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9-10년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太宗 9-10年 篇>
요약 : 의안대군(義安大君)과 관련한 실록
55 태종 9년 기축(1409) 4월 9일 (신사)
의안 대군 이화의 과전을 선처와 후처의 자녀에게 반씩 나누게 하다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과전(科田)을 나누어, 반은 그 선처(先妻)에게 주고, 반은 그 자녀(子女)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화의 선처(先妻) 아들 완성군(完城君) 이지숭(李之崇)과 후실(後室) 아들 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 등이 그 아비의 과전(科田)을 다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원전】 1 집 481 면
【분류】 *농업-전제(田制) / *가족(家族)
56 태종 9년 기축(1409) 10월 1일 (기해)
대신 및 3공신 등을 불러 이무의 과거 행적을 말하고 죄를 의논하다
임금이 정전(正殿)에 좌기(坐起)하여 의정부(議政府) 3공신(三功臣)을 불러 전(殿)에 오르게 하고, 이무(李茂)의 죄를 의논하였다. 이무를 불러 진선문(進善門) 밖에 두고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일렀다.
“이무가 지금 옥중에 갇혀 있는데, 경들이 어찌 다 그 까닭을 알겠는가? 내가 신료(臣僚)들을 다 불러서 이를 알려주고 싶으나 사세(事勢)가 그렇지 못하니, 경들은 밝게 내 말을 들으라. 무인년에 부왕(父王)의 병환이 위독하여 오래 끌 때에, 내가 형제(兄弟)들과 더불어 경복궁(景福宮)에서 시병(侍病)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이무(李茂)의 이름만 들었을 뿐이지 서로 친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에 이무가 민무질(閔無疾)을 통하여 나에게 교분을 맺었다. 하루는 내게 고하기를,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주상(主上)의 병환이 위독한 것을 엿보아 정적(正嫡)에게 불리(不利)하게 하기를 꾀하니, 공(公)은 미리 도모(圖謀)하라.’ 하였다. 5, 6일 뒤에 다시 와서 내게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 정도전 등이 거사(擧事)하려고 하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그들이 모인 곳에 가서 그 계획을 늦추도록 하라.’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의안 대군(義安大君)이 궐내(闕內)에 들어와 나를 부르기를 두 번이나 하였는데, 그때에 날이 이미 어두웠었다. 대군(大君)과 여러 형제(兄弟)들이 내가 오기를 매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니, 중관(中官) 윤귀(尹貴)가 안에서 나와서 ‘정안군(靖安君)이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왔다.’고 하니, 윤귀가 급히 제군(諸君)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때 흥안군(興安君)이 내 신[靴]을 발로 차며 ‘빨리 들어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무(李茂)의 말을 듣고 본래 의심하고 있었는데, 사변(事變)이 이상함을 보고, 변소에 간다고 핑계하고 드디어 도망해 나왔다. 여러 형제들도 또한 안에서 달려 나와 변(變)을 고하였다. 드디어 함께 정도전(鄭道傳)이 모여 있는 곳에 갔는데, 길에서 10여 인이 모여 있는 것을 만났다. 마천목(馬天牧)이 쏘라고 청하여, 화살 네다섯 대를 쏘고 모인 곳에 들어가니, 정도전 등이 이미 도망하였다. 이에 마음이 놀라고 두려웠었는데, 혜비댁(惠妃宅) 문앞에 이르러 이무(李茂)와 박포(朴苞)를 만났다. 이무가 말하기를, ‘어째서 약속을 어기었소? 내가 화살을 맞았소!’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미 군중(軍中)에 영(令)을 내려 「이무와 박포의 이름을 들으면 쏘지 말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외치기를 「나는 이무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 박포를 시켜 조준(趙浚)을 청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밤은 거의 새벽이 다되고 군사는 또 약하였다. 조금 뒤에 박포가 이르러 말하기를, ‘조준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친히 가서 청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군(諸君)들이 나를 매우 의지하기 때문에 나를 놓아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이무를 거느리고 조준의 집에 갔는데, 연화동(蓮花洞) 입구에 이르러 조준과 김사형(金士衡)을 만났다. 이들 두 공(公)이 그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 따르는 자가 또한 많았다. 내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박하니 말에 내려 예(禮)를 하지 말라.’ 하고, 곧 정승(政丞)의 앞에 서서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이 바로 경각(頃刻)에 있으니, 바라건대 두 정승은 도모하시오.’ 하고, 드디어 운종가(雲從街)에 모여 앉았다. 이때에 박위(朴葳)가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궐내(闕內)에 있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내 군사가 오히려 이보다 적었었다. 이무가 내 뒤에 있었는데, 나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거짓 말 위에 엎디어 내게 말하기를, ‘정신이 황홀(怳惚)하니 군(君)은 나를 구제해 주시오.’ 하였다. 내가 급히 반당(伴儻)을 시켜 이를 부축해 말에서 내려놓게 하였다. 조금 뒤에 조온(趙溫)과 이지란(李之蘭)이 궐내(闕內)에서 도착하여 붙좇는 자[附者]가 매우 많아졌다. 이무가 곧 다시 왔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병이 급한데 왜 갑자기 왔는가?’하니, 이무가 말하기를, ‘장물[奬水]을 마셨더니 곧 나왔다.’고 하였으니, 이무가 중립을 지키며 변(變)을 관망하고 두 가지 마음을 품은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 것이다. 정사(定社)한 뒤에 칠재(七宰)에 있던 것을 사재(四宰)로 초천(超遷)해 주었고, 녹공(錄功)을 행할 때에 한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무가 무슨 공이 있느냐?’고 하였으나, 내가 그 체력과 풍채가 볼 만하기 때문에 드디어 듣지 않았다. 뒤에 또한 나타난 큰 허물이 없기 때문에 드디어 정승(政丞)에 이르렀다. 임오년에 내가 종기[瘡]가 나서 매우 위독하니, 민씨(閔氏) 네 형제(兄弟)와 신극례(辛克禮)가 민씨의 사가(私家)에 모여 약한 자식을 세우자고 의논하였는데, 그 꾀가 실상은 이무에게서 나왔다.
정해년에 세자(世子)가 〈명나라에〉 조현(朝見)할 적에 내가 이를 명하여 보행(輔行)을 삼았는데, 이무가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의 집에 가서 민무질(閔無疾)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대가 아는 바이다. 지금 도리어 세자(世子)의 시종관(侍從官)이 되었으니, 그대의 곤제(昆弟)와 함께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뵙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세자(世子)는 영기(英氣)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니, 원컨대, 주상께서는 교회(敎誨)하소서.’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우건(右件)의 사목(事目)이 한 대언(代言)만으로는 다 기억할 수 없으니, 공신(功臣) 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과 의원군(義原君) 황거정(黃居正)·참지(參知) 황희(黃喜)·지신사(知申事) 안등(安騰)은 모두 함께 가서 힐문(詰問)하라.”
이무(李茂)가 고두(叩頭)하며 말하기를,
“무인년의 일은 정말 정신(精神)이 황홀(怳惚)하여 말에서 떨어졌다가, 장물[奬水]을 마시고 조금 나았으므로 억지로 일어난 것이지, 실로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회의(會議)한 일과 주상(主上)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실로 없었던 일입니다. 세자(世子)가 영기(英氣)가 있다고 한 말은 세자가 성색(聲色)에 빠질까 두려웠기 때문에 상달(上達)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이무의 말과 같다면 도리어 내 말을 허망(虛妄)하다 한 것이다.”
하니, 조영무(趙英茂)가 말하기를,
“신 등이 일찍이 무인년의 변(變)에 참여하였지만, 이무의 용심(用心)이 이와 같은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이원(李原) 등을 시켜 이무에게 힐문하기를,
“경의 아내가 경의 말로 송씨(宋氏)에게 고하기를, ‘나를 보전(保全)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성(驪城)이 한 말은, 주상(主上)이 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중궁(中宮)의 질투로 인하여 화(禍)에 미칠까 두렵다는 것이었는데, 안성군(安城君)이 잘못 주상께 아뢰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민무질의 죄를 가리려고 한 것이니, 이것도 또한 거짓인가?”
하니, 이무가 말하기를,
“신의 처가 잘못 전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전에 숨긴 일을 인증(引證)하는 것이다.”
하고, 또 민무질(閔無疾)을 불러 ‘주상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말을 대질시키니, 이무가 머리를 수그리고 대답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이무를 다시 순금사(巡禁司)에 가두었다. 임금이 공신(功臣)에게 이르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공신(功臣)을 보전(保全)하지 못하고, 광무(光武)는 능히 보전하였는데, 이것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다. 지금 내가 날마다 〈공신들을〉 보전 하고자 생각하고 있는데,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
하니, 조영무(趙英茂)가 대답하기를,
“이 같은 불충한 신하를 보전하고자 생각하여 대의(大義)로 결단(決斷)하지 않으면 어떻게 후일을 징계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죄를 밝게 바루소서.”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자고(自古)로 대신(大臣)은 사사(賜死)하는 것이지 육욕(戮辱)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예전에 정도왕(定陶王)이 죽었는데 성제(成帝)가 대단히 슬퍼하였다. 내가 이무(李茂)로 세자(世子)의 시종(侍從)을 삼은 것은 다만 보도(輔導)를 위한 것뿐이지, 허물을 기억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이무가 여러 민씨(閔氏)와 더불어 왕자(王子)·종실(宗室)의 일을 의논하였으니, 민씨에게 퍽 후한 것 같으나, 지난 여름에 광연루(廣延樓)에서 성석린(成石璘)·하윤(河崙)·조영무(趙英茂)와 이무가 함께 자리에 있었는데, 민무구·민무질의 죄를 청하자, 이무가 자리를 피하며 대의(大義)로 결단하자고 청하기를 너댓 번에 이르렀으니, 실로 민씨에게 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무의 처심(處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민무질이 ‘주상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이무의 말을, 그 두 아우에게 말하였더니, 민무회(閔無悔)와 민무휼(閔無恤)이 그 허물을 면하려고 하여 그 말을 써서 바쳤다. 내가 비록 숨겨서 보전하려고 하였으나, 죄악이 차서 여기에 이르렀으니, 내가 비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하윤(河崙)이 본래 민씨(閔氏)와 사귀었기 때문에, 그 말이 자못 이무(李茂)를 비호(庇護)하였다. 임금이 하윤에게 이르기를,
“경이 연전(年前)에 헌사(憲司)에 답(答)한 공함(公緘) 안에 ‘영흥 부원군이 말하기를, 「상국(上國)과 혼인(婚姻)을 하게 되면, 비록 난(亂)을 꾸미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마침내 후화(後禍)가 없을 것이다.」하였다.’ 하였는데, 왕자(王子)·종실(宗室)을 어떻게 처치하느냐는 이무(李茂)의 의논과 부절(符節)을 합하는 것과 같다. 만일 왕자·종실이 없으면 사직(社稷)을 유지(維持)하는 것이 어떤 사람인가?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하니, 하윤이 한마디 말도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황공(惶恐)하여 고두(叩頭)하며, 땀만 뻘뻘 흘려 등이 흠뻑 젖어 사례만 행할 뿐이었다. 하윤이 또 이무를 베지 말라고 가만히 아뢰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였다.
“하윤이 나더러 이무를 베지 말라고 청하였다. 하윤은 곧기 때문에 그 마음의 소회(所懷)를 말한 것이니, 불쌍하게 여길 만하다.”
【원전】 1 집 510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사법-재판(裁判) / *변란-정변(政變) / *역사-고사(故事)
[주D-001]육욕(戮辱) : 형벌(刑罰)에 처함.
[주D-002]공함(公緘) : 서면(書面)으로 죄상(罪狀)에 대해 진술한 글.
57 태종 10년 경인(1410) 7월 12일 (정축)
태조의 배향 공신을 조준·조인옥·이화·이지란 등으로 정하다
태조(太祖)의 배향 공신(配享功臣)을 정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을 모아 태조의 배향 공신을 조준(趙浚)·남은(南誾)·조인옥(趙仁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는 태조에게 공이 있는 사람이고,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은 젊었을 때부터 수종(隨從)하고 또 공도 있으니, 이 두 사람도 배향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성석린(成石璘)이 아뢰었다.
“개국(開國)할 때 공이 있고 없는 것은 주상께서 친히 보신 바이니, 신은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감히 이동(異同)이 있겠습니까?”
조영무(趙英茂)가 대답하였다.
“이화는 왕친(王親)이고, 이지란은 원종(原從)인데, 모두 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국의 공으로 논한다면 두 사람의 배식(配食)이 어떠할까 합니다.”
하윤(河崙)이 대답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배향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임금이 하윤의 의논을 따랐다. 또 김사형(金士衡)을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하윤에게 물으니, 하윤이 말하였다.
“인군(人君)이 신하에게 물으면, 신하는 감히 바른 것으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사형은 공이 없으니 배향함이 마땅치 않습니다.”
정부(政府)에서도 또한 아뢰기를,
“김사형은 가문(家門)이 귀하고 현달하며, 심지(心地)가 청고(淸高)하기 때문에, 태조께서 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본래 개국(開國)의 모획(謀劃)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또 모든 처치(處置)를 한결같이 조준(趙浚)만 따르고, 가(可)타 부(否)타 하는 일이 없었으니, 배향할 수 없습니다.”
하여, 마침내 참여하지 못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었다.
“남은(南誾)이 비록 개국한 큰 공이 있으나, 서얼(庶孽)을 끼고 적장(嫡長)을 해치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전하의 자손 만대의 원수입니다. 어찌하여 종묘(宗廟)에 배향하여 혈식(血食)하게 하려 하십니까?”
임금이 옳게 여기어 남은의 배향을 정지하였다. 하윤이 아뢰기를,
“조박(趙璞)이 개국의 의논에 참여하였고, 뒤에도 공이 있었으니, 배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네 사람이면 족하다. 어찌 반드시 다섯 사람이어야 하는가! 조박 같은 자를 어찌 배향하겠는가!”
임금이 말하기를,
“부묘(祔廟)한 뒤에 건원릉(健元陵)의 조석(朝夕) 전(奠)은 마땅히 예문(禮文)을 따라야 할 것이다.”
하고, 또 대언(代言)에게 일렀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사(赦)라는 것은 소인(小人)에겐 다행이요, 양민(良民)에겐 손해가 심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경사(慶事)가 부묘(祔廟)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내가 유지(宥旨)를 내리고자 한다. 사유(赦宥)의 은전(恩典)을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말하기를,
“산대 나례(山臺儺禮)는 신주(神主)를 위하는 것이라면 가하나, 만일 과인(寡人)을 위하는 것이라면 제폐(除廢)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부묘(祔廟)의 의절(義節)은 만세의 법이고, 길례(吉禮)의 성(盛)한 것은 이와 같은 것이 없사오니, 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임금이 근신(近臣)에게 일렀다.
“명일에 부묘를 할 터인데, 만일 상당군(上黨君)을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경사(慶事) 중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용서하지 않겠다.”
【원전】 1 집 558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주D-001]배식(配食) : 배향(配享).
58 태종 10년 경인(1410) 7월 26일 (신묘)
태조와 신의 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온 나라에 사유령을 내리다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고, 경내(境內)에 사유(赦宥)를 내렸다. 임금이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 차림으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신주(神主)의 동가제(動駕祭)를 행하고, 상로(象輅)를 베풀어 의장(儀仗)을 갖추고 신주를 받들어 종묘(宗廟)에 나아갔는데, 배향 공신(配享功臣)의 신주(神主)는 태조(太祖)의 뒤에 있게 하였다. 드디어 제5실(第五室)에 부(祔)하고, 제의(祭儀)는 사시 대향(四時大享)의 예(例)에 의하였다. 그리고, 팔음(八音)의 악(樂)을 연주하였는데 그 악장(樂章)은 이러하였다.
“슬프다! 황고(皇考)시여, 명(命)을 하늘에서 도왔도다. 문모(文謨)와 무렬(武烈)이 뒤를 계승하고 앞을 빛내었도다. 빛나게 종묘(宗廟)에 있어 비로소 제사하기를 정성스럽게 하도다. 아름답게 흠향하기를 천만년이나 하소서.”
공신(功臣)은 의안 대군(義安大君) 양소공(襄昭公) 이화(李和),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 청해백(靑海伯) 양렬공(襄烈公) 이지란(李之蘭), 한산군(漢山君) 충정공(忠靖公) 조인옥(趙仁沃)이었다. 처음에 내시 별감(內侍別監)을 이화 등의 사당(祠堂)에 나누어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그 자손(子孫)·종족(宗族)·문생(門生)으로 하여금 각각 신주를 받들고 문소전(文昭殿) 가까운 땅에 나아와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배향당(配享堂)에 들어왔다. 제의(祭儀)는 칠사의(七祀儀)에 의하고, 교서(敎書)가 있었다. 제사가 끝나매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재전(齋殿)에 나아가 중외(中外)의 조하(朝賀)를 받고, 난가(鸞駕)를 타고 환궁하였는데, 백희(百戲)가 앞에서 베풀고, 성균 생원(成均生員) 2백여 인과 상기(上妓) 등이 모두 가요(歌謠)를 올렸다. 들어와 정전(正殿)에 좌기하여 하교(下敎)하였다.
“왕은 이렇듯이 말하노라! 생각건대, 우리 황고(皇考) 태조(太祖)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신무(神武)하신 자품(資品)과 인후(仁厚)하신 덕(德)으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방가(邦家)를 창조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적루(積累)한 공(功)을 잇고, 우리 자손이 지수(持守)할 업(業)을 열어 주시었으니, 아! 지극하다. 내가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공경히 받들고 영양(榮養)하여 백세(百歲)에 이를 것을 바랐더니, 어찌하여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고 조금도 연장(延長)하지 않았는가? 내가 애통하고 사모함이 하루 하루 더하다. 돌아보건대, 상제(喪制)가 기한이 있어 상사(祥事) 담제(禫祭)가 이미 끝났으나, 마음은 오히려 측연(惻然)하여 감히 편안할 수 없다. 고전(古典)에 상고하니 마땅히 부의(祔儀)를 거행하여야 하므로, 영락(永樂) 8년 7월 26일 신묘(辛卯)에 친히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의 신주와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신주를 받들어 태실(太室)에 부(祔)하고, 공경히 곤면(袞冕)을 갖추어 예로써 강신(降神) 헌작(獻酌)하니, 중외(中外)의 신료가 서로 거느리고 하례하였다. 생각건대, 태조 강헌 대왕의 높은 공(功)과 성한 덕(德)이 천인(天人)에 이르렀고, 나 소자(小子) 또한 이루어진 공렬을 이었으니, 조선(朝鮮) 억만년의 무강(無彊)한 아름다움을 맞이할 것이 정히 오늘에 있다. 하물며, 성한 예를 거행함에 마땅히 비상한 은택을 내려야 하겠다. 금월 26일 새벽 이전의 모반(謀叛)·대역(大逆), 조부모·부모를 죽인 것,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奴婢)가 주인을 죽인 것, 고독(蠱毒)·염매(魘魅), 모고살인(謀故殺人), 강도(强盜)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것,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을 모두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아! 이미 황고(皇考)를 높이어 극향(克享)의 의(儀)를 베풀었으니, 아름답게 신민(臣民)과 더불어 크게 유신(維新)의 교화(敎化)를 편다.”
예가 끝나매 〈임금이〉 안으로 들어가니, 의정부(議政府) 여러 대신이 대례(大禮)가 경성(慶成)한 것을 하례하였다. 임금이 대언(代言) 김여지(金汝知)에게 일렀다.
“우리 부왕(父王)은 조선(朝鮮)의 시조가 되었으니 부묘(祔廟)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모후(母后)를 아울러 부묘(祔廟)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옛날 재신(宰臣) 최유경(崔有慶)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제릉(齊陵)은 제사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간인(奸人)의 꾀임에 빠진 것이다. 오늘 천기(天氣)가 청명하고 예의(禮儀)가 잘못됨이 없은 것은 실로 여러 재상의 힘에 의한 것이다. 네가 마땅히 내 말을 〈대신에게〉 이르도록 하라.”
성석린(成石璘) 등이 대답하였다.
“모후(母后)의 일은 비록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것이나, 오늘의 부묘(祔廟)는 실로 성자(聖子)의 공(功)이십니다.”
【원전】 1 집 559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예술-음악(音樂)
[주D-001]팔음(八音) : 동양 음악에 쓰이는 여덟 가지 종류의 악기(樂器). 또는 그 소리. 종(種) 등의 금(金), 경(磬) 등의 석(石), 금(琴)·슬(瑟) 등의 사(絲), 적(笛) 등의 죽(竹), 생(笙)·간(竿) 등의 포(匏), 부(缶) 등의 토(土), 고(鼓) 등의 혁(革), 어(敔) 등의 목(木)을 말함.
[주D-002]칠사의(七祀儀) : 봄에 사명(司命)과 호(戶), 여름에 조(竈), 가을에 문(門)과 여(厲), 겨울에 행(行), 그리고 계하(季夏)와 토왕일(土旺日)에 중류(中霤)에 지내는 일곱 가지 제사 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