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尺長釰으로 五百年 大業 李太祖 建國 實錄
별건곤 제20호
발행년월일 1929년 04월 01일
필자 車相瓚
世世豪傑인 그의 家閥
太祖의 始祖는 新羅의 司空李翰이다. 그의 六世孫 兢休가 비로소 高麗에 仕하여 司空이 되고 其後 제18대에 至하여 李安社(穆祖)라<27> 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本來 全州의 人으로 또한 高麗에 仕하여 宜州(今 咸南 德源)知事가 되였더니 微罪를 得하고 (全州에서 監司의 愛妓를 斬殺함) 逃하여 江原道 三陟郡 活賓洞으로 移住 하였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또한 知縣에게 罪를 得하고 元의 南京(今 間島 局子街)으로 遠避한 후 元에 仕하여 5천戶의 達魯花赤(元의 地方官名이니 本音 따로카치)이 되었었다. 그리고 그의 子 李行里(卽 翼祖)는 또한 南京의 千戶가 되매 女眞 諸千戶의 部下가 다 歸附함으로 千戶等이 그를 忌惡하야 殺害코자 하니 遂히 逃亡하야 豆滿江의 下流 赤島(慶興東)에 住居하다가 후에 다시 德源府로 移住하였었다.
翼祖의 子 度祖 椿은 蒙古의 名으로 孛顔帖木兒이니 또한 元에 仕하여 父職을 襲하고 高麗 忠烈王때에 비로소 王에게 謁見 하였으며 度祖는 또 三子가 있었으니 次子 子春은 蒙古名으로 吾魯思不花라 稱하는 바 雙城 (今 永興)에 居하여 역시 千戶가 되었으니 그가 곳 李太祖의 父 桓祖다. 그는 高麗 恭愍王 4년에 王에게 來朝하여 少府尹이 되었으니 당시 朝鮮半島의 北部는 대개 女眞族(所謂 野人)의 巢窟로 元國에서 雙城에 總管府를 置하여 此를 지배하던 바 元의 舊勢力이 점차 衰微하고 明의 新勢力이 아직 扶植되지 아니함을 機會로 하여 恭愍王은 北方의 舊領土를 다시 開拓하려고 密直副使 柳仁雨로 東北面 兵馬使를 삼아 元의 總管府를 攻擊하매 桓祖는 此에 內應이 되어 不時에 總管府를 改陷하고 咸州 以北의 諸地를 回復하니 其時에 桓祖는 그 功으로 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어 東北境을 鎭撫하더니 恭愍王 9년 4월에 불행히 46세를 一期로 하고 逝去하였으니 以上 穆祖로부터 桓祖까지를 稱하여 李朝의 四祖라 한다.
文武兼全萬戶侯
桓祖는 또 三子가 있었으니 長은 元桂(完豐君) 次는 成桂(卽 李太祖) 又 其次는 和(義安大君)다. 然而其中次子 成桂는 天資가 奇偉하고 神采가 英邁하며 射術에 長하여 百步穿楊의 才가 有할 뿐 아니라 또한 文이 能하야 可謂 文武兼全한 豪傑男兒이었다. 그는 高麗 忠肅王 後 4년 乙亥 10월 11일에 永興郡 黑石里에서 呱呱의 聲을 發하야 恭愍王 5년에 22세의 少年으로 東北面上 萬戶가 되었다가 北邊에서 軍功을 屢建하여 未久에 門下府知事가 되었었다. 당시 半島에는 北方에 野人의 患이 不絶하고 南方에는 日本沿海의 邊寇(所謂 倭寇)가 各州郡을 頻頻히 侵掠하여 人民이 安堵치 못하나 政治가 腐敗하고 武備가 頹廢한 高麗朝廷은 此를 擊攘할 人物이 別無하였다. 그러다가 王禑 3년에 李太祖로 海寇 征討를 命함에 (其時爲全慶楊廣道都巡察使贊成事) 그는 彼有名한 李之蘭將軍(本佟豆蘭)과 共히 全羅道 雲峯에 出兵하여 引月驛에서 당시 驍勇無比한 敵將 阿只拔都를 射殺하고 (之蘭은 其兜를 射落하고 太祖는 其口를 射中하였다) 餘衆을 討平하니 此가 즉 有名한 荒山大捷이다. (今 有大捷碑) 그리고 同年 9월에는 또 海州에서 倭寇를 大破하니 (有躍馬池古跡) 이로부터 宇內에 外患이 根絶되고 太祖의 聲望이 日로 振揚하여 同王14년에는 門下侍中으로 躍進하였다. <28>
三尺劍頭安社稷
然而當時 高麗朝廷에는 二大柱石의 臣이 있었으니 하나는 李太祖와 가티 門下侍中으로 잇는 武臣의 崔瑩이오 또 하나는 政堂文學으로 잇는 文臣의 鄭夢周였다. 이 兩人은 麗朝世祿의 臣일 뿐 아니라 일반의 信望이 多하여 國家의 大小事를 다 料理함으로 비록 李太祖가 政堂의 椅子를 占하고 있을지라도 감히 自由로 威權을 行使치 못하고 따라서 王位占奪의 野心을 遂하기 어려웠었다. 그럼으로 李는 항상 崔n 鄭 兩人만 없으면 當時의 天下는 自己手中으로 入하리라 생각하고 또 崔, 鄭 兩人은 생각하기를 北賊南寇를 다 討平하여 天下泰平한 그 時機에 李만 없으면 自己네가 다시 王室을 復興하야 麗朝中興의 大業을 可成하리라 하고 서로 疑懼하며 서로 猜忌하였다. 그러나 鄭圃隱은 원래 文臣인 故로 露骨로는 李太祖를 除코자 아니하였으나 (威化島回軍 以前까지는) 崔侍中은 武臣인 故로 機會만 있으면 李太祖를 除害하려고 하였다. 太祖가 侍中으로 있을 때에 一日은 어떤 會席에서 聯句를 占하되 「三尺劍頭安社稷」이라 하였더니 崔侍中은 口를 應하야 對하되 「一條鞭末定乾坤」 이라하니 一座가 다 그 兩人의 大志가 有한 것을 알고 兩人도 또한 그 心事를 相通하여 서로 身邊을 警戒하였다. 이에 先하여 支那에는 元이 亡하고 明이 新興하매 (恭民王 17년에 元이 亡함) 그 革命의 波動은 半島에 까지 及하여 高麗朝廷에는 排明親明 兩派가 生하였으니 즉 禑王及李仁任一派는 元과 自來 國際上關係를 思하여 親明論을 唱하고 李太祖 一派는 大勢上關係로 親明論을 主張하였다, 如斯히 紛議가 不一하다가 禑王 14년 2월에 高麗의 使節이 明에 往하였다가 通聘拒絶을 當하고 또 明이 鐵嶺衛를 設하여 鐵嶺 以北의 地를 遼東에 屬코자하니 麗朝의 君臣은 一時 激憤하여 攻遼의 議를 發하니 그 主謀者는 卽 崔瑩이었다. 其時 李太祖는 極力으로 그 大勢의 不利함을 陳言하나 王은 듣지 않고 崔瑩으로 八道都統使를 삼고 昌城府院君 曹敏修와 李太祖로 左右都統使를 삼어 大兵을 率하고 遼東으로 向케 하고 王과 崔瑩은 平壤에 친히 留陳하여 遙히 大兵을 節制하였었다. 그러나 이 出兵은 實은 遼東을 征伐코자 함보다 太祖의 威權이 日盛함을 忌하여 그를 外征케하고 其機를 乘하여 除害하려 함이다.(明이 出兵을 問責하면 其罪를 太祖에게 歸하고 又戰敗하여도 其罪를 罰코자 함이다.)
六軍不發威化島
却說-李太祖는 曹敏修와 共히 左右軍을 率하고 威化島에 至하니 때는 마침 夏5월이었다.
天祐라 할지 神助라 할지 不知하거니와 意外에 시작한 비가 數日을 繼續하여 江水가 크게 漲溢하매 軍馬가 渡하기 不能하고 兵士中에는 出征을 喜치 아니하는 자가 多하여 中途에 逃亡하는 자가 太半이나 되었었다. 이 形勢를 살핀 李太祖는 크게 근심하여 部下 諸將과 善後策을 議하니 南誾 南在 等 諸部下가 獻策하되 <29> 우리의 弱軍으로 新興하는 明의 强國을 攻함은 餓虎의 口에 弱肉을 投함과 같은 愚計인즉 早速히 回軍하여 內政革命을 起함이 可하다 하니 太祖가 크게 기뻐하고 이에 全軍을 返하여 京都로 向하니 때에 王은 平壤에 잇다가 變을 듣고 崔瑩과 僅히 50餘旗를 率하고 蒼皇이 王宮으로 還하였다. 이에 太祖는 兵을 縱하야 王宮을 包圍하고 平素에 除코자 하던 崔瑩을 奸臣으로 몰아 刑殺하고 王을 廢하야 江華島에 放하고 (其後 江陵으로 遷하였다가 弑함) 曹敏修의 計를 聽하여 禑의 子昌을 立하였다가 (時年 僅 9세) 翌年에 또 江華에 放하여 弑하고 神宗의 7世孫 政昌君 瑤를 立하여 王을 삼으니 此가 즉 高麗最後의 君主 恭讓王이었다.
農民保護에 着眼한 그의 政策
예나 只今이나 무슨 大事業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時代 그 社會의 人心을 收拾하는 것이 通例이다. 당시 農業國인 高麗는 田制가 크게 紊亂하야 大地主의 兼倂攘奪의 弊가 多함으로 小作農民은 극히 生活이 困難하여 安堵하기 不能하고 다만 亂이 起하기를 思하였다. 그것을 洞察한 李太祖는 趙浚 等과 謀하고 먼저 田制의 改革을 企圖하였었다. 그러나 時勢民情을 不知하는 朝臣中에는 此를 反對하는 자가 多함으로 太祖는 極力 主張하여 甚至於反對者 曹敏修는 竄逐까지 하고 恭讓王 9월에 遂히 田制를 크게 改革하니 人民이 모도 太祖의 德을 謳歌하고 또 當時 民間에는 「木子爲王」이라는 讖言이 流行하여 일반의 人心이 太祖로 歸順함이 多한 中 猛虎有翼과 가티 趙浚, 南誾, 鄭道傳, 河崙, 裵克廉, 趙仁沃, 趙璞 等 50餘 文武官이 모두 太祖를 推戴코자 하니 革命의 氣雰은 漸次 滿都에 濃厚하게 되엿다. 그러나 한가지 忌憚되는 人物은 鄭圃隱이었다. 그는 崔都統의 死한 후로 一個 羽翼을 失하였으나 아직 德望이 朝野에 多하고 또 그의 徹底한 忠君愛國의 心은 비록 萬馬의 力이라도 능히 挽回치 못하였다. 아무리 太祖와 같은 武力은 없을지라도 그가 在世한 以上에는 王氏의 寶位를 누가 감히 覬窺치 못할 形勢이엇다. 그럼으로 太祖는 平素에 野心이 有하나 먼저 下手치 못하고 다만 時機의 到來를 企望할 뿐 이었다. 그러나 急進派인 太宗과 趙英珪 等은 먼저 鄭圃隱을 殺害하지 않으면 아니될 줄 알고 壬申 4월 初4일에 善竹橋에서 鄭圃隱을 椎殺하였다. 이 鄭圃隱의 死는 高麗王朝의 最後 悲幕인 同時에 李朝 登極宴의 祝賀砲이엿다. 同年 7월 16일에 李太祖는 上記 裵克廉, 南誾 外 諸人의 推戴에 因하여 恭讓王을 廢하고 開城 壽昌宮에서 位에 卽하니 多年 企圖하던 半島의 主權은 遂히 李氏에게 歸하고 太祖의 時年은 58세였다.(王氏 34世 凡 475年)
可憐龍孫葬魚腹
元來에 太祖는 무슨 根據잇는 名門貴族이거나 德望家 또는 學者도 아니요 一個 塞外에 漂流하던 武將으로 一時 武力에 依하여 半島의 主權을 掌握하였고 當時 開城에는 王氏의 宗族과 麗朝의 遺臣이 甚多하여 人心이 아직 舊朝를 思하는 傾向이 有함으로 此를 統治하고 維持함에 困難한 것을 覺悟하고 苦心講究하였다. 例의 封建時代의 英雄의 野心을 遺憾없이 發露하여 먼저 王族과 遺臣의 撲滅策을 實現하고 一方으로 그의 懷柔策을 採用하였다. 그는 卽位 翌月에 高麗王朝 宗廟를 撒毁하여 麻田郡에 移하고 (太祖가 王氏의 宗廟를 毁하고 其木主를 大船에 載하여 臨津江에 浮하였더니 其船이 逆浮하여 麻田縣 江上佛寺 前에 自泊함으로 太祖가 其佛像을 他處로 移한 후 木主를 安置하고 名하여 曰 崇義殿이라 하였다)
廢王 瑤는 恭讓君으로 降封하여 原州에 移하였다가 다시 杆城에 遷하고 또 王氏의 全族은 다 江華 巨濟 兩島에 分置하였다가 翌年 5월에 命을 下하여 王氏의 巨濟에 在한 자를 出陸케 하고 才藝가 有한 자를 登用할 旨를 傳하더니 3년에 至하여 東萊縣令 金可行, 鹽場官 朴仲質 등이 國家의 安危와 王氏의 運命을 密城盲人 李興茂에게 卜하다가 發覺되고 또 參贊 朴葳도<31> 關係가 有하다 고하는 者가 有함으로 此를 捕拿治罪하고 恭讓王及 其二子는 三陟으로 移遷하고 出陸한 王氏를 全部 巨濟로 復遷하더니 未幾에 謀臣의 勸誘에 依하여(刑曹及臺諫이 凡 12回 上言) 三陟에 在한 恭讓王 三父子를 絞殺하고 江華及 巨濟에 在한 王氏 一族을 다 海에 投하여 殺하고 (初에 太祖가 王氏를 殺코자 하되 罪名이 無함으로 諸王氏를 舟에 載하고 水泳 잘하는 자를 同乘케 하다가 中流에서 海中에 潛入하야 其舟底를 穿하야 모두 沈沒 溺死케 하였는데 其時에 王氏와 친한 僧이 海岸에 在하야 手를 擧하고 呼하니 그 王氏가 一聯句를 衫袖에 血書하야 海岸에 投한 바 其詩曰 一聲搖櫓滄波外借問山僧奈爾何라 云云하니 僧이 詩를 見하고 痛哭하였다)
惟獨 廢王 瑤의 弟瑀는 其女가 太祖 七男 芳蕃에게 嫁한 故로 僅히 免死하여 歸義君으로 封하고 麻田의 廟祀를 奉케 하였다. 그러나 太祖는 아직 安心하기 不能하여 遂히 令을 中外에 下하고 王氏의 餘族을 盡索하여 誅戮하고 또 麗朝의 裔가 아니므로 王姓인 者도 其母姓을 從케 하였다. (太祖가 王氏의 族譜를 按하야 王氏를 一一이 搜殺하는데 夢에 王建 太祖가 大怒하여 曰 余가 三韓을 統合하였늘 그 功을 知치 못하고 我의 子孫을 滅族함은 何故이냐. 汝家도 酷禍를 當할 日이 不遠하리라 하니 太祖가 驚覺하고 僅히 一頁에 殘在한 王氏를 免除하였는데 그후 其子三人이 被死한 後에 太祖가 後悔하였다) 그리고 또 麗朝 舊臣中 名德이 有한 자는 擧皆誅竄하니 其中 最히 酷禍를 被한 이는 車諫議原頫 (當時 所謂 四功臣 河崙, 趙英珪, 咸傳林 鄭道傳 등은 다 車門孽婿인데 太宗과 陰謀하고 松麻兩原에서 一夜에 門族 80餘人을 虐殺하고 其姻婭族戚도 다 極邊에 流竄하였다) 李牧隱의 子 種學 及其門弟 李崇仁, 禹易東先生家 등이오 其外 吉冶隱, 元天錫, 趙狷, 南乙珍 等 所謂 杜門洞 70餘人은 모두 山林에 隱遁하여 節을 守하고 開城人은 登極慶科에 不應함으로 連坐하여 幾百年 停擧를 命하고 또 太祖 自身이 北道武人 出身이오 西北의 人心이 强悍함으로 後日 子孫에게 遺虞가 있을까 恐하여 顯用을 禁하였으니 이것은 千古에 其比가 無한 惡辣政策이라 云치 않을 수 없겠다. (其實은 太宗과 謀臣輩의 做出한 일이 만큼 太祖가 直接으로 한 일은 적다)
國號 曰 朝鮮
上述함과 如히 太祖는 威壓과 懷柔의 政策으로 人心을 征服하는 同時에 萬般의 制度를 一新코자 하여 먼저 國號를 改할새 和寧, 朝鮮 兩者로 論議하다가 朝鮮이라 改하여 天下에 頒布하고 또 國都를 開城에 仍置하는 것은 統治上 여러 가지 障害가 有함을 생각하고 高麗王朝와 因緣이 最遠한 地方을 選擇하다가 公州 鷄龍山下(只今 所謂 新都) 에 地를 占하고 三年甲戌에 役을 始하였다. 그러나 水源이 不足하고 交通이 또한 不便하여 到底히 國都에 適合치 아니함으로 神夢을 托하여 中止하고 (國費만 虛費하고 工事를 中止하면 國家威信이나 人心統御에 關係가 有할가 恐하여 이에 夢에 神人이 言하되 鷄龍山은 5백년 후 鄭氏이 所都요 李氏의 都邑은 漢陽이라고 하였다고 稱托하였다) <32> 神僧 無學과 鄭道傳의 言을 從하여 (當時 河崙이 또한 漢陽에 都하기를 䟽請하였다) 卽時 漢陽에 新都를 정하여 宮闕을 成하고 冬 10월에 百官을 率하고 移都하였다. 그리고 太祖는 또 高麗의 政令及法制의 得失 沿革 등에 관한 書目을 具錄하여 群臣과 討議하고 舊官制를 倣하여 都評議使司 (掌國政) 義, 興三軍府 (掌軍政)를 置하고 또 備庫를 置하여 軍需를 供케하고 兵符의 制를 設하야 國內 國外를 勿論하고 兵符의 信이 없으면 兵을 擅動치 못하게 命하며 尙又經濟六典 (治, 藝, 敎, 政, 刑, 工典 等이니 鄭道傳 이 纂하고 河崙이 訂正함)을 纂하며, 都城을 築하고 (丙子) 外交는 明國과 修好를 함은 勿論이고 또 女眞을 招安하니 當時에 琉球及*羅等國이 風을 望하고 方物을 獻하며 來朝하였다.
然而 太祖의 政治革命은 上述과 如하거니와 社會制度上 及 敎化上 革命은 두가지로 볼 수가 있었으니 一은 佛敎를 抑壓하고 儒敎를 振興케 함이오 一은 武를 賤히 하고 文을 尙함이다. 이것은 畢竟 高麗가 佛敎와 武人으로 因하여 國家가 衰亡한 것을 鑑함에 不過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一般社會의 局面을 一大變革하는 同時에 後日 李朝가 또 儒敎와 文弱으로 하여 亡衰케하는 端緖를 啓하였다 云치 않을 수 없겠다.
誰知禍起蕭牆內
太祖는 高麗王氏의 一族과 及舊臣을 一網打盡하여 外間覬*의 患을 根滅하였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天下는 아주 泰平無事하야 龍樓에 高枕을 安히 하고 臥而治之 할 줄로 알았었다. 그러나 登極한지 未久에 禍가 蕭牆의 內에 起하야 骨肉相爭의 悲慘한 劇을 演出하였다. 원래 太祖는 八人의 王子가 있었으니 六人 (鎭安大君 芳雨, 永安大君 芳果 (定宗), 益安大君 芳毅, 懷安大君 芳幹, 靖安大君 芳遠 (太宗), 德安大君 芳衍) 은 神毅王后 韓氏의 所生이오 撫安大君 芳蕃 及 宜安大君 芳碩 兩人은 神德王后 康氏의 所生이엿다. 然而 太祖卽位初에 功臣 裵克廉, 趙浚, 鄭道傳 등이 世子冊封하기를 䟽請한 바 克廉等은 靖安大君이 開國의 功이 有함으로 그를 世子로 封하기를 主張하였으나 太祖는 芳蕃에게 意가 在함으로 卽時決定치 못하다가 君臣이 屢次相議한 結果 遂히 末子 芳碩으로 世子를 確定하니 諸王子의 不平이 勿論 多大하였었다. 何時던지 見機趨勢를 能事로 知하는 鄭道傳, 南誾의 徒는 忽然히 芳碩에게 附隨하고 其承位를 安全케 하기 위하야 諸王子를 除却하랴고 明國의 諸皇子封土의 例와 가티 諸王子를 各道로 分封할 事를 請하였었다.
그러나 太祖가 聽치 아니함으로 다시 最後의 陰謀를 하야 7년 戊寅 8월에 太祖가 病席에 있음을 奇貨로 思하고 殿門內外에 兵士를 埋伏하고 諸王子를 召하여 殺害하기로 計劃하였었다. 然而 其黨 李茂潛이 變을 告하매 太宗은 卽時 趙浚, 金士衡과 相議한 후 武士를 親率하고 道傳及 誾과 卞仲良家를 襲하여 三人及其黨數十人을 軍前에 斬殺한 후 翌朝에 趙浚 등이 百官을 率하고 (其時 左政丞) 太祖에게 鄭南 等의 罪를 告하고 또 世子改封할 事를 强請하니 太祖가 不得已 此를 允許함으로 諸臣은 <33> 이에 太宗으로 世子를 推戴하였다. 그러나 그는 固辭함으로 因하여 永安大君으로 遂히 世子를 封하고 또 太宗 及 諸臣은 다시 太祖에게 芳碩 芳蕃의 出外를 强請하여 路上에서 擊殺하니 翌月에 太祖는 遂히 定宗에게 禪位하고 其後 定宗 2년에는 知中樞 朴苞와 懷安大君 芳幹이 太宗에게 不平을 抱하고 亂을 起하다가 또 被誅하니 此는 李朝開國後 初有의 骨肉慘變이었다.
所謂 咸興差使
芳碩 傍蕃 等 兩愛子가 非命에 死하고 또 繼하야 芳幹이 死하매 太祖의 太宗에 對한 惡感은 實로 極度에 達하여 一日이라도 安過하기 不能함으로 (又芳碩의 同腹妹 慶順公主의 夫興安君 李濟가 芳碩의 亂에 連坐되어 被死하였으므로 太祖가 親히 公主의 髮을 削하고 (尼가 되라고) *然이 流涕하였다) 位를 禪하는 卽時에 金剛山으로 往하였다가 다시 安邊에 移하더니 其後 太宗元年 3월에 또 新都漢陽으로 歸하였다. (太祖 3년에 漢陽에 遷都하였다가 太宗元年에 舊都開城으로 還하매 太祖는 遊覽한다 稱하고 金剛山에 往하였다가 遂히 安邊에서 留하여 屢月이 되도록 還宮치 아니하니 太宗이 都承旨 朴錫命을 遣하여 還宮을 請하되 聽치 아니하다가 諸臣의 極勸에 의하여 强히 歸宮하였다) 그러나 平生의 怨恨을 抱하 李太祖는 恒常 鬱悒不平하더니 太宗 2년 11월 야에 飄然히 王宮을 떠나 楊州 逍遙山에 가서 別殿을 設하고 居留하다가 다시 咸興本宮으로 갔었다. 그때에 太宗은 太祖의 問安使를 屢次 送하였으나 다 太祖에게 被殺하고 生還치 못하니 世에 仍히 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겨서 至今까지 消息없는 사람을 가르쳐서 咸興差使라고 한다.
其時 問安使로 往한 人中 著名한 이는 成獨谷璘과 朴忠愍淳과 神僧 無學 등이니 成璘은 白馬布衫으로 過客의 行色을 하고 本宮附近에 가서 飯을 炊하였더니 太祖가 望見하고 宦官을 送하여 來故를 問하니 璘이 答하되 私事가 有하여 來하였다가 日이 暮하야 滯宿한다 하였더니 太祖가 疑치 아니하고 召하여 見하니 璘이 從容이 倫處變의 道를 陳함으로 太祖가 變色하고 怒하여 曰 汝가 汝主를 杜護함이 아니냐고 하니 璘이 曰하되 臣이 만일 그러하면 臣의 子孫이 반듯이 目이 盲하리라 하니 太祖가 信하고 其言을 聽하야 意를 回하였다. (其後 璘의 長子 至道가 盲目하고 至道의 子 舊壽及其孫이 다 盲目하고 次道는 또한 無子하니 世人이 言讖이라 稱하였다)
又知中樞 朴淳(陰城人) 은 子母의 馬가 相離哀鳴함과 子母의 鼠가 相抱墮死하는 事로 諷勸하여 太祖의 回都할 允許를 得하고 歸하는데 太祖의 近臣이 또 淳을 殺하기를 請하니 太祖가 이에 人에게 釰을 賜하고 曰하되 淳이 만일 龍興江을 渡하였거던 追치말고 渡치 아니하였거던 殺하라 하니 이것은 太祖가 대개 朴淳이 이미 江을 渡하였을줄로 推測하고 한 일이었다.
그러나 使者가 追한 즉 淳은 僅히 江을 渡하는 지라 使者가 急히 舟를 停케하고 其腰를 斬하니 淳이 死에 臨하여 一句의 詩를 吟하여 曰 半在江中半在船이라 하였다. 後에 太宗은 畵工으로 其像을 畵하야 御前에 置하고 其妻 任氏는 訃를 聞하고 自刎하야 死하였다. <34>
그리고 또 無學은 初에 太祖를 보고 數十日을 두고 太宗의 罪惡을 極言하니 太祖가 信함으로 其機를 乘하여 다시 言하되 太宗이 罪過가 有함은 事實이나 殿下의 愛子가 다 죽고 但히 有爲의 人物이라고는 太宗뿐이니 그까지 마주 棄遠하면 殿下平生에 辛苦한 大業을 將次 誰에게 托하리요 하였더니 太祖가 遂히 悔하야 還都하였다 한다.
然而 太祖가 歸還하는 日에 太宗이 郊外에 往하여 迎할새 河崙이 上啓하되 太上皇의 怒가 아직 全然 氷解치 아니한 以上에는 安心할 수 없으니 遮日의 高柱를 大木으로 하여 避身하는 萬一의 備를 하라 하니 太宗이 其言을 採用하고 冕服으로 太祖를 迎謁하니 太祖가 一見하고 果然 怒氣가 大發하여 彤弓白羽箭으로 太宗을 射함으로 太宗이 卽時 避身하야 高柱에 隱하니 太祖가 遂히 弓을 投하고 歎하여 曰 天意는 어찌 할 수 없다 하고 父子相抱하고 泣하였다.
이에 先하여 太祖가 咸興에 歸하였을 時에 故舊父老가 牛酒를 持하고 來賀하매 太祖는 卽席에서 詩 一首를 하여 諸老에게 與하였으니 其詩에 曰
「休道騰鱗北海間, 莫言今日錦衣還. 我行不是歌豊沛却愧明皇蜀道難.」
琴基洞前逢佳人
이것은 太祖 少年時代의 일이었다. 太祖는 元來 豪俠不凡함으로 幼時로부터 兒童과 遊戱하되 軍伍를 作하고 自己가 大將이 되어 群兒를 號令指揮하니 衆人이 다 非凡히 思하였다. 그가 十五六歲때였다. 그는 樵童과 같이 날마다 남의 森林을 樵伐하기로 일삼았었다. 그런데 그것도 亦是 自己가 先導가 되고 群童中 命令에 不服하는 자가 있으면 處罰을 斷行하니 群兒가 모다 慴伏하였었다. 그런데 一日은 群牧과 約束하되 明日은 某富豪家의 山林을 樵伐할 터이니 約束時間에 來치 아니하면 首를 斬한다 하니 群兒가 應諾을 하고 往하였다. 그러나 그 翌日에 一兒가 遲叅함으로 그는 其兒의 首를 지개에 懸하고 斬殺하니 群兒가 다 驚走하고 그도 또한 罪를 避하야 逃走하였었다. 이리저리 隱避하다가 一日은 安邊郡 琴基洞 (今 高山驛 南方) 에 至하니 때는 마츰 夏月이라 日氣가 甚熱하고 口가 渴함으로 路傍에서 汲水하는 處女에게 水를 請한 즉 그 處女가 水를 與하되 柳葉을 入하야 與하니 太祖는 口渴한 판이라 아무 말도 아니하고 먹었으나 다시 생각한 즉 異常도 하고 괘심도 하여 責하는 말이 이미 人에게 水를 給하면서 어찌 柳葉을 入하야 不潔케하여 주느냐하니 그 處女는 答하되 당신의 形色을 본즉 急히 逃避하는 사람과 같고 또 極熱한 時에 冷水를 急히 飮하면 病이 生할가 恐하여 柳葉을 入하여 不潔을 吹棄하는 동안에 喘息을 休케하느라고 그리 하였다 하니 太祖가 크게 놀라고 敬服하야 遂히 其家에 往하야 數日을 留宿하고 彼此婚姻을 結하였으니 此가 卽 安川府院君 韓卿의 女神懿皇后엿다. <35>
萬家鷄一時鳴
이것도 역시 太祖의 微時의 일이었다. 太祖는 安邊 어떤 村家에서 留宿하는데 夢에 人家에 入하여 三椽을 負出하고 또 萬家의 鷄가 一時에 鳴하며 舂杆의 聲이 四隣을 動하고 鏡이 破하고 花가 落하는 것을 보고 主婆에게 言하니 主婆가 言하되 이것은 極히 貴夢인즉 秘密에 付하고 雪峯山에 가서 異僧에게 問하라 하니 太祖가 其言과 如히 雪峯山에 가서 僧 無學에게 問한즉 僧이 答하되 三椽을 負함은 王字요 鷄聲은 高貴位니 王位에 登할지요 舂聲은 德加東이니 德을 東方에 펼치며 花落成實하고 鏡破有聲이니 當然히 朝鮮의 君王이 될 吉兆라 하니 太祖가 心獨喜自負하여 이로부터 無學을 師로 事하고 後日 登極後에 그 紀念으로 雪峯山에 釋王寺를 創建하였다 한다.
李之蘭과 李太祖
李之蘭의 本姓名은 佟豆蘭이니 女眞部落에 世居하다가(岳武穆後裔云) 元末에 亂을 避하야 北靑에 移住하였었다. 그도 역시 太祖와 같이 少時부터 騎射를 잘 하였었는데 出獵하다가 太祖와 相遇하고 一見에 心을 許하여 日로 交遊하였다. 太祖와 그가 咸興에 在할 時에 서로 射를 試하기 위하여 村家婦女의 汲水하는 것을 보고 太祖는 其盆을 射中하고 之蘭은 其水가 出하기 前에 泥丸을 射하여 補充하니 人이 다 歎服하였다. 그러나 之蘭은 恒常 太祖를 猜忌하여 害코자 하였으므로 一日은 太祖가 便所에 往함을 見하고 之蘭이 三矢를 連射하였더니 太祖가 그 三矢를 다 手에 持하고 泰然히 笑하여 曰 丈夫가 무슨 小兒의 作戱를 하느냐 하니 之蘭이 크게 敬服하야 다시는 異心을 두지않고 死生의 誼를 結하고 太祖의 南征北伐할 時에 恒常同往하여 大功을 成하였었다. 其後 太祖登極後에 그는 職을 辭하고 髮을 祝하여 僧이 되고 世上의 功名을 斷絶할 意를 示하니 太祖가 安心하고 諸功臣中에 獨히 之蘭이 禍를 免하였다. <36> <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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