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간택과 정순왕후의 지혜
1. 왕실 혼례식의 첫 관문, 간택
간택은 왕실 혼례식의 첫번째 관문이었다. 왕실의 혼사에는 3차례의 간택이 실시되었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결혼의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단자(處女單子)’를 올리도록 했다. 처녀들의 나이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대개 10대 초, 중반이었다. 처녀단자를 올릴 필요가 없는 규수는 종실의 딸, 이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에 한정되었다. 또한 양친이 다 생존해 있는 처자나 세자(또는 왕 자녀)보다 2~3세 연상을 선호하였다. 왕보다 왕비(원경왕후, 정성왕후, 명성황후)가 연상인 경우가 많은 것은 왕비(왕세자빈) 후보감을 구할 때 이러한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처녀단자에는 첫 줄에 간택 처녀의 생년월일을 적었고 둘째 줄에는 간택인의 사조(四祖:부, 조, 증조, 외조)를 적었다. 서류 심사에서 처녀의 나이와 집안 배경을 고려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실의 혼사에 많은 처녀들이 단자를 올릴 것 같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았다. 처녀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대개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간택은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택에 참여하는데 큰 부담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간택의 대상이 된 규수는 의복이나 가마를 갖추어야 하는 등 간택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혹 왕실의 부인으로 간택이 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따랐기 때문에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한중록』의 다음 기록에서도 단자 제출을 망설이는 정황이 나타나 있다.
「그해에 간택단자 받는 명이 내리니 혹이 말하되 “선비 자식이 간택에 참예치 않으나 해로움이 없을지니 단자를 말라, 빈가(貧家)에 의상을 차리는 폐를 덞이 마땅하다.” 하니, 선인이 가라사대 “내 세록지신(世祿之臣)이요, 딸이 재상의 손녀니 어찌 감히 기망(欺罔)하리오.” 하시고 단자를 하시니...」
위의 기록에서 당시 간택에 참여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혜경궁의 부친인 홍봉한이 나라에서 대대로 녹을 먹은 신하이기 때문에 반드시 단자를 제출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그때 우리집이 극빈하여 새로 의상을 해 입을 수 없었으므로 치마감은 형의 혼수에 쓸 것으로 하고 옷 안은 낡은 천을 넣어 입히셨고 다른 차비는 선비께서 빚을 얻어 차리시느라고 애쓰시던 일이 눈에 암암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선비 집안에서 처녀단자를 제출하지 않는 주요 원인이 간택에 참여할 때 의복 등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가 있다.
2. 간택과 정순왕후의 지혜
1926년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이라는 야사집에는, 간택에 얽힌 정순왕후의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 있다. 1759년(영조 35) 정순왕후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66세의 왕 영조의 계비가 되었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간택은 1759년 6월 창경궁 명정전에서 거행되었고, 정순왕후는 매우 총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동기문』에는「이사관탈초구헌정순왕후(李思觀脫貂裘獻貞純王后)」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정순왕후의 간택에 얽힌 한 내용을 살펴보자.
「왕후가 십오세인 기묘년, 정성왕후의 국상이 이미 끝난 이후에, 영조가 친히 간택에 임하여 궁중에 사대부 처녀들을 모으게 했다. 정순왕후는 홀로 자리를 피하여 앉았다. 영조가 왜 자리를 피하느냐고 물었다. 왕후는 “아비 이름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감히 자리에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 대개 간택시에는 그 아버지의 이름을 방석 끝에 썼기 때문이다.[至王后十五歲己卯 貞聖王后喪期已盡 英廟親臨揀擇 聚集士大夫女子於宮中 后獨避席而坐 上聞何避也 后曰父名在此 安敢當席而坐 盖揀擇時 書其父名於方席之端故也]」
「왕이 여러 처녀에게 묻기를 “어떤 물건이 가장 깊은가?” 하자 혹은 산이 깊다 하고, 혹은 물이 깊다 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홀로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다고 하였다. 영조가 그 까닭을 묻자, “왕후는 다른 물건의 마음은 예측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조가 또 어떤 꽃이 가장 좋으냐고 물었다. 혹은 복사꽃이, 혹은 모란이, 혹은 매화가 좋다 하여 대답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았다. 왕후는 홀로 목화가 가장 좋다고 대답하였다. 영조가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다른 꽃은 일시적으로 좋지만, 오직 목화는 옷으로 천하사람들을 입혀 따뜻하게 하는 공이 있습니다.” 하였다.[上問衆女子 何物最深 或言山深 或言水深 衆論不一 后獨曰人心最深 上問其故 對后曰物心可測 人心不可測也 上又問何花最好 或言桃花 或言牧丹花 或言梅裳花 所對不一 后獨言曰棉花最好 上問其故 對曰 他花不過一時之好 惟棉花衣被天下 有溫煖之功也]」
「이때 마침 큰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영조가 “능히 월랑의 기와 수를 셀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모두 손가락으로 1, 2, 3, 4를 셌다. 왕후는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다가 “몇 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영조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로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영조가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 다음날 아침에 채색의 무지개가 궁궐 안에서 일어나 정순왕후가 세수하는 그릇으로 들어가니 왕후의 덕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간택하여 왕비로 삼았다.[時適雨下滂沱 上曰能數月廊瓦行也 皆以手指數一二三四 后低頭況默而坐 對曰其行也 上曰何以知之 以數簷溜故 知之也 上瞿然異之 其翌朝 彩虹自闕中起 揷於后盥洗器 以其有后之德 特揀正宮]」
▶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중 부분(한국고전번역원 국역 가례도감의궤 인용)
이상의 기록에서는 간택을 받은 자리에서 당당하고 총명했던 정순왕후의 지혜가 돋보인다. 정순왕후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추상같은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왕비로 간택된 후 왕비에 걸맞는 의복을 맞추기 위해 치수를 재는 여관(女官)과의 아래 일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장차 입궁하려 할 때에 여관이 의복을 짓기 위해서 정순왕후에게 돌아서 앉아줄 것을 청하였다. 왕후가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돌아서 앉을 수는 없는가?” 하니, 여관이 매우 황공해하였다.[將入宮之時 女官欲爲衣樣 請后回坐 后正色曰 爾不能回坐乎 女官惶恐)」
15세의 어린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지혜롭고 어른스러웠지만, 자신의 의사 표현에서는 추상같은 면모를 보였던 정순왕후. 이처럼 강단이 있는 여성이었기에, 정순왕후는 19세기 순조 즉위 직후 수렴청정의 중심에 서서 폭풍 정국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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