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종묘(宗廟)

hellofine 2010. 7. 30. 11:45

 

종묘(宗廟)

종묘

 

종묘는 왕의 조상들을 모신 사당이다. 한국사에서 종묘의 건립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들 시조묘도 일종의 종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제후국체제의 5묘제는 통일신라시대인 신문왕(神文王) 7년(687)에 처음으로 나타 난다. 이때 종묘에 모셔진 신주는 태조(太祖 : 味鄒王)를 위시하여 신문왕의 직계 4대인 진지왕(眞智王), 문흥대왕(文興大王 : 金龍春),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 이었다. 당시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당나라의 문물을 대거 수용하였으므로 중국식의 종묘제도도 더불어 전래되었다고 하겠다.

 

고려시대에는 성종(成宗)조에 종묘가 건축되었는데, 이 때의 묘제도 5묘제였다. 명나라에 대하여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조에 5묘의 종묘제도를 시행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신성지역 종묘 조선시대의 종묘제도는 주자의 영향을 받아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서쪽에 놓고 그 이하의 왕들을 동쪽으로 차례로 놓는 일자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왕의 신주가 종묘에 봉안될 때마다 계속 건물을 증축해야 했는데, 이 결과 종묘는 현재와 같이 길다란 일자형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종묘의 위치

태조 이성계의 종묘건립과 종법

종묘제의 과정

 

조선시대의 종묘에는 최고의 제향이 올려졌다. 이에는 일정한 시일에 올리는 정시제(定時祭)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올리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정시제는 춘하추동 4계절과 동지 뒤의 세째 술일(戌日)인 납일에 지냈다. 임시제는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마다 일의 사유를 아뢰고 올리는 고유제(告由祭)이다. 또한 계절따라 햇과일과 햇곡식이 나오면 약식 고유제를 올렸는데, 이것이 천신제(薦新祭)였다.

 

왕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납향제사와 춘하추동에 한 차례씩 올리는 4계절제를 합하여 적어도 다섯번의 정시제를 몸소 거행해야 했다.

 

신성지역 종묘

조선시대의 종묘에는 건국시조 태조 이성계의 신위를 비롯하여 조선 역대 왕들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이들 신위는 단순히 전주 이씨의 조상신이라는 위치를 넘어선다. 태조 이성계의 신위가 있는 장소는 조선을 있게 한 하늘과 그 명을 받은 초월적 존재자의 영령이 강림한 신성지역이었다.

 

즉 종묘는 조선시대에 신앙되던 최고의 신, 하늘(天)과 하늘의 대행자(王)가 모셔져 있던 국가의 신성지역인 것이었다.

 

종묘의 위치

전통시대 종묘는 왕궁의 전면 왼쪽방향에 건립되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이 건립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왼쪽이 동쪽을 상징하고 동시에 양(陽)을 상징하므로 음(陰)인 토지신을 모신 사직단에 대응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음양오행사상에 의하면 동쪽은 해가 뜨는 곳으로서 생명의 시발점을 상징한다.

 

이곳에 종묘를 설치함으로써 왕과 백성들의 생명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는 점을 과시하는 것이다.

 

종묘 건립과 종법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재위 3년 10월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해 11월에는 이성계가 몸소 종묘를 건립할 땅을 살펴 본 다음에 종묘건립을 위하여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였다.

 

다음달인 12월부터 종묘건축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완성되었다. 당시 종묘가 위치한 곳도 경복궁의 동쪽인 동부연화방(東部蓮花坊)이었다. 이때 종묘는 건국 시조와 선친부터 고조의 4대를 합친 5명의 조상신을 모시기 위해 5실(五室)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제후국의 5묘(五廟)제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종묘에 조상신을 모시는 제도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은(殷)나라 이래 친족편제원리였던 종법(宗法)을 국가로 확대하여 이른바 종법봉건제를 시행하였다. 통일제국을 달성한 진한(秦漢)이후로는 봉건제가 약화되어 갔지만, 대신 봉작제(封爵制)가 시행되어 종법은 그대로 준수되었다.

 

종법은 적장자가 아버지의 지위와 권한 및 제사권을 상속받아 친족들을 통제하는 제도였다. 적장자가 제사권을 행사하여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 종묘였다.

 

종법봉건제에서 종묘의 제도는 천자, 제후, 대부(大夫), 사(士), 일반인에 따라 각각 달랐다. 즉 천자의 경우는 7묘(七廟), 제후는 5묘(五廟), 대부는 3묘(三廟), 사는 1묘(一廟)였으며 일반인은 종묘가 없이 살림집에서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7묘는 7명의 조상신을, 5묘는 5명의 조상신을, 3묘는 3명의 조상신을 그리고 1묘는 1명의 조상신을 모신다는 의미였다.

 

천자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지위와 신분에 따라 제사대수를 구별함으로써 신분적 차별성을 정당화시키려 한 것이다.

 

 

종묘제의 과정

왕은 제사를 올리기 전에 7일간 재계를 행한다. 이 기간에는 문병이나 문상을 하지 않으며 주색을 끊고 오직 제사에 관한 일만 생각해야 한다.

 

당일에 왕은 종묘로 행차하여 제1실에 모셔진 태조의 신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제례를 올리기 시작한다. 왕이 몸소 진향(進香), 진찬(進瓚), 진폐(進幣)를 순서 대로 거행한다. 이때는 모두 보태평(保太平)의 음악을 연주하고 보태평의 춤을 추어 신을 기쁘게 한다.

 

'진향'은 하늘에 있는 혼(魂)을 불러오기 위해 향을 피우는 것인데, 세번에 걸쳐 한다.

 

'진찬'은 땅속에 있는 백(魄)을 부르기 위해 옥으로 만든 술잔에 따라 놓은 술을 땅에 붓는 의식이다. 이때 사용하는 술을 울창주(鬱 酒)라고 하였다. 울창주는 검은색 기장을 사용하여 만든 창주( 酒)에다 울금초(鬱金草)를 섞어서 제조한다. 울금초는 난초와 비슷한 향기나는 풀인데, 제사전에 이 풀을 다져가지고 세발달린 솥에 넣고 다리다가 제사 때에 이것을 창주에 섞는다. 다린 울금초를 창주에 섞은 울창주에서는 당연히 향기가 난다. 이 향내는 신성한 귀신에게 인간이 올리는 정성이라 하겠다. 보통 울창주는 맹물인 현주(玄酒)와 같이 올렸다. 향내나는 귀중한 술과 질박한 원초적 정화수를 어울러서 신에게 올리는 것이다.

 

'진폐'는 비단을 묶은 폐백(幣帛)을 신에게 예물로 올리는 의식이다.

 

다음으로 진찬(進饌)을 하는데, 천조관(薦俎官)이 제수(祭需)를 제상에 차리는 의식이다. 이것도 앞의 진향, 진찬, 진폐와 마찬가지로 제1실에서부터 차례차례로 각 실마다 차린다. 제수로는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가 사용된다.

 

다음으로 왕이 초헌관(初獻官)이 되어 제1실에서부터 차례대로 술을 올리는 예를 행한다. 이를 초헌례(初獻禮)라 하였다. 초헌례 때에도 보태평의 음악을 연주하고 보태평의 춤을 춘다. 초헌례에 사용하는 술은 예제(醴齊)였다. 예제의 예(醴)는 체(體)와 통하는 글자이다. 이는 술을 숙성시킨 후에 술찌기가 위아래에 모두 있기 때문에 체제(體齊) 또는 예제(醴齊)라 하는데, 지금의 단술과 유사하다. 이어서 고위관료 중에서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으로 선발된 사람이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를 거행한다.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의 삼헌례(三獻禮)가 끝나면 이어서 음복(飮福)을 하고 각 실에 올렸던 폐백과 축문 등을 모아서 종묘 앞의 서쪽계단 아래에 땅을 파고 묻는다.

 

여기까지가 종묘제의 대략적인 과정이다. 폐백과 축문 등을 땅에 묻는 것까지 보고 왕은 궁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해서 종묘제는 완성된다.

 

영녕전

유교지식인들은 한 개인을 그 개인만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 개인이 있기 위해서는 그에게 생명을 준 조상들이 있고, 동시에 사회적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왕이 있었다. 따라서 개인은 혼자가 아니라 그의 부모를 포함한 친족과 함께 파악된다. 개인의 영광은 가문의 영광이었고, 반대로 개인의 수치는 가문의 치욕으로 연결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의 영광과 몰락은 그의 친족집단의 영욕과 직결되었다. 개인이 역적이 되면 그의 3족은 거기에 연좌되어 멸문의 화를 입었다. 반대로 어떤 개인이 출세하면 그에 따라 그의 부모를 포함한 조상들과 자손들은 수 많은 영광과 특혜를 받았다. 그야말로 개인과 그의 친족집단은 운명공동체였던 것이다.

 

■ 삼대 추증

 

조선시대에 어떤 개인이 실직(實職) 2품이상의 고위관료가 되면 그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3대까지가 추증되었다. 즉 실직 2품이상으로 출세한 본인보다 그의 삼대 조상이 낮은 관직이나 무직인 상태로 죽었으면 후손 덕에 벼슬을 받는 것이다.

 

예컨대 실직 2품이상관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과 동등한 품계의 벼슬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손자나 증손자보다 한등급 아래 품계의 벼슬을 받았다. 만약 그 개인이 공신일 경우는 무조건 정2품의 품계를 받고, 아버지도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이런 논리는 나라를 세운 창업군주에게도 해당되었다. 천명을 받는 창업군주가 나오기 위해서는 누대에 걸친 적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개국의 영광을 조상들에게까지 확대하였다.

 

■ 종묘와 불천위

 

조선의 경우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4대조상을 추존하여 왕으로 삼았다.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桃祖), 환조(桓祖)가 그들이었다. 이들 추존 4왕은 태조 때에 건립된 종묘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런데 태종조에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자 종묘의 5묘제는 이제 가득차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조에 정종이 사망하자 정종의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 경우에는 누군가의 신주를 종묘에서 대신 옮겨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추존4왕의 첫번째인 목조의 신주를 옮기고, 그 신주를 모실 별묘(別廟)를 세우자는 쪽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결과 종묘의 서쪽에 종묘에서 옮겨온 신주를 모실 별묘로서 영녕전(永寧殿)이 세워지게 되었다. 영녕전이란 조상과 자손들이 모두 영원토록 편안하자는 의미였다.

 

따라서 영녕전은 기본적으로 종묘에서 옮겨온 왕의 신주를 모시기 위한 건물이었다. 이처럼 종묘에서 옮겨온 신주를 모시는 장소를 '조묘'라고 하였는데, '조'는 옮긴다는 의미였다. 조선은 제후국의 종묘제인 5묘제를 시행하였으므로, 논리적으로 보면 종묘에는 5명의 왕만을 모실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영녕전으로 옮겨서 모셔야 한다.

 

그러나 종묘에는 세실(世室)이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옮겨야 할 차례가 되었어도 그 왕의 공덕이 뛰어나다면 옮기지 않고 그대로 종묘에서 모시는 제도였다. 이런 왕의 신주를 불천위(不遷位)라 하였는데 이는 옮기지 않는 신주란 의미였다. 예컨대 조선시대 종묘의 불천위로는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창업군주이거나 나라를 중흥시킨 훌륭한 왕으로 평가되는 사람들이었다.

 

종묘와 영녕전의 신위

 

■ 종묘에 봉안된 신위

 

제1실 : 태조 고황제, 신의고황후 한씨, 신덕고황후 강씨

제2실 : 태종대왕, 원경왕후 민씨

제3실 : 세종대왕, 소헌왕후 심씨

제4실 : 세조대왕, 정희왕후 윤씨

제5실 : 성종대왕, 공혜왕후 한씨, 정현왕후 윤씨

제6실 : 중종대왕,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제7실 : 선조대왕,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제8실 : 인조대왕, 인렬왕후 한씨, 장렬왕후 조씨

제9실 : 효종대왕, 인선왕후 장씨

제10실 : 현종대왕, 명성왕후 김씨

제11실 : 숙종대왕, 인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제12실 : 영조대왕,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제13실 : 정조선황제, 효의선황후 김씨

제14실 : 순조숙황제, 순원숙황후 김씨

제15실 : 문조익황제, 신정익황후 조씨

제16실 : 헌종성황제, 효현성황후 홍씨

제17실 : 철종장황제, 철인장황후 김씨

제18실 : 고종태황제, 명성태황후 민씨

제19실 : 순종효황제,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 영녕전에 봉안된 신위

 

제1실 : 목조대왕, 효공왕후 이씨

제2실 : 익조대왕, 정숙왕후 최씨

제3실 : 도조대왕, 경순왕후 박씨

제4실 : 환조대왕, 의혜왕후 최씨

제5실 : 정종대왕, 정안왕후 김씨

제6실 : 문종대왕, 현덕왕후 권씨

제7실 : 단종대왕, 정순왕후 송씨

제8실 : 덕종대왕, 소혜왕후 한씨

제9실 : 예종대왕, 장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

제10실 : 인종대왕, 인서왕후 박씨

제11실 : 명종대왕, 인순왕후 심씨

제12실 : 원종대왕, 인헌왕후 구씨

제13실 : 경종대왕, 단의왕후 심씨, 선의왕후 어씨

제14실 : 진종소황제, 효순소황후 조씨

제15실 : 장조의황제, 헌경의황후 홍씨

제16실 : 의민황태자 영왕

 

고대의 시조묘

예컨대 고구려에서는 시조 고등신(高等神)을 시조묘에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백제의 경우는 시조묘에 모셔진 조상이 구태(仇台)인지 동명성왕(東明聖王)인지 이설이 있지만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를 올린 것은 분명하다.

 

신라는 2대 남해왕(南解王)이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모신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 신라왕위가 김씨에게 독점된 이후로는 박혁거세 이외에 김씨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을 신궁(神宮)에 모시고 따로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이는 왕권을 장악한 김씨집단이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를 부각시키고 종족적 결합을 강화하려는 결과였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