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 초동/수송동/고덕동
[서울신문]|1994-05-29|17면 |사회|기획,연재
◎초동/왕자의 난때 방원진압군 싸운 곳/◎수송동/정도전이 이름 붙였던 수진방서 유래/◎고덕동/“두 임금 못 섬긴다” 충신 이양중이 은거조선시대는 선비정신이 최고의 덕목으로 꼽히는 사회였다. 뜻을 세우면 목숨을 걸고 그 뜻을 관철시키는 선비정신은 충절이나 명현으로 칭송받기도 했고 때로는 멸문지화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수송동은 1914년 수동과 송현동이 합해지면서 수자와 송자를 따서 붙여진 땅이름이다. 송현동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고갯 마루라해서 지어진 이름이고 수동은 바로 조선왕조의 실세 정도전이 붙였다고 전해진다. 정도전은 지금의 종로구청과 교통센터가 들어선 곳에 집을 짓고 「당대에 집주인은 오래 장수할 것이요 백자천손이 번창할 자리」라는 뜻으로 수진방이라고 동네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경복궁의 좌향을 놓고 논쟁 끝에 무학대사를 물리칠 만큼 풍수지리에도 높은 식견을 가졌던 정도전도 자기 운명앞에서는 삼척동자였다. 서울정도 5년만인 태조 7년(1398년) 세자책봉을 놓고 조선왕조는 첫번째 혈전을 벌이게 됐다. 충직한 신하였던 정도전은 이태조의 명에 따라 후궁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지지하려다 방석등과 함께 방원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정도전이 터를 잡고 이름까지 붙였던 「정도전터」는 그가 역적으로 몰리자 수만필의 말을 길러내는 사복시터로 전락하고 만다.
근래 수송국민학교가 들어서 미래의 꿈나무들을 배출하면서「백자천손이 번창할 자리」라는 정도전의 예언을 이어 가는듯 했으나 결국 종로구청과 교통센터가 차지해 버렸으니 그의 예언 역시 별것이 아니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정도전의 죽음은 또 하나의 땅이름을 지었다. 방원이 사병을 일으켜 두명의 이복동생과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등을 살해하자 태조는 펄쩍펄쩍 뛰었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제 동생을 둘씩이나 죽이고 개국공신을 살해하면서까지 왕위를 노리는 정안군(정안군 방원)를 살려둘 수 없다. 당장 잡아들이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왕위를 노렸던 방원이었지만 처음에는 아버지 군대에 차마 맞서 싸우지 못했다. 광화문에서부터 뒷걸음질 치다 지금의 스카라극장까지 밀리게 됐다.막다른 골목에 이른 방원은 결국 칼을 빼 부왕의 군대와 첫 싸움을 벌였다. 그때부터 이곳은 「처음 싸움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초전골이라고 불렸다. 그후 백성들은 초자를 풀초자로 바꿔 불러 지금의 초동에 이르렀다.
똑같은 옹고집도 때를 잘 만나면 두고두고 칭송거리가 된다. 역시 이태조와 태종연간의 일이다. 방원과 절친한 친구이면서 고려왕조에서 형조참의까지 지낸 이양중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이양중은 방원과 그의 아버지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지금의 고덕동의 농촌으로 은거해 버렸다.
왕위에 오른 방원은 옛 우정으로 이양중을 불러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에 임명하려 했다. 태종이 친히 고덕동에까지 나가 밤새도록 술잔을 나누며 우정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지만 불사이군을 고집한 이양중은 태종의 청을 끝내 거절했다.
왕명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으니 트집을 잡자면 혼 줄이 났으련만 태종은 이양중의 뜻과 덕이 높다고 칭송하고 그의 아들을 불러 높은 벼슬을 제수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양중이 은거했던 일대를 고덕리 혹은 고더기로 불리다가 뒤에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고덕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정인학기자/서울신문>
'산운종중 > 유물,유적 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春香이는 정말 美人이었더냐 (0) | 2011.03.28 |
---|---|
成桂골과 李太祖 (0) | 2011.03.20 |
중구(中區) 초동(草洞) (0) | 2011.03.17 |
형제(兄弟) (0) | 2011.03.01 |
발해의 온돌방 (0) | 2011.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