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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연구 (春園硏究)

hellofine 2011. 8. 12. 00:36

 

춘원연구 (春園硏究)

 

잡지명 삼천리 제6권 제7호 / 발행년월일 1934년 06월 01일

필자 金東仁 / 기사형태 문예평론

 

緖言

우리는 過去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國家를 歷史的으로 가져보지 못하였다.

三國鼎立의 이전 시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三國時代부터 벌서 우리의 祖先의 비참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北으로는 唐이며, 오랑캐들의 끊임없는 침노와 南으로는 倭의 건드림을 받으면서 안으로는 三國 서로 끼리끼리의 싸움의 계속한 때도 편안히 베개를 높이하고 잠을 자본 일이 없었다.

 

오늘날 서로 뭉쳐져서 2천 萬이라는 數를 이룬 朝鮮民族이라는 것은 三國時代에 있어서는 5,6개의 나누어진 敵國이엇다. 正確한 記錄은 없으나 口傳에 의지한 記錄으로 상고하건대 三國分立과 三韓의 以前에는 한 뭉치에 뭉쳐진 民族이엇다. 그것이 어떤 經路를 밟았는지 여러 國家로 分立되면서 어제까지는 형아 아우야 하든 同族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그 싸움의 勝利를 얻기 위하여서는 異族인 外國의 勢力까지도 빌리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新羅의 三國統一

新羅가 三國을 統一한 뒤며, 그 뒤를 그대로 이은 高麗朝를 지나서 李朝의 消滅을 보기까지 한 때도 外國을 굽어보거나 넘겨본 歷史가 없이 戰戰兢兢이 지났다. 元을 숭보면서도 머리를 숙이고 절한 高麗朝며 倭를 업수이 여기면서도 倭軍에게<215> 全國을 짓밟히며 胡를 더럽게 보면서도 그 正朔을 받들지 못한 李氏에까지-過去의 우리의 歷史는 그들의 後孫인 今日의 우리들로 하여금 憤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祖先에게 尊敬과 愛慕의 念을 禁치 못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卽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祖先의 훌륭한 藝術遺産이었다.

 

藝術遺産

만약 이 藝術遺産만 없었다면 우리는 이 우리의 貧弱햇든 祖先의 무덤에 침을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國家의 起伏이 자심했으며, 그런 때마다 前 國家의 國民으로 하여금 祖國을 回想하는 길을 막는 手段으로서 前代의 遺産을 모두 없애버렸으며, 藝術遺産이라야 豐富하지는 못하다. 深山에 잇는 寺院, 그 寺院에 殘存한 若干, 혹은 陵墓에 감초인 故人의 所持品, 또는 地中에 埋沒된 것 약간-이런 것이 우리가 藝術遺産으로서 우리의 祖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量으로는 薄弱키 짝이 없는 것이다. 몇 번의 國體의 變動에 或은 파괴되고 혹은 燒失되고, 또는 流失, 被盜 온 갓 파란을 겪으면서도 그냥 殘存하여 있는 數個의 藝術-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커다란 忴持로서 異民族에게 우리의 조상을 자랑할 만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量의 多少를 말함이 아니라, 그 質로서 우리의 조상은 그 當時의 다른 어떤 民族보다도 빼난 文化生活을 하였다는 증거가 넉넉히 됨으로...

彫刻에 있어서, 繪畵에 있어서, 또는 工藝에 있어서 우리 조상은 가장 높은 文化生活을 경영하였다.<216>

이러한 最高水準의 文化生活을 경영한 우리의 조상이 後世에 남길만한 文學藝術은 웨 創造하지 못했나?

 

創造하지 못했을 것이 아니다. 創造는 하였지만, 後人이 잃어 버렸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支那의 文字가 輸入되고 또 吏讀가 發明된 이상에는, 文學을 創造치 못하였을 까닭이 없다. 人生感情의 高等表現方式인 美術과 音樂을 가졌던 民族이, 비교적 단순한 表現方式인 文學을 못 가졌을 까닭이 없다.

 

高麗朝에 와서 著作된 金富軾의 三國史記와 一然의 三國遺史를 보면 거기는 歷史的 事實보다 傳統的 事實이라고 認定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바보溫達의 이야기라든가 官昌의 이야기라든가 百結先生의 이야기라든가 이밖에도 이와 近似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實在한 史談이라기 보다 三國時代의 小說이 아닐까 추측된다. 三國時代의 小說이 전하고 전해서 高麗朝에 와서는 史上에 實在化하여 울리지 않았나, 이렇게 추측되는 점이 많다.

 

暗澹한 高麗朝

朝鮮民族의 藝術史上에 있어서 가장 暗黑한 時代가 高麗朝엇다.

지금 市場의 商品으로 化해서 비싼 값에 매매되는 高麗滋器가 高麗朝 藝術을 자랑하는 唯一의 증거품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밖에는 어떤 藝術을 가졌었는지 想像도 허락하지 않는 바다. 李太祖가 李氏朝鮮을 建國한 뒤에 가장 苦心한 것은 高麗 愛國者 박멸이었다. 그 手段으로서 高麗」를 想起할만한 物件은 모두 破壞하고 燒棄하엿다. 高麗朝의 文化의 기념품은 李氏의 손으로 모두 부셔 버렸다. 善竹橋가 남아 있는 것이 웬 까닭인지 의심될 만치 「高麗내음새」를 이 세상에서 消滅시켜 버렸다. 今日의 소위 고려 그릇은 모두 李氏朝鮮 建國 以前에 흙 가운데 묻혔던 물건이지 地面 上에 잇는 高麗物件은 李氏의 손에 殘滅되엿다.<217>

 

高麗의 美術, 文學 等도 이때에 이 秦始皇아닌 朝鮮始皇의 손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리하여 高麗朝는 朝鮮 藝術史 上에 「暗黑時代」라는 넉자를 적어 놓고 지나갔다.

 

李氏朝鮮

李氏 朝鮮朝.

「龍飛御天歌」는 李氏朝鮮을 찬송하기를 强制하는 한낮 政畧的 時調에 지나지 못하다 하나, 政畧은 政畧으로 미루어 두고, 그 뒤에 숨은 藝術的 價値는 拒否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러나 암담키 짝이 없는 李氏朝鮮이었다. 李氏朝의 文獻이며, 製作品 等은 (兵火 몇 번에 多少間의 遺失은 잇다 하여도)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500年間에 겨우 이것이었던가. 500年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 동안에 겨우 이것이었던가.

 

金時習의 著作 數篇, 許筠의 著作 數篇, 金萬重의 著作 數篇, 朴趾源의 著作 數篇, 그 밖에 몇 가지-이것이, 李朝朝鮮文學의 全部이었다. 其他 藝術에도 特筆할만한 것을 몇 개 남기지 못 하였다. 그 밖에는 平民 압박하기와 양반 끼리끼리의 싸움과 朱子學의 末端硏究로 500年間을 無爲히 보냈다.

그러나 三國時代부터 벌써 文章藝術의 도취경을 맛본 이 民族은 이러한 貧弱한 文學뿐으로는 만족을 할 수가 없었다.

正本이며 그 作者까지도 알 수 없는 많고 많은 平民文學이, 愛讀되고 愛聽된 크나큰 事實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218>

임진록,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금송아지전, 흥부놀부전, 토끼전, 숙영낭자전 그 밖에 헤일 수 없을 만치 많고 많은 文學作品이 귀로, 눈으로, 이 民族의 새를 깨어 다녔다.

 

文學을 사랑하고 文學에 대한 欲求心은 가지고 있으나, 政治적 결함 때문에 文學의 指導者를 못가지고, 文學의 提供을 받지 못한 이 民族의 새에는 正本도 알 수 없고 作者의 氏名도 알 수 없는 平民文學이 흘러 다녔다.

가장 배우기 쉬운 文字을 가지고, 그 위에 活版術까지 아는 이 民族이 그들의 愛讀하는 春香傳이며, 興夫傳의 原本에 의지한 寫本이나, 活版本을 가지지 못하고 그 原作者의 氏名까지 잃어 버렸다 하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이냐?

이러구러 李氏朝도 그 終末이 가까웠다. 世態가 차차 복잡하여 가면서 外事多端 外國(西洋)文化의 輸入 等, 차차 어지러워 가서 民間 事에 일일이 양반들이 간섭하기 힘들어 갔다. 아직 것 人生의 末技로서 수모 받던 藝術도 차차 그 날개를 자유로이 펴도 간섭할 사람이 없어졌다.

 

國初 李仁植

한 개의 慧星이 나타났다. 菊初 李仁植이엇다.

과연 慧星이엇다. 황량한 朝鮮의 벌판에 文學이라는 씨를 뿌리고저 나타난 菊初는 「鬼의 聲」,「치악산」,「血淚」 等 몇 개의 씨를 뿌려 놓고는 夭逝하엿다. 慧星과 같이 나타났다가 慧星과 같이 사라졌다.

山間에 피었던 한 개 名花, 그러나 樵夫들은 이 名花을 알지 못하였다. 남이 알지 못하는 새에 피었다가, 알지 못하는 새에 저버렸다.

春園 李光洙

그 뒤를 맡아 가지고 일어선 사람이 春園 李光洙다.

初年의 號는 孤舟(외배) 그 뒤에 春園 長白山人 等, 여러 가지의 이름을 가진 李光洙.<219>

 

春園 李光洙

定州出生

春園은 1892年 春2月에 平北 定州邑에서 남쪽으로 한 40里 들어가서 있는 山村의 全州 李門의 長孫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시골에서는 내로라고 뽐내는 집안이오. 春園의 出生當時에는 家産도 넉넉하였으나, 그가 세상에 나온 지 4,5年 뒤에는 차차 家運이 기우러져서 큰집에서 작은집으로 작은집에서 오막살이로 것 잡을 새 없이 零落되기 때문에, 地主에서 自作農으로, 自作農에서 小作農으로-이리하여 8.9歲 때에는 벌서 어린 몸으로 山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고 소를 끌고 밖에 나 다니는 苦役을 맛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朝鮮農村에서 태어난 가난한 집 소년이, 맛보는 온갖 고생을 그는 다 맛보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少年을 시험하심에 그 맛 고생으로 끝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春園자기) 열한 살 적 일이다. 불과 열흘 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괴질로 돌아가시고, 어린 누이동생과 나와 단둘만 남았을 때다. 부모는 다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먹고 살겠다고 내가 물을 길어오고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었다.

(靈臺 第2號 「人生의 香氣)에서」

 

早失父母한 孤兒

아직 철부지인 열한살 쩍에 그는 孤兒가 된 것이다. 이 글에는 누이동생과 자기가 단둘이라 했지만 그 밖에 또 아직 젖먹이 어린 누이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젖먹이 동생은 할 수 없이 남의 집으로 보내고, 남은 누이동생과 함께 부모를 잃은 외로운 집을 지켰다.

이리하여 여기서 人生의 가장 고달프고 쓰라린 경우에 直面한 이 少年은 어떠한<220> 受難의 途程을 밟았나?

春園 자가가 쓴 自傳의 一種이라 할만한 「人生의 香氣」에서 한두 도막, 그때의 그의 고생을 적어보자.

 

음력 9월 (부모를 한꺼번에 일흔 것이 음력 8月이다) 어떤 날 이 少年은 저녁밥 지을 나무를 하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갔다. 「人生의 香氣」에는 「나는 서투른 솜씨로 불 잘 붙을만한 풀을 골라 가면서 베었다」 하였지만 이 서툴다 하는 것은 어른과 對照하여 하는 말이지, 벌서 꽤 熟鍊된 솜씨였을 것이다. 나무를 좀 베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왕 온 이상에는 내일 땔 것까지는 베어 가지고 내려가려고 욕심을 부리든 이 소년은 낫질을 잘못해서 왼손 無名指 셋째 마디를 꽤 깊이 베이었다.

거기서는 피가 솟았다. 이 피를 볼 때에 少年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와 장래가 더욱 딱하게 생각되어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산에서 통곡하고 있을 때에 웬 女人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가까이 와서 따뜻이 위로하고 자기의 치마고름을 찢어 少年의 손을 싸매어 주었다.

 

「집에 돌아오니 어린 누이가 대문 밖에 나와서 울고 섰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지금 해 온 나무로 밥을 지어 누이와 같이 부뚜막에 앉아 먹으면서 그 여인의 얼굴을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父母가 다 돌아가신 뒤에 처음으로 기운을 얻어서 언제까지든 살리라, 힘 있게 살리라 하였다」

아무리 오막살이라 하나, 소년의 힘으로서는 그 집을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 소년은 할 일 없이 어떤 친척의 집에서 눈칫밥 살이를 하게 되었다.

 

담배장사

이 불쌍한 소년을 위해서 동네 사람이 돈 3圓을 주었다. 그 3圓을 가지고 少年은 담배장사를 하였다. 무엇이라 하는 권연을 平壤서 한 통을 사다가 한 갑 한 갑씩 팔면 近1圓의 이익이 붇는다. 定州 邑內에서 사오면 이익이 박하다 해서, 이 少年은<221> 멀고먼 길을 平壤까지 가서, 사다가는 팔고, 팔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구러 1년을 지난 뒤였다.

 

「나는 마침내 어린 누이동생이 있는 곳을 탐지하여 알았다. 어른들이 두고두고 속여 왔지만 나는 마침내 알아낸 것이다. (畧-원문) 거의 1년 동안이나 있는 곳도 모르고 서로 떠나 있던 그리운 누이동생-인제 겨우 세살 잡이 어린 누이동생-(畧-원문) 누이가 있는 곳은 여기서 30리 이다. 늦은 가을볕이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졌지마는 인제 떠나면 해지기전에 넉넉히 들어 갈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어린 것을 찾아와야겠다. (畧-원문)

 

첫 고개 너머는 작년에 한꺼번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이 있다. 쥐통(콜레라)에 돌아가신 까닭으로 동네 사람들도 들여다보지를 않아서 바로 마당에 묻었던 것을 내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돈 1백 스무냥 (12圓)을 구걸하여다 이 고개 너머에다 옮겨 묻었다. 옮겨 묻은 지가 아직 한 달도 못 넘은 무덤은 마치 새 무덤과 같았다. 나는 우두커니 무덤 앞에 서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해골을 옮겨 오던 광경을 생각하였다. 나는 그 때에 구걸해온 돈으로 베와 백지와 칠성판도 사왔으나, 밀집거적으로 싼 것이 아직 썩지 않았으니 구태 송장 내 나는 것을 그럴 필요가 없다하여 그대로 두 사람이 지게에다 져다가 그대로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 가슴께는 굵고 머리와 다리는 가는 아직도 누런빛 그대로 있는 밀집거적에 쌓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체가 눈에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서 동뚝 틈으로 숨어서 시체를 지고 올 때에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어쩌면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 시체를 저렇게도 초라하게 섬거적에 싸서 묻는담」 하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더구나 개판조차 아니 덥고 시체 위에다가 함부로 흙을 퍼부을 때에 금할 수 없이 눈물이 났으나 곁에 서있던 어른들에게 우는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분해서 가만히 돌아서서 눈물을 씻어버렸다.

 

나는 우리 옛 집터에 다다랐다. 집은 벌써 헐려버리고 그 자리에는 무 배추를 심었다.<222> 그래도 저 오동나무 앞, 살구나무 아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지막 4년의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집이 허깨비 모양으로 보이는 듯하여 (畧-원문)

둘째 고개에 다다랐다. 이 고개는 여우가 나와서 사람을 홀려간다는 무서운 고개로서 아이들은 해만 넘어가면 이 고개 밑에서 놀다가도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는 데다. 우리 동네의 봄은 이 고개에 제일 먼저 온다. (畧-원문) 나는 다시 달음질을 시작했다. 눈물에 몽롱하여진 눈에는 발밑으로 휙휙 지나가는 길바닥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 큰 개 적은 개들이 콩콩 짖는 촌 중간을 지나서 내 누이가 잡혀와 있다는 그 이웃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내 먼 일가집이다. (畧-원문)

 

누이동생을 만남

심부름 갔던 여편네가 웬 아이를 데려다가 내 앞에 세운다. 이것이 내 동생이야? 저 뼈와 껍질만 남은 누더기에 싸인 어린애가 내 동생이야? 그 불그스레하던 뺨은 어디 갔어? 그 별 같은 눈의 광채는 어디 갔어? 어찌하면 이것이 내 동생이야? (畧-원문)

나는 또 한번 「이애 너 나 알아보니. 야 아니?」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또 알아볼 리도 만무하다. (畧-원문) 나는 그 집에서 나왔다. 어스름에 내가 그 집을 나서서 앞길로 나갈 때에 누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것과 내가 그날 밤 혼자서 그 여우 나는 고개를 넘어 오면서 20리 동안이나 울고 온 것은 기억되나 내가 왜 그 누이를 안 데리고 왔는지는 생각 안 난다.

나는 그 후 1년 동안이나, 이리 저리로 동냥글을 얻어 읽고 돌아다니다가 어떤 사람에게 내 누이가 나 당겨간 후에 한 달이 못되어서 이질로 죽어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人生의 香氣에서)

 

이리하여 여기저기 동냥들이나 얻어 읽고 눈칫밥을 먹으며 다니다가 이 소년은 드디어 자기의 고향을 뒷발로 차고 서울로 뛰어 올라왔다. 담배장사를 하여서 번 돈과<223> 밑 (그의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의 장가들 때 쓰려고 준비해 두었던) 명지 몇 필, 무명 몇 필을 팔은 돈 모두의 合計가 30圓 內外의 大金을 쥐고 이 소년은 向學熱에 들떠서 서울로 올라 왔다. 아직 京義線이 開通되기 전이라, 진남포로 가서 화륜선을 타고 仁川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 온 것이다.

 

서울行

서울서 얼마를 공부하다가 다시 玄海灘을 건너서 東京으로-이리하여 5,6年間을 공부를 할 때에

「나는 어려서 父母를 여이고 無依無託하게 돌아다닐 때에 흔히 老人들게서 初年 苦生은 末年樂의 근본이니라. 네가 자라면 五福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 하는 말로 위로하여주는 말을 들었다』

(人生의 香氣에서)

 

幼年時代에 그렇게도 薄福햇든 이 少年이건만, 이상히도 그에게는 늘 몇 사람의 後援者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그의 才分의 德이겟지만 진퇴 유곡하여 「죽어버릴까 하고 죽을 방법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무슨 일 하나 생겨서」 그의 힘을 북돋우어 주었다. 그러고 이런 意外의 幸運이 그로 하여금 神經的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비교적 樂天的인 오늘날의 그의 性格을 이룬 것이다.

 

東京遊學

열아홉 살에 그는 東京서 中學을 마치고 高等學校에 入學할 준비를 하다가 자기 祖父危篤이라는 飛電에 다시 오래 간만에 故鄕에 발을 들여 놓았다.

故鄕에서 祖父喪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서 그는 五山中學校의 敎鞭을 잡게 되었다.

人生의 가장 감격되기 쉬운 나이의 열아홉 살의 청년-多情多恨한 그의 空想的 生活은 이 山間中學의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로 하여금 차차 詩人이 되게 하였다. 가슴 속에 充溢되고 壓縮된 감정의 덩어리를 기피 감추고 山間小路를 哲學者와<224> 같은 기분으로 거닐면서 여러 가지의 空想에 잠길 동안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늘이 그에게 주신 藝術的 才分이 차차 높은 소리로 울리어 나기 시작하였다.

 

4年間을 山間에서 敎員生活을 하였다. 그런 뒤에 漂泊의 길을 다시 떠났다.

시베리아로 돌아 다녔다. 滿州로 支那 本土로 지향 없는 그의 放浪生活은 1年間을 계속하였다. 해가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지든가 山에서 뜨지 않으면 산으로 지기라도 하는 山투성이 조선 땅에서 살아서 산을 보지 않아야 않을 수가 없는 땅만 돌아다니든 그에게는 해가 地平線에서 떠서 地平線으로 떨어지는 滿州와 시베리아의 벌판은 驚異엇다. 驚異라는 것은 凡人에게 있어서도 詩를 자아내거든 藝術的 天分을 가지고 있는 이 靑年에게랴. 진일을 광막한 벌판에 서서 뜨는 해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少女와 가치 가슴을 두근거리든 그-

本是는 아메리카로 유학차로 떠나든 길이지만 1年間을 漂泊을 하다가 1年 後에는 그는 다시 五山으로 돌아와서 또 다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어린 벗에게

「어린 벗에게」

이전 학생시대에 그의 後援者요 知已이든 六堂 崔南善이 刊行하는 雜誌 「靑春」에 「어린 벗에게」를 寄稿한 것이 바로 이 두 번째의 五山學校敎員의 된 直後였다.

때는 1914年 그 스물 네 살 나든 해-

「少年의 悲哀」도 그와 前後하여 가튼 靑春 誌上에 發表되었다.

그 전에도 數個의 短文의 發表가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春園이 創作家로서의 第1步를 내여 디딘 것이 이 때이다. (次號續)<225>

 

≪改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