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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타난 역대 중원정권의 동아시아 지배논리

hellofine 2011. 1. 27. 22:30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타난 역대 중원정권의 동아시아 지배논리

 

중국은 오천여 년 동안 “정치ㆍ문화ㆍ군사ㆍ경제” 등 각 분야에서 세계 여러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소위 황제국(皇帝國)으로 군림하면서 동아시아 제국을 제후국(諸侯國)으로 분류한 뒤 외형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지배했다. 중국이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패권을 상실했거나 쇠미해진 기간은, 사회주의를 국가통치 이념으로 삼은 중화인민공화국을 표방한 50여 년 동안이다. 이 기간은 중국 역사상 그들이 지배했다고 생각했던 사이(四夷)의 여러 나라들보다 모든 분야에서 낙후된 시기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중국 역대 왕조의 통치이념은 중원 권역에서 형성된 자생적 논리였다. 20세기 중엽부터 소련 등 서구에서 만들어진 신기루 같은 환상적 사회주의 통치 논리를 수입하여 광활한 중원을 통치했는데, 이로 인해 역사상 전무후무한 광대한 영토를 확실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정치적 대통합을 이룩한 반면, 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후진국으로 추락한 오욕을 겪기도 했다. 이 무렵 “한국ㆍ일본ㆍ태국ㆍ대만ㆍ월남” 등 동남아시아 제국은 수천 년간 지속된 “제후국”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중원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행복한 시대를 연출했다.

 

이로 인해 한족(漢族)은 혹독한 치욕과 굴욕감에 빠져 반 세기 동안 허둥대다가, 이렇게 추락한 원인이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였음을 깨닫고, 통치구조는 그대로 두고, 경제적 분야에 국한시켜 자본주의 체제로 대전환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주의는 서양에서 형성된 “캡탈리즘”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경제정책의 하나이며, 동남아시아 국가 중 이를 가장 능률적으로 시행한 민족이 한족(漢族)이다. 한족만큼 자본주의적 국민은 없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백성을 데리고 사회주의를 50여 년 간 실시했으니, 경제발전은 연목구어(緣木求魚)로서 낙후될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중국이 경제면에서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소위 수정주의라는 새로운 지표를 내세웠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알고 보면 이는 반 만년간 시행해 온 중원자본주의로 복귀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중원의 경제적 민족주의의 재등장임과 동시에, 그들이 수천 년간 실시했던 “중화제국주의(中華帝國主義)”의 부흥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중화제국주의는 지금 요원의 불길처럼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그 세력을 확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비하하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워했던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 이른바 사이(四夷)의 여러 나라는 앞으로 막강한 중화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중화제국주의적 패권국가로 부활한 중국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심사숙고할 시점에 와 있다.

 

중국 오천년 역사의 과반 정도는 그들이 얕보고 천시했던 사이가 창건한 왕조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사이의 호칭인 “융(戎), 흉노(匈奴), 만(蠻), 적(狄)” 등의 글자도 악의적으로 한자 가운데 가장 고약한 뜻을 지닌 것을 골라 사용했다. 이들 사이 중 한족 국가에 본의 아니게 이적행위를 자행하여 저들의 민족과 영토를 헌납한 무모한 민족이 있었는데, “몽골족”과 “여진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들은 중원을 정복하여 한동안 기고만장하여 천하를 호령하면서 통치했으나, 결과적으로 동양사 진행을 왜곡시킨 범죄적 행태를 연출했고, 그들이 가졌던 광활한 영토와 민족을 중화제국주의에 헌납하고 동화시킨 우를 범했다.

 

세계 강대국 중 제국주의의 최고 고수는 “로마”나 “앗시리아”도 아니고 “영국ㆍ미국ㆍ소련”도 아닌 “중국”이다. 중국을 제외한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논리는, 무력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이 이데올로기와 종교였다. 즉 경화된 정책을 주로 구사했다는 의미이다. 온유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종교와 이데올로기도 무력을 바탕에 깐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결국 군사적 힘의 논리로 귀결된다. 로마 등 서구열강의 제국주의가 로마제국을 제외하고 거개가 그 역년이 수백 년에 불과했던 이유도, 무력을 패권수단으로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왕조의 교체와 관계없이 중화제국주의가 수천 년간 지배권을 유지한 원인이 무엇인지, 새롭게 부흥하고 있는 중화제국주의에 즈음하여 통시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절실하다.

 

중화제국주의, 즉 팍스씨니카의 본질과 논리를 검토하고 이해하자면 수십 권의 저서로도 부족하다. 그들은 그들이 지배하고 관할하는 영역을 우선 외형적으로 “황제국”과 “제후국”으로 분류한 뒤, 중원은 황제국이고 그들 주변 사방의 제후국을 울타리 국가로 묶어놓고, 이를 사이의 지배층과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긍정하게끔 유도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소위 중원을 천하(天下)나 사해(四海)로 일컬었고, 그 통치자는 하늘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天子)라고 했으며, 황제의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사방(四方)에 위치한 제후국의 지도자를 천명을 받은 천자가 책봉(冊封)한다는 제도를 만들어 지도자와 백성을 장악코자 했다. 책봉을 외교적 승인으로 인지할 수도 있지만, 소위 제후국들은 이를 받기 위해 노심초사한 것도 사실이다.

 

동아시아에서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지도자는 중국의 황제밖에 없다는 오만한 인식과 긍지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제후국의 왕은 행할 수 없는 금기사항으로 못박았으며, 제후국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를 지켰다. 그 중에 제천을 행했던 국가도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항상 중국의 눈치를 보거나 아니면 제후 왕으로서 제천을 해서는 안된다는 죄의식을 가진 채 제사를 올렸다.

 

국가를 통치하는 근본적 경국이념(經國理念)은 정권교체(政權交替)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 소련의 외교정책은 제정러시아 때나 지금이나 큰 틀에 있어서 동일하고,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같은 전통적 국가경영의 원칙을 무시하고, 전혀 이질적인 사회주의적 혁명을 일으켜 집권한 지도자들이 통치했던 반세기 동안의 중국과 소련, 북한 등의 국가현실을 돌이켜보면, 그 폐해가 얼마나 혹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통시적으로 검정된 경국이념을 본질적으로 바꾸면 안 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한 동아시아의 선인들은, 기반이 되는 경국이념을 보존한 채 나태하고 부패한 지도자만 교체시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에다 초점을 맞춘 것이다.

 

역대 중원정권[王朝]의 동아시아 지배논리 역시 수천 년간 변하지 않았으며, 현 중화인민공화국도 이를 대체로 준수하고 있다. 중국의 동아시아 지배논리는 이처럼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했다고 느끼는 주변 국가들이나 지식인들의 오판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 역대 중원정권의 동아시아 지배 논리가 고스란히 기록된 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이 책은 서긍(徐兢 1091-1153)이 단기 3456년(1123, 인종 1년)에 북송 휘종(徽宗)의 사신으로 개성에 왔다가, 그가 접한 고려조의 문물을 항목별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그림까지 첨부하여 1124년에 조정에 바친 책으로, 12세기 고려조 문물의 제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삼국사기』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발간되었다는 사실에도 의미가 있다.

 

저자 서긍은 음률(音律)에 밝았고 회화에도 능했으며, 산수화와 인물화에도 뛰어났고 서법에도 일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필력이 기고(奇古)하다는 평을 받았다. 『고려도경』에 그림이 첨부된 것도 문장과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서긍이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려도경』은 전 40권으로 되어 있는데 필자는 이 책을 중국이 제후국을 지배하기 위한 일종의 정보문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총 40권 중 마지막 40권이 「동문(同文)」편인데, 이 안에 중원정권의 제국주의적 지배 논리의 한 단면이 수록되어 있다.

 

“동문”은 문화를 합치시킨다는 뜻으로, 동문편은 “정삭(正朔)ㆍ유학(儒學)ㆍ악률(樂律)ㆍ권량(權量)” 등 네 장절로 구성되었다. 그 중 “정삭”은 제후국의 기년(紀年)은 중국황제의 연호(年號)를 사용해야 하고, 세수(歲首)와 일자 변경의 기준 역시 중국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며, “유학”은 모든 제후국의 중심 학문은 중국처럼 유학이어야 한다는 지시가 담겨 있고, “악률”은 중국의 아악을 국가(제후국) 공식 음악으로 삼아야 하며, “권량”은 중국의 도량형 제도를 사용해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정삭”은 천하의 정치를 통합하고, “유학”은 천하의 교화(敎化)를 아름답게 완성하는 것이며, “악률”은 천하의 민심을 화합하게 하고, 도량권형(度量權衡)은 천하를 공변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서긍은 정의했다.

 

이 네 가지 절목에는 사이(四夷)를 중원문화로 순치하여 중화제국주의의 지배체계를 동아시아에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문화제국주의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 20세기에 건립된 중국 사회주의 정권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위의 전통적 제후국 지배논리를 반세기 동안 폐기시켰다.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유사 이래 후진국으로 추락하는 굴욕을 겪었다. 중원 외교책의 하나인 이이제이(以夷制夷)도 역시 폐기시켰다가, 근래에 북한[核武裝]을 축으로 하여 동아시아를 제어하려는 전통적 외교시책이 되살아난 징후로 유추되고, 미국과 중국이 이면으로 한국의 핵개발이나 장거리 미사일 보유를 반대하는 까닭도 비슷한 이유로 여겨진다.

 

『고려도경』에 제시된 위의 제후국 통치 사대 절목은, 모두 무력을 수반한 강경책이 아닌 예악(禮樂)에 기반을 둔 연수단(軟手段)이다. 무력이 약했던 송(宋)나라의 사정이 반영된 면도 있으나, 한족(漢族)은 대체로 폭압적인 무력보다 예악적(禮樂的) 방법으로 이른바 제후국을 지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 이들 절목 중 “악률”은 서양 악무에 압도되었고, “도량권형”도 서양의 미터법에 밀려났고, “정삭” 또한 서기(西紀)에 압살 당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스스로가 자체 기년[正朔]을 버리고, 서기(西紀)를 “공원(公元)”이라 하여 공식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우화 같은 현실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속단키 어려우나, 현재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중국이, 한동안 폄하했던 공자상을 천안문 광장 관내에 건립함과 동시에 “유학부흥”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현상을,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 / 이민홍

2011. 01. 26 (수)

*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