고 이미 또 정리하여 완전한 史書를 이룬 者 드므니 이를 論함도 容易치 않다. 하물며 悾惚한 時日에 朦朧하던 平昔의 기억을 힘입어서 塞責的으로 論述하고 마는 것은 매우 學究的 良心에도 어그러지고 또 處世의 妙方에도 서투른 짓이겠지마는 이제 잠깐 餘暇를 빌어서 이 需要에 應하는 것이다. 만일 淺見菲識이 大方의 웃음을 받는다 할지라도 스스로 河伯望洋의 嘆을 豫期한 바이다.
二. 漢陽朝以前의 槪論
半萬年의 歷史를 말하는 것이 朝鮮人의 恒例를 지었다. 朝鮮의 歷史는 오래고 그 文明의 系統은 世界五大文明의 系統의 밖에 따로 一特色을 發揮한 것임을 주장하는 者있다. 이 점에 관하여는 이제 論外의 일이요 그를 檢討할 餘日도<45> 없다. 다만 蒙古地方을 거쳐 온 줄로 推斷되는 朝鮮民族이 長白由系를 중심으로 遼河와 黑龍江의 流域으로부터 現 朝鮮半島에 占據하게 된 것은 그의 天然과 人文의 地理上 매우 多難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있어서도 이미 黃河의 流域을 向하여 격렬한 生存競爭의 運動을 일으키어 漢族과의 사이에 허다한 戰爭을 일으킨 것을 斷片的으로 古記錄에 보였거니와 무릇 檀君建國以後 거의 수천 년간에도 이러한 상태는 전혀 끊일 새 없었다. 檀君朝의 往事가 자못 爽實한 바 많고 箕子가 東來하여 一隅에 棲息하였다는 夫餘 沃沮 蓋馬玄菟등의 列國이 分立한 時代까지도 오히려 그러하였었다. 그러나 高句麗 百濟 新羅 등 三國이 鼎立한지 前後 거의 七八百年에 안으로 三國간의 각축과 밖으로 漢 鮮卑 혹 日本 등과의 葛藤이 또 依然하였다. 新羅가 唐을 聯하야 麗濟를 깨뜨리매 渤海가 北方에서 再興하여 비록 南北朝 200년의 歷史를 나타내었으나 分裂의 形勢는 드디어 나을 수가 없었고 朝鮮의 勢力은 더욱 減殺됨이 있었다. 金庚信이 太宗 武烈王을 도아 統三의 業을 이루었다 하지마는 당시의 記錄은 平壤이 오히려 茂草를 悲嘆하였고 關北의 地 太半 荒廢하였음을 전하였다. 하물며 唐의 誥命을 빌고 그의 節度에 應하는 등 外力을 이용하는 後世 所謂 事大政策은 이때부터 大部이나 作俑된 觀이 많다. 그리고 滿韓의 大陸에 걸쳐 앉아 積極的 對外競爭에 傾倒하던 國民的 大氣魄은 차례로 꺾이고 지쳐서 드디어는 劣弱國民의 班列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弓裔가 新羅를 叛할 새 高句麗를 위하여 報讎할 것을 聲言하매 浿西의 十數州가 일시에 響應하였고 甄萱이 完山에 叛하여 義慈王의 宿憤을 雪할 것을 豪語하고 後百濟의 國名을 세우매 西南의 州郡이 곳곳이 響應하여 草澤의 怪雄으로 오히려 人心을 얻음을 기뻐하였으니 이 비록 蒼古한 舊史이나 오히려 人心趨移의 자취를 볼 수 있는 바 이었었다. 高麗 王建이 松京에 業을 創할 새 高句麗의 大業을 復興키를 企劃하고 차차로 平壤의 繁榮을 策하며 30萬의 大軍을 두 西北面(平安道)의 邊境에 留意하여 은근히 滿洲의 恢復을 望想하니 彼의 규모가 오히려 雄遠 바 있었다. 그러나 地脉을 존중하는 堪興家의 說과 佛敎를 崇奉하라는 地方本願의 思想은 그의 10個條의 遺訓중에 있었으니 高麗 500년간 佛敎의 尊信과 및 陰陽術數의 盛行이 크게 社會人心을 衰靡케하는 微候는 벌서 이때부터 보였다 할 것이다. 顯宗의 以後 國力이 더욱 衰微하고 文宗의 治世를 지나 宋學을 尊奉하는 氣風은 더욱 文弱의 傾向을 조성하였다. 또한 蒙古 100년의 횡포는 前後 5次의 侵略을 거듭하여 天下蕭然하고 人民의 疲弊함이 其極에 달하였다. 紅頭賊이 오고 納哈出이<46> 오고 金山金始의 女眞의 遺種들이 와서 區區 3천里의 山河에 일찍 兵火가 쉬일 새가 없었고 다시 倭寇의 侵襲이 沿海州郡으로부터 內國에 深入하는 바 있었으니 이 高麗末年의 情況이었다.
太祖高皇帝李成桂 몸을 武門에 일으키어 문득 納哈出을 破하고 金山金始를 쫒고 다시 倭寇를 駈除하니 倭寇를 擊破함이 一再만이 아니었지마는 雲峯의 引日驛으로부터 荒山에서 倭寇를 大破함은 그들에게 致命傷을 주었고 이것이 高皇帝의 威名으로도 內外에 振撼케 하는 바 있어 그의 勢-드디어 麗朝를 簒奪케 되었으니 李朝勃興의 政治的 原由는 대강 이러하거니와 그가 이미 武門으로부터 일어나 馬上에서 天下를 얻었으며 崔忠獻 鄭仲夫 등 武人의 跋扈에 徵한 바 있었고 당시 正籍에 심린 民戶가 겨우 35萬餘口라 하든 極度인 民人의 散亡에 생각한 바 있어 스스로 武를 賤히 하고 文을 崇하는 氣風을 促成하였다. 그러고 王氏가 佛敎를 崇尙하여 그 流弊의 심함이 妙淸辛旽의 亂을 보게 되고 國俗이 인하여 浮虛한데 흐르게 됨에 徵하매 이에 佛敎를 斥하고 儒道를 尊崇하니 明의 勢力을 이용하는 그의 外交政策과 아울러서 그는 漢陽朝創業當時의 二大特色이었었다.
三.漢陽朝의 第一期
年代로써 歷史의 時期를 區劃함은 不當한데 가까운 일이나 그러나 史上의 중요한 形勢가 스스로 그 顚末의 起落된 자최가 있으니 그를 標準하여 일정한 시기를 區劃함은 설명상에 매우 편리한 바 있다. 太祖元年으로부터 宣祖 25년 壬辰亂勃發當時까지는 비교적 太平한 시대이라. 前後 200년 동안에 일찍 큰 變亂이 없었으니 이것이 한 時期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突發事變보담도 社會의 事情이 스스로 변동하는 바 있어 史家의 注意를 끄는 者 있으니 太祖元年으로부터 第8代 成宗王의 末年까지 前後 103年 동안을 第1期로 漢陽朝隆興의 시기를 이루었다. 燕山王의 元年으로부터 哲宗의 末年까지 368年 동안을 第2期라고 하여 漢陽朝의 文明이 안으로 爛熟하여지고 밖으로 다시 種種의 患難이 닥쳐와서 漢陽朝 그것의 史的 特徵을 具現하고 인하여 그의 歸結될 運命을 결정하는 期時가 된 것이니 이 時期를 다시 3期에 區劃할 수 있다.
四. 漢陽朝의 第一期大觀-그의 內政及外交<47>
高宗太皇帝卽位元年으로부터 隆熙國4年 日韓合倂의 때까지를 第3期라고 하니 時期가 비록 47년을 넘지 못하나 內憂外患이 이따금 들어 닥치는 중에서 革新이냐 衰亡이냐의 國家的大煩悶中에서 이내 불행한 終局을 마쳤다 할 것이다. 이는 최근에 朝鮮史를 論한 者의 주장으로 구태여 고칠 필요를 認치 않는다. 太祖李成桂 隆隆한 武勳으로 이미 異圖를 품어 漢陽朝創業을 企劃한지 오래니 威化島回軍의 際에 급급한 一念이 오직 王業을 早成함에 있었던 것이다. 鐵嶺以北咸鏡道의 지방으로 저희의 版圖에 넣고자 하니 明太祖朱元璋의 野望이 이미 심한 者이오 都統崔瑩이 蒙古의 衰함을 타서 먼저 鐵嶺以北을 恢復하고 다시 鴨江을 건너 遼東을 다투고자 하니 이는 王建太祖以來의 宿志를 오히려 버리지 아니함이라. 당시의 形勢가 비록 무모에 가깝더라도 오히려 昔年의 義氣가 남았던 것이다. 李成桂가 回軍하야 문득 王業을 成하고 인하여 王氏의 諸族을 屠殺하니 明의 세력을 迎合하기에 苟苟함이 있던 것과 아울러 보아 매우 心事의 光明치 못함을 알 것이다.
定宗 太宗의 사이의 骨肉이 相殘하는 바 있었고 世宗의 盛大를 지나 文物制度와 內外의 國基가 이미 정비하고 안정된 바 있었으나 端宗世祖의 사이에 다시 大權爭奪의 慘禍가 있었으니 이러한 事變은 古來로 그 例가 史上에 많았었다. 그러나 世祖의 英材偉略이 자못 稀世의 明君으로서 안으로 武備를 닦고 밖으로 적이 邊患을 물리친 바 있어 스스로 隆治의 實을 드러냈다. 成宗의 시기에 미처 制度의 完備함과 學風의 振興함은 거의 前代의 없었던 바이오 群賢이 그 사이에 輩出하는 觀이 있었으니 成宗의 시대로써 漢陽朝太平의 絶頂이라 함이 당연한 일이다. 이 는 第1期史의 大觀이다.
門下侍中平章事와 吏部尙書戶部尙書의 官制는 王에 대한 陛下의 尊號와 함께 비록 形式上의 問題이나 高麗의 그것은 오히려 獨立自尊의 氣勢를 보였고 元의 세력이 全半島를 威壓함에 미쳐서 비롯 政丞判書의 名目이 殿下의 尊號와 함께 사용하였으나 恭愍王의 世에 이르러 元의 세력을 反抗함에 미쳐서는 곧 다시 前述한 명칭을 회복하였었다. 그러나 漢陽朝의 君臣은 일즉 이를 생각지 않았었다. 이것이 그의 意氣로서 前代에 비하여 이미 一等를 讓한 것으로 볼 것이다. 다만 佛敎를 억제하고 儒道를 崇하니 儒는 所謂治國平天下를 그 理想의 極致로써 하는 일종의 政治學이오. 儒를 崇하는 곳에 아울러 中國의 制度를 模倣하니 이것이 漢陽朝에 와서 政治的 社會的의 諸般의 制度文物이 一進步를 이룬 이유이다. 그러나 制度文物이 완비한 지경까지 진보됨에는 한편으로 곧 虛文褥禮의 弊가 따라서<48> 생겼고 생활의 범위를 스스로 國內安閑한 小天地에서 跼蹐한 漢陽朝의 士人들은 결국 소소한 理論으로써 相互의 反目을 일삼고 그 禍는 드디어 回救할 수 없는 永續하는 黨爭으로써 하였다. 이제 第1期중 중요한 사실을 一瞥할 필요가 있다.
高麗의 制가 分田으로써 官僚兵民에 按配하여서 祿을 代하였더니 後世에 점점 解弛하여 兼倂의 風이 성행하매 國富가 犴猾한 兼倂의 徒에게 分占되고 公卿將士 오히려 祿俸 資가 乏하니 彼等이 안심하여 國事에 盡瘁할 수 없었고 중기이후 高麗의 敗亡이 大部가 이에 인함이라. 太祖登極의 前에 이미 田制를 打破하여 그 弊를 구하니 이것이 天下人心을 收攬함에 큰 効力이 있었고. 中葉以後 高麗의 兵制가 크게 문란되어 權勢家가 私로 將卒을 기르니 崔瑩과 李太祖가 모두 私兵을 거느리어 戰陣중에 橫行하였고 漢陽朝創業이 이에 힘입음이라. 國初에 있어 田制의 改革한 뒤를 따라 곧 私兵의 制를 파하고 軍兵을 모두 三軍府에 屬케 하였다. 그리고 田制兵制의 개혁은 즉 漢陽朝가 存立되는 兩大理由이었다. 官制의 改革과 宗敎의 改革은 모두 중요한 사실이니 佛을 抑하고 儒를 崇함이 각 방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위에도 略述하였었다. 그리고 活字의 發明과 活版의 應用이라든지 朝鮮國文의 創作같은 것이 朝鮮歷代에 있어서 중대한 사실이요 이것이 世界的으로 特書할 만한 것은 물론이다.
高麗史農事直話 三綱行實 治平要覽 新制陣法 등 각 방면에 관한 書籍이 이 시기에 刊行된 사실에 돌아보아서 그 文敎에 유의한 자취를 볼 것이요. 學校의 設立으로써 필경은 文風이 大興하고 群賢이 輩出하는 境域에까지 나아갔으나 그것이 곳 儒道를 중심으로 中國禮讚의 情을 助長하고 인하여 소위 尊周의 思想을 鼓吹하여 一國士女로써 事大의 病毒이 骨盲에 드는 因素를 짓게 한 것은 가장 注目할 일이다.
麗末에 紊亂되었던 風紀를 匡救하기 위하여 婦女再嫁를 禁하고 再嫁女의 자손에게 官職에 就하는 制裁를 加한 것 등은 비록 미세한 듯하다. 後世社會에 影響한 바 적지 않을 것이다. 外交의 방면으로 一瞥하건대 明에 대한 태도가 항상 소극적인 退讓의 태도로써 一貫한 것은 중요함을 要치 않거니와 世宗의 朝에 一萬七千의 兵卒로써 對馬島를 征伐하여 오히려 때때로 窃發 하는 海寇의 巢窟을 掃蕩코저 함이 一快擧이었었다.<49> 그러나 全西南日本의 諸畜이 協力抗爭함에 의하여 敗戰하였으나 비록 敗하였으나 漢陽朝의 말로는 자못 威武를 發揚한 바라 할 것이다.
世祖의 末年 吉州의 李施愛亂을 討平함이 第一着의 內亂으로 적이 당시 朝野를 整愕케 한 바이니 成宗의 世에 혹은 豆滿江外의 野人을 掃蕩하고 혹은 波猪江畔建州衛의 女眞人을 擊破하여 邊境을 안정케 하는 功이 자못 顯勞한바 있었다. 六鎭의 開拓등이 世宗朝의 특기할 사실이라 하나 創業의 初에도 오히려 豆滿江岸까지 政令이 行한 바 있었으니 그는 모두 중간에 分遷한 野人을 정리함이라. 오히려 특기할 바 없다.
요컨대 漢陽朝創業期의 代表的 國策은 곳 武를 偃하여 文을 修하되 農桑을 勸하여 民力을 扶植하고 儒道를 중심으로 孝悌忠信의 常識道德을 鼓吹하였으며 外交關係에 있어서는 明을 承順함을 거의 不易의 法으로써 하여 다만 무사하기를 希求하는 태도가 선명하였으니 그들이 創業의 前에 있었을 때는 崔瑩의 對外强硬의 政策에 반대하여 所謂 以小逆大의 불가한 勢를 論하고 이미 王業을 創하며 곳 前述한 政策을 지속하였다. 그들이 王氏의 遺族을 殘滅하고 異姓代替를 예언하였다는 圖讖를 불 질러서 스스로 人心의 동요될 禍因을 根絶하고 다시 유일의 威嚇인 明朝의 意思에 迎合하여 일찍 進取를 생각지 아니한 것은 천하의 대세가 이미 정한 바 있어 人爲的으로 奈何키 어려웠음을 首肯하려니와 這間에 또한 규모가 狹小하고 用心이 奇險하여 一家萬世의 영화를 獨擅하려한 形跡이 歷然하다 할 것이다.
成宗의 말년까지 一百三年의 동안 비록 前記한 數三의 兵革을 보았으나 그는 모두 소소한 사건에 불과하였고 昇平한지 날이 오래매 上下가 모두 逸樂에 젖었으니 笑春風의 名妓 이미 廟堂의 大臣들을 弄하고 다시 軍府의 名武에게 환심을 붙여 靄靄春風 스스로 聖朝의 烟月을 노래하게 하는 一便으로 문득 爛熟하여지는 文明이 天下人心의 頹發 廢違와 및 强隣猛敵이 기간에 窃發케하는 徵候를 지은 바 있었으니 燕山主以後 속출하는 士禍는 隆盛을 極하든 斯文의 域으로 無限殺伐의 場을 짓고 壬辰丙子의 役에 八路民生이 거의 魚肉을 짓되 일찍 그를 痛斥하는 쾌거를 보지 못한 것은 그 유래가 매우 멀다 할 것이다. 이제 第2期를 論하고자 한다.
五. 漢陽朝의 第二期大觀-士禍, 黨爭, 外寇, 內亂
前述과 같이 前後 368년의 長久한 期間으로써 형성된 第2期에는 漢陽朝의 歷史的 特徵을 지을 만한 각종의<50> 사실로써 채우게 되었다. 學徒와 俗輩간의 軋轢의 形式으로써 發端되었던 士禍가 점차 政權爭奪의 음모인 黨爭으로 轉化하여서 國家의 隆運을 희생으로 하고 인하여 民氣의 沮喪을 招來하였다 할 수 있음도 이 시기를 통하여 여러 形式으로 늘 繼續되든 사실이오. 壬辰丙子 兩次의 亂으로써 기억되는 日本 滿洲의 侵入 등 중대한 變亂과 밋 그 政治的 影響도 매우 중대한 바이며 이러한 內憂外患의 己甚한 뒤에 있어 英宗, 正宗의 名君이 黨爭의 蕩平을 策하고 文治의 復興에 노력하여서 國力의 充實을 現實코저 하다가 누적한 弊寶가 드디어 어찌할 수 없이 필경은 중대한 內亂이 되고 王室의 權威따라 失墜되며 國民的 運命도 또한 따라서 死活의 岐路에 다다르려 하였으니 現代의 朝鮮을 알기 위하여서도 이 第2期의 檢討가 가장 意義가 많은 일일 것이다.
漢陽朝 500년 동안은 대체로 보아서 儒學全盛의 時期이오. 그중에도 程朱學派 獨擅의 時代를 지었었다. 高麗의 末期로부터 尊崇하기 비롯하였던 소위 東方理學의 宗을 일컫는 程朱學派勃興의 유래는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佔畢齋金宗直이 漢陽朝儒學派의 先驅를 지었고 그가 世祖王의 一失을 譏刺하였다는 吊義帝文의 一篇과 및 그의 門徒金馹孫의 史官으로서의 直筆이 원인이 되어 燕山君4年 戊午士禍를 일으키었고 다시 燕山君의 母后인 成宗 廢妃尹氏에 관한 燕山主의 분노를 기회로 소위 일시의 名流가 모조리 誅戮과 竄謫에 넘어지는 慘厄으로써 하는 甲子의 士禍가 되었으며 中宗王繼位의 뒤에 있어 旭日昇天의 形勢로써 至治의 世를 實現코저 노력하던 靜菴趙光祖의 配竄밋 賜死로써 대표되는 己卯의 士禍가 있어서 漢陽朝에 와서 顯勞하게 振興된 儒道와 및 輩出한 그의 名士들은 이내 天下慘厄의 焦點이 된 觀이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金宗直이래로 趙光祖에 미치기까지의 三次의 士禍란 者는 道義論的 見地로써 一世를 澄淸하기를 己任으로 삼는 士類에 대한 俗流들의 憎惡가 排擊의 형식으로 發露된 文義와 같은 士禍가 있었고 이것이 一變하여 문득 外戚 및 政閥간의 爭鬪의 수단으로써 된 것은 趙光祖失脚후의 新形勢로서 다 못 注目할 점이다.
南袞 沈貞등의 誅戮과 金安老 許沆의 沒落 등이 모두 王室의 至親에까지 관련되는 바 있었고 그들의 軋轢의 규모도 무던하게 큰 바 있었다. 그러나 尹任과 尹元衡 등의 外戚인 兩巨頭를 중심으로 생겨난 明宗王元年의 乙巳士禍란 者는 오로지 彼等政權慾에 끌리어 움직이는 外戚들의 음모의 渦中에 빠져서 李彦迪 白仁傑 등 諸人이 모두 遠州에<51> 竄*** 禍를 입게 되었었고 明宗 20여년의 治世를 지나 宣祖의 當年에 미쳐서는 士類의 爭論이 즉 廢堂의 政爭으로서 *되고 그의 派黨의 消長이 즉 政局의 형세를 반영하게 되었으니 이는 一面으로는 漢陽朝의 政柄이 이미 儒徒들의 -적더라도 그의 學派로 자처하는 者들의 掌中에 들어갔음을 表明함이 어니와 分黨의 形勢가 또한 따라 議定된 것이었다.
李浚慶의 一封遺剳이 宣祖의 宸襟을 수그러이 하였고 이것이 士類를 戕害하는 文字이라고 非議되었다 하거니와 高談放言함과 朋比結托함으로써 黨同伐異의 弊風의 더욱 盛行하여서 그로 인하여 外患內憂에 정당한 견해를 방해하고서 國家民生을 그르침이 매우 尋常치 않은바 있었다. 沈義謙 金孝元 등 兩個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先輩 및 後輩들의 葛藤이 드디어 東西分黨의 導火線이 되고 政敵處斷의 寬嚴의 주장이 다름으로부터 動人의 南北分裂이 생기며 壬辰丙子以後 西人中에 다시 老少黨論의 角立함을 보기까지 사이에 黨中黨을 세우고 派에 派를 나눔이 거의 그칠 바가 없는 것 같이 하였으니 이는 그 顚末을 煩瑣하게 枚述할 수 없는 바이거니와 黃允吉 金誠一 등이 日本의 入寇의 與否를 다투어 國防을 등한케 함도 黨爭의 餘味이었고 天下喪亂의 틈에 있어서 百勝의 巨人 李舜臣을 拿捕하여 敵騎가 長驅하고 全域이 魚肉케함도 黨爭의 一餘味로 볼 것이며 비록 聖明의 德은 없었으나 光海君의 廢黜이 또한 黨人들의 政權攘奪의 一犧牲으로서 云爲되는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 기타 不軌를 圖한다는 둥 異志를 陰蓄하였다는 둥 가진 各色의 罪名으로써 竄配誅戮의 刑禍에 넘어져서 千秋의 後에 오히려 寃屈을 펴지 못하는 者가 거의 다 黨爭의 음모에 걸림이 아닌 者가 적다. 仁祖로부터 孝宗 顯宗 肅宗 景宗의 諸代에까지 尊明親淸의 外交政策이 黨派를 따라 變轉된 것은 현대의 政黨間에서도 떳떳이 있는 바로서 怪異하지 않겠지마는 오직 殺戮放逐 등으로 所謂 斬草除根流의 險毒한 心法을 發揮한 것만은 史家들이 이것으로써 거의 朝鮮衰亡의 第一因이 되었고 단정까지 하려함도 어즈버 酷評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金瑬 李貴 등 諸人이 仁祖王을 推戴함에 관하여 北人內訌의 틈을 탄 西人의 政局轉換의 음모인 것을 論한 者 있으니 이는 즉 光海君廢黜의 裡面의 소식을 말하는 一說이어니와 南老興敗의 大關嶺인 소위 庚戌의 大黜陟이란 者는 3년 朞年 大功等 服喪의 禮論으로써 그 紛爭의 발단을 삼았고 英宗 定儲의 緩急論은 老少權門 翻覆의 禍機를<52> 삼아서 무엇이나 모두 黨派의 消長을 本位로서 그 구실과 목표를 만들기에 급급함이 있었으니 이는 漢陽朝의 거의 全時代를 통하여 끊일 새 없이 되풀이한 政爭의 歷史가 곧 그 全般史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는 이유이오. 漢陽朝를 評하는 者의 가장 유의할 곳이라 한다.
士禍와 黨爭으로써 표시되는 國家內部의 社會的 變動은 上述과 같거니와 外患의 방면으로부터 論할지라도 第2期 동안에는 曾述함과 같은 兩大兵役이 있어서 漢陽朝의 500년간의 중대한 사실이 될 뿐 아니라 全 朝鮮史上에도 자못 중대한 影響을 미치게 한 바 있다 할 것이다. 第1期 중에 있어서도 豆滿江外 野人과 밋 建州衛野人들의 邊境侵掠으로 인하여 다소의 用兵을 보게 되었지마는 第2期의 初期에 와서도 오히려 때때로 突發함이 있다가 畢竟은 史上에 드문 大慘禍를 일으킴에까지 이른 것이다. 中宗王 5年 庚午에 三浦倭의 變亂이 있어 말하자면 局部的 小衝突이지마는 오히려 一國이 騷然하려는 人心의 動搖를 보다 시피 하였고 明宗 10年 乙卯에도 60餘艘의 倭寇가 湖南에 海濱列邑을 침략이 있어 全州府尹 李潤慶의 將略이 容易히 이를 擊退한 바 있었으나 近世 소위 南難의 原由를 짓는 日本의 侵入이 일찍 전혀 끊이지 않았음을 알 것이오. 野人의 患을 말하더라도 中宗王의 治世에는 北으로 會寧과 西로 滿浦鎭 一帶에 모두 塞外民의 侵入이 있어 일시에 用兵함이 있었으나 要컨데 모두 疥癬의 疾인 者이었었고 累十年을 지나 宣祖王의 治世에 이르러 비로소 모두 擴大된 바 있다.
宣祖 16년 癸未의 尼湯介의 北邊侵入 同20년으로 翌年까지에 同野人들의 慶興侵入같은 것은 前期의 이 종류의 兵亂에 비하여 자못 규모의 큰 者이었고 더욱 尼湯介의 侵入事件은 거의 全國的으로 人心의 懊惱함을 이루게 되었었다. 그리고 동일한 20년 2월에 倭寇가 湖南의 興陽을 侵하여 損竹島萬戶李大源의 戰死를 보게 된 것 같은 것은 비록 소소한 一邊 警告지마는 一面으로 朝鮮側의 軍紀의 紊亂이 도리어 無用한 兵員의 이동과 人心의 騷擾함을 이루게 되었으니 무엇이나 마치 外患이 바야흐로 급하게 할 때에 國情이 매우 안심치 못할 바 많은 것을 豫告함인 것 같은 槪가 있었다. 이때에 있어서 一般的 政治事情으로 말하면 上述한바와 같이 사화의 餘勢가 비상한 人心의 分裂 밋 綱紀의 頹廢로써하여 分黨의 形勢가 이미 심하였고 內外의 時兆에 豫感한 바 있어 養兵防亂을 주장한 先見者의 忠言이 드디어 용납되지 못하고 필경은 宣祖壬辰日本兵의 대거 侵入을 당하여 連戰 連敗의 勢가 거의 挽回키 어려움에 이른 것이다.
壬辰 4월 13일에 日本軍이 釜山에 上陸하여 5월 2일에 京城에 진입하니 반개월 동안의 일이오. 6월 14일로써<53> 平壤에 그 先鋒이 達하였으니 꼭 2개월 동안의 일이다. 古代에 있어서 2개월 동안에 全國의 중요한 地方을 들어서 敵騎의 馳突함에 맡기었다하면 그 敗退함에 너무 迅速함을 놀라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水陸並進하는 日本의 작전이 비록 陸上에서 乘勝長驅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李舜臣의 常勝의 勢에 꺾여 그의 水軍은 문득 摧敗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彼等이 西海로 回航치 못하고 兩湖가 실어금 안전함을 얻어서 平安一帶와 呼應하여 적이 局面을 유지하게 되던 바이라. 및 和議가 破裂되고 日本軍의 再侵入을 보게 되매 李舜臣拿捕된 틈을 타서 적군의 策動은 더욱 自在한 바 있으니 丁酉亂의 때에 湖南이 畢竟魚肉이 된 것은 國力의 疲弊가 더욱 심케 된 者이었었다.
癸巳 10월에 京城이 收復되매 부근 일대에는 시체가 산을 이룸을 기록하였었고 癸巳 6월 晉州城의 陷落에는 六萬餘의 軍民이 일시에 慘禍를 만나 南國의 雄州가 인하야 丘墟를 이루었고 前後戰役 무릇 敵軍敗退하는 시기에는 지나는 곳마다 殘滅이 심하여 閭里가 兵火속에 燒蕩되고 人民이 모다 散亡하였다하니 芝峯李晬光의 소위 『癸甲年間 木綿一匹米二升에 値하고 一馬의 價는 3,4斗에 불과하며 飢民이 白晝에 屠剪하야 서로 먹으며 癘疫으로써 덮쳐서 道路死者가 서로 걸리며 水口門外積死가 山과 같아서 城보담 높기가 數丈이라』고 한 것은 그 정세의 일반을 엿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朝鮮에 應援키 위하여 進入하였던 前後各陣의 明兵이 州里를 침략하고 人民을 勞苦케 함도 또한 심상치 않은 바이어서 壬辰의 一役에 上下國民의 疲弊는 매우 비참한 一大國難을 이룬 것이 누구나 부인코저 할 者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있어서 朝鮮人民自體의 취한 태도를 보면 또한 綱紀의 頹廢와 人心의 離叛이 얼마큼 심하였던 것을 짐작할 것이다.
壬辰 4월 宣祖王이 京城을 떠나매 亂民이 먼저 宮中에 들어가서 內帑의 金帛으로부터 宮室 官省 歷代器物 史草 日記 등을 모다 불 질렀었고 外他州郡에서도 이와 유사한 事態는 종종 있었으며 宣祖-平壤에서 離散民을 招撫하였다가 日本軍의 逼近함을 듣고 다시 進發코저 할 새 亂民들은 모두 土石을 던지고 怨嗟의 聲과 *罵의 語로써 平日分爭侵魚의 죄를 呌彈 하였다하니 壬辰役의 陸上의 敗退는 다만 軍備의 부족 뿐 아니라 이러한 人心의 離叛 및 自暴가 얼마큼 큰 원인을 지었음을 알 것이다. 그럼으로 日本兵의 氣勢가 꺾이고 豊臣秀吉이 따라서 病沒한 후 兵亂이 간신히 戡定되었음에 不計하고 朝鮮의 朝野에는 소위 臥薪嘗膽的의 復興 또는 설욕의 기운이 動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음은 고사하고 의연히 黨爭에만 몰두하여 半世紀를 넘지 못 할 동안 다시 滿洲의 入寇에 인한 國民的 屈辱을 보되 다시 어찌 할 수 없이 될 것이라 한 것이다. 아직 다시 壬辰戰役을 중심으로 內外의 情勢를 批判할 필요가 있다.(繼續)<54> <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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