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生六臣)
단종 복위(復位) 기도사건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통칭하는 것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92)이 쓴 '육신전(六臣傳)'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효온은 대과(大科)에 응시하라는 말에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이 복위되면 응시하겠다면서 거부했고,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육신전'을 펴냈다.
단종이 죽임을 당했을 때(1457) 세 살이었던 그가 '육신전'을 펴낼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이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생전에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수양대군을 항우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썼는데, 연산군 4년(1498) 그의 제자였던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이를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며 '성종실록'에 실으려고 하다가 발생한 것이 무오사화이다. 남효온이 왜 여섯 명만을 추렸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후량(後梁)을 세운 주전충(朱全忠)에게 죽임을 당한 좌복야(左僕射) 배추(裴樞) 등 여섯 명의 사적이 '신오대사(新五代史)' 당육신전(唐六臣傳)에 실려 있는 것에 착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문집인 '매월당집' 유적수보(遺蹟搜補)에는 "삼각산에서 공부하던 김시습이 단종의 손위(遜位) 소식을 듣자 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지 3일 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미친 듯 더러운 곳간에 빠졌다가 그곳에서 도망하여 승려가 되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남효온의 '육신전'에 실린 '성삼문·하위지·박팽년·유응부·이개·유성원'은 정조 15년(1791)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울 때 육신(六臣)으로 추향됨으로써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 또한 '남효온·김시습·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 등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도 동시에 장릉에 추향되었다.
사육신은 죽음으로 세조에게 항거한 충신들이고 생육신은 벼슬을 버리거나 과거를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버리며 부당한 세상에 맞섰던 충신들이다. 공천 싸움 합리화에 끌어들여도 좋은 인생들이 아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입력 : 2008.03.27
'산운종중 > 조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조 오백년 야사 ① (0) | 2011.03.17 |
---|---|
朝鮮蓄妾史 (0) | 2011.03.05 |
권력(權力)과 인생(人生) (0) | 2011.03.01 |
천재 시인 부부의 슬픈 사랑 (0) | 2011.02.22 |
『양아록(養兒錄)』, 16세기 할아버지가 쓴 손자 양육 일기 (0) | 2011.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