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양아록(養兒錄)』, 16세기 할아버지가 쓴 손자 양육 일기

hellofine 2011. 2. 8. 00:05

『양아록(養兒錄)』16세기 할아버지가 쓴 손자 양육 일기

 

할아버지가 쓴 손자 양육일기. 현대에도 그리 흔하지 않은 일 같은데, 조선시대에 이 일기를 쓴 인물이 있었다. 이문건(李文健 1494~1567)이 그 주인공이다. 이문건은 16세기 중종, 명종 시대를 살아간 관료, 학자였다. 본관은 성주, 호는 묵재(默齋)이다. 이문건 집안은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갔지만 16세기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몰락해가고 있었다. 이문건에게는 가정적인 불운도 겹쳤다. 23세가 되던 해에 안동 김씨 김언묵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아이들은 대부분 천연두(마마) 등의 병으로 불구가 되거나 일찍 사망하였다. 유일하게 장성한 아들이 둘째 아들 온(熅)이었다. 하나 뿐인 아들에 대한 이문건의 애정과 기대는 컸다. 하지만 온 역시 어릴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문건은 모자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 유배의 길에 있었고, 자식 복은 지지리도 없었던 이문건에게 희망의 빛이 찾아 들었다. 1551년 1월 5일 아들 온이 그렇게 고대하던 손자를 낳은 것이다. 58세에 본 2대 독자 손자.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였다. 이문건은 손자가 처음 태어난 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리는 생생하여 과연 궁함이 없다더니 어리석은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풍이 이어졌다. 선령이 지하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뒤의 일들이 모두 잘 될 것 같다. 오늘 저 어린 손자를 기쁘게 바라보며, 노년에 내가 아이 크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귀양살이 쓸쓸하던 터에 좋은 일이 펼쳐져 나 혼자 술을 따르며 경축을 한다. 초 8일에 쓴다.[天理生生果未窮 癡兒得尹繼家風 先靈地下應多助 後事人間庶小豊 今日喜看渠赤子 暮年思見爾成童 謫居蕭索飜舒泰 自酌春醪慶老翁 初八日作]」

 

이제 이문건의 모든 관심은 손자에게 향했다. 아이가 차츰 일어서고, 이빨이 나고 걷기 시작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문건은 손자의 이 모든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쓴 손자의 육아일기 『양야록』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이문건은 일기를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을 반드시 기록할 것은 없지만 기록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없어서이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고자 하나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다.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독하게 홀로 거처한다.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중략 …… 겸하여 습좌(앉는 법을 배우는 것), 생치(이가 생기는 것), 포복(기어가는 것) 등의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면 글로나마 아마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이다. 가정 30년 신해(1551년) 중추 하현에 이문건이 귀양지에서 기록한다.[養兒不必有錄 錄之者 以吾無事也 老年居謫 儔侶旣寡 謀生計拙 不營産業 妻復還鄕 塊然獨處 唯見孫兒戱嬉 以度日晷……兼記習坐生齒匍匐等 短句于後 以寓眷戀之意焉 兒若長成 有見乎此 庶得祖先之心於文字上矣 嘉靖三十年辛亥歲 中秋下弦 默齋(休叟) 星山李文健(子發) 寓謫舍書]」

 

 

 

▶이문건_양아록

 

손자의 출생은 귀양살이와 연이은 가족사의 불운에서 오는 이문건의 좌절감을 일거에 씻어줄 수 있는 가뭄 속의 단비였다. 이문건은 귀양살이 중에 손자가 자라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이 모습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손자가 자라나면서 할아버지의 실망이 커졌다. 이문건은 심한 경우 매를 대기도 했다.

 

「가정 기미년(1559년) 3월 13일 아이가 학문을 익히지 않아 앞에 앉게 하고 꾸짖었다. 또 살펴서 듣지 않았다. 잠시 후에 일어나서 나가더니 아이들과 동문 밖에서 어울렸다. 곧 여종을 보내 불러들이게 했다. 뒤쪽 사립문 밖에 와서 끌어당겨도 들어오지 않아 성난 목소리로 불렀다. 한참 뒤 나는 아랫집에 있다가 그 불손함에 화가 나서 친히 나가 데리고 들어왔다. 들어올 때 그 머리통을 다섯 번 손으로 때렸다. 들어와 창가에 서게 하고 손바닥으로 그 볼기를 네 번 때렸다. 엎드려 우니 곧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嘉靖己未 暮春十三日 兒不習業 使坐于前 責之 亦不省廳 頃然起出 與兒半 投東門外 卽遣婢招之 來後扉外 曳不入來 勵聲號之 良久 吾方在下家 怒其不遜 親出 領入來 入來時 指打其頭後五 入置囪 肉掌打其臀四下 伏而泣之 旋有憐心]」

 

「아이 중 누가 날마다 부지런히 독서를 하겠는가? 할아버지는 다만 네가 모든 것을 소중히 하길 바란다. 꾸짖어 나무랐지만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틈날 때마다 떼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사람을 시켜 불러오도록 하니 꾸지람을 염려하여 호령하고 끌고 들어와도 문 앞에서 들어오지 않는다. 직접 일어나 나가서 데려오며 정수리와 엉덩이를 때리자, 고개 숙이고 엎드려 울어서 내 마음도 아팠다. 때린 후 사흘째 아침에 얼굴과 눈이 부었다. 혹은 속이 메스꺼운 것인가 했으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비록 끝내 게으름을 피워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해도 타고난 운명이 이와 같다면 원망하고 탓하기 어렵다.[兒雉誰勤日讀書 翁徒望汝惜居諸 縱然叱責無由省 俟隙隨群走北西 令人招喚疑遭叱 號曳門前不入來 自起驅來毆頂臀 低頭伏泣我心哀 打後三朝面目浮 或因逆氣莫原由 雖終惰慢歸愚騃 天命如斯難怨尤]」

 

손자가 자라고 공부를 가르치면서 할아버지와의 갈등이 커졌다. 9세이던 해 늦은 봄 손자는 하라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꾸짖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나가 버렸다, 화가 난 할아버지는 직접 내려가 손자를 데려오면서 뒤통수를 다섯 대 때리고, 엉덩이를 네 대 때렸다. 10세 되던 해에는 그네 놀이에 정신이 팔린 손자에게 종아리를 쳤다. 13세부터 손자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만취해서 돌아오던 날 이문건은 가족이 모두 손자를 때리게 했다. 누이와 할머니가 열 대씩 때리게 했고, 자신은 스무 대도 넘게 매를 때렸다. 하지만 손자의 술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은 것 같다. 손자가 14세 되던 새해 첫날 이문건은 ‘늙은이가 아들 없이 손자를 의지하는데 손자 아이 지나치게 술을 탐하여 번번이 심하게 토하면서 뉘우칠 줄을 모른다. 운수가 사납고 운명이 박하니 그 한을 어떻게 감당할까’라며 손자의 음주벽에 대해 매우 마음 아파하였다. 이후에도 공부 문제, 손자의 태도 문제 등으로 할아버지와 손자의 갈등은 커졌다.

 

이문건은 『양아록』의 마지막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에서 손자에게 자주 매를 대는 자신에 대해 ‘늙은이의 포악함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듯하다.’고 반성을 하면서도,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면서 손자에 대한 야속함과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였다. ‘노옹조노탄’을 끝으로 이문건은 더 이상 『양아록』을 쓰지 않았다. 손자가 이제 장성하여, 더 이상 자신의 품속에 품을 수 없는 존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쓴이 / 신병주 2011. 2. 7. (월)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