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李朝史의 九戊辰譜, (540年間 回顧小錄)

hellofine 2011. 7. 24. 16:37

李朝史의 九戊辰譜, (540年間 回顧小錄)

 

별건곤 제11호, 발행년월일 1928년 02월 01일

필자 八判洞人(팔판동인)

 

一,

무진(戊辰)년이란 간지(干支)를 역사적으로 회고(回顧)할 때에 필자는 조선 금생(今生)의 한사람으로 형용할 수 없는 일종무량(一種無量)의 감개를 금치 못한다. 다른 것은 고사(姑捨)할지라도 우리 조선사의 시조 할아버지 되시는 단군기원이 무진(戊辰)년이었고 또 강(降)하여는 우리와 및 우리의 조선(祖先)이 5백년 동안을 두고 신사(臣事)하면서 영욕(榮辱)과 휴척(休戚)을 같이하여 오던 구상전(舊上典) 이씨댁(李氏宅)의 제일세(第一世)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화가위국(化家爲國)의 첫걸음을 내밟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 무진(戊辰)년이었은즉 이 二大사실만을 가지고 보아도 戊辰年이 사토(斯土)와 사민(斯民)에게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을 증명하고 유여(有餘)치 않은가. 그 뿐 아니라 우연인지 고연(固然)인지는 별문제로 하고 하여튼지 진자(辰字) 든 해가 무슨 까닭인지 조선역사와 항상 지중(至重)한 인연(因緣)을 맺어있는 것도 일기적(一奇蹟)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上古와 中古史는 지리하여 천착(穿鑿)치 않을지라도 3백유여년전의 임진왜란이라든지 최근 갑진년에 일어난 일아개전(日我開戰)이라든지 조선과 조선인의 금일이 있게 되는 위에 직접과 간접으로 원인도 되고 근원이 된 것을 보면 또한 무심하게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것이오. 만일 조선 근대사로부터 아무리 제외하려도 할 수 없는 一代의 거인(善惡은 물론 別問으로하고) 흥선대원왕이 순조(純祖) 경진(庚辰)에 탄생된 것을 보면 더욱 이상한 생각을 자아내게 된다. 그러나 금년은 庚辰年인즉 다른 辰年의 일은 제론(提論)할 것이 없고 단도직입으로 조선사에 나타난 戊辰年 史實을 쓰려하나 이것도 단군 이후 4,300여 년을 소구(溯究)하면 戊辰年만이 벌서 72차이나 경과하였은즉 도저히 짧은 시일을 가지고 유한한 지면에 수용될 수 없으므로 부득이단념(斷念)도 하거니와 더욱이 神祖창업의 史蹟에 대하여는 외경(畏敬)하는 六堂學人이 그의 독특한 조예와 온축(蘊蓄)을 경주(傾注)하여 一流의 거필(巨筆)로 新春各紙에 육리(陸離)한 광채(光彩)를 내는 중인즉 또다시 화사첨족(畵蛇添足)의 필요를 認치 아니하고 威化回軍으로부터 글(筆)을 시작(起)하여<32> 高宗戊辰에 마치려하니 범수미(凡首尾) 480년간이오 전부가 李朝史上의 戊辰年뿐이 된다.

「滾滾長江東逝水 浪花淘盡英雄 是非成敗轉頭空 靑山依舊在 幾度夕陽紅 白髮漁樵江渚上 慣看秋月春風 一壺濁酒喜相逢 古今多少事 都村笑談中」 聖嘆外史三國誌題詞

「英雄成敗一空花 結案終歸咏史家 會向滄溟釃碧酒 與君同唱浪淘沙」 金澤榮詩

천한백옥(天寒白屋)에 휴거무료(休居無聊)하야 동필(凍筆)을 가개(呵開)하고 진적(陳迹)을 추회(追懷)할 때에 문득 소감이 있어 前二篇을 랑음(朗吟)하면서 「古人先獲我心(고인선획아심)」을 삼복(三復)하였다.

 

二,

東國史의 창업 군주로 공덕이 많고 자루(疵累)가 적은 이를 구하려면 누구나 고려의 왕건 태조에게 지(脂)가 선굴(先屈)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삼한통일의 위업을 성취한 뒤로 32왕의 470년 치세를 經하여 우왕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산반석(太山盤石) 같은 고려의 왕업이 임의 퇴붕(頹崩)의 비운에 기울어지고 풍전고엽(風前枯葉)과 같이 비조즉석(非朝卽夕)의 哀愁를 弔케 하였으니 혼렬(昏劣)한 前代 공민왕의 실정으로 요승편조(妖僧遍照)가 國命을 掌握하고 忠良을 물리치며 奸凶을 등용하매 안으로는 민심이 이반하여 시일갈상(是日曷喪)의 怨聲이 도비(都鄙)에 부르짖고 밖으로는 홍적(紅賊)과 왜구(倭寇)의 화변(禍變)이 끊이지 아니하여 생령(生靈)이 도탄(塗炭)에 빠져 있었다. 그리다가 一代의 용주(庸主)는 非命의 橫死를 遂하고 그를 繼立한 이가 이른바 우왕으로 기주호색(嗜酒好色) 치빙(馳騁) 전렵(田獵) 等 모든 失德이 구비하야 망국군왕의 자격은 先天으로든지 後天으로든지 유감없이 가졌던 위에 신종(辛種)인지 왕윤(王胤)인지 그의 혈통조차 世人으로 하여금 의문을 삽(揷)할 만큼 사실여하는 지금에 보증치 못하되 그 所從來가 분명치 못한 것만은 확실하였었다. 그리고 보니 천명과 인심은 이 음학무도(淫虐無道)한 우왕을 버린 지 오래이라. 아무리 崔都統(瑩)의 武勇과 鄭夢周의 忠智가 있은들 一木으로 장경(將傾)하는 대하(大廈)를 탱지(撐支)치 못하며 隻手로 기도(旣倒)한 광한(狂澖)을 挽回치 못할 것은 理勢의 固然한 바이다. 그런데 당시 이태조는 삭방(朔方)에서 起한 몸으로 天授의 영명인무(英明仁武)가 國人의 歸心한 바 될 뿐 아니라 대소 數百戰에 內患과 外憂를 削平하여 개세(蓋世)의 功을 세우고 震主의 威를 가지게 되니 功利를 貧하며 富貴를 慕하는 무리가 슬하(膝下)에 부복(俯伏)하여 易姓의 勢가 歷然하게 되었다. 由來로 昏君과 强臣은 그 勢가 양립할 수 없나니 曹操가 征西將軍 曹候의 墓道를 쓰지 못하였고 周文王되기를 자원하든 것을 한갓 도학선생의 口吻을 효빈(效頻)하여 가지고 奸雄의 欺人한 것만으로 폄척(貶斥)할 것은 아니다. 當者로서 보면 기호(騎虎)의 勢와 주판(走阪)의 足이라 사귀도차(事歸到此)하면 그치는 곳까지 갈 수 밖에 없는 不得已의 형편도 있을 것이오. 또 한편으로는 乃公이 不出하면 천하창생을 내하(奈何)오 하는 자부심도 품길 것이니 필자는 반드시 李태조로써 曹孟德에게 比論함은 아니나 그때 태조의 처지로는 麗朝의 훈신으로 令名을 保하려거나 富家翁이 되여 상재향(桑梓鄕)에 퇴와(退臥)하여 晩年을 考終함에는<33> 임의 晩時의 탄(嘆)도 있었고 또 그의 발발(勃勃)한 雄心과 周圍의 사정도 또한 이것을 허용치 못할뿐더러 우왕 같은 인물로는 그를 회유하며 조종하려 하여도 器局이 원래 천소(淺小)하고 시의심(猜疑心)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우왕으로 하여금 려정도치(勵精圖治)하여 모든 失德이 없을지라도 태조와 대항하여서는 여하한 점으로 보든지 승산이 없거든 허물며 취생몽사(醉生夢死)의 지경에 빠져서 봉가이(鳳加伊), 七點仙, 小梅香, 연쌍비(燕雙飛)의 무리를 데리고 류연망망(流連忘亡)의 한을 極하였으니 此時此局에 처한 李태조에게 伊尹과 周公이 되지 않은 것을 책하는 것은 도리어 치(痴)가 아닐까 한다. 假使 百步을 讓하야 태조에게 정량충순(貞亮忠純)의 素志가 있었다 할지라도 야심과 패기가 만복(滿腹)한 그의 第五子 태종이며 또 반룡부봉(攀龍附鳳)하여 개국 定社의 元勳을 꿈꾸는 部下의 文武가 容易하게 首陽山에서 아사한 백이숙제(伯夷叔齊)를 學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왕씨의 불행인지 이씨의 幸인지 혁명의 기회는 왕조의 유일 주석지신(柱石之臣)인 崔瑩장군으로부터 공급하게 되었다.

 

三,

우왕 14년 戊辰에 당시 수상으로 또 국구(國舅)이든 崔瑩은 명국 정벌(征伐)을 계획하고 요심(遙瀋) 攻略의 大兵을 움직이어 자기가 총수가 되고 李태조와 曹敏修 等으로 좌우 군을 지휘케 하여 선발(先發)시키고 우왕으로 더불어 平壤에 進屯하였다. 此際에 잠간 高麗와 明國의 관계를 고찰하여 보건대 당초에 이때부터 약 1백년전에 高麗는 蒙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여 江華島에 천도(遷都)까지 하였으되 강약의 不敵으로 필경 元朝에 귀순하고 世世 혼인의 의(誼)를 結하여 선대의 공민왕까지에 미쳐오다가 元室이 쇠약하여지고 中原이 난마(亂麻)같이 되여 신주인 朱元璋을 만나 겨우 一統이 되고 元朝는 속히 漠北으로 도피하매 당시 高麗 조정에는 의론이 二派로 分하여 親明과 親元으로 甲是乙非의 대분운(大紛紜)을 보았으나 필경은 친명파가 制勝하야 大明天子의 홍무정삭(紅武正朔)을 받게 되었었다. 그러나 元來로 거오자대(倨傲自大)하여 他族을 보면 이적(夷狄)으로 下視하던 것이 漢人들의 악습일 뿐 아니라 帝業을 성취한 뒤의 明태조는 그때 得意의 絶頂으로 지고기양(趾高氣揚)하여 眼下無人의 처지에 있으므로 고려사절을 대할 때마다 國書의 문구에도 트집을 잡고 예물의 多寡에도 심술을 부리여 강자의 교태(驕態)를 마음껏 발휘하는 판국에 고려의 叛臣이 있어 明國 사신을 죽이고 元國으로 도망한 소식이 들리자 그 뒤를 이어 고려국내에는 親元論이 대두한다는 정보를 받게 되니 明帝의 노도(怒熖)가 一時에 爆發되여 고려의 無信을 통매(痛罵)하고 邊境의 守臣에게 엄명하여 麗使의 入國을 준거(峻拒)하는 동시에 遼東에 鐵嶺衛를 건설하여 兵勇을 增置하고 軍威로 공갈(恐喝)하는 기세를 보이었다. 고려의 군신이 木偶가 아닌 이상에 이와 같은 外侮에 대하여 적개심이 생길 것은 혈기 있는 인류의 면치 못할 바이오 또 有史 이래 수천 년에 평화를 수호하는 조선인은 남의 침략에는 부득이 應戰하였으되 선발적으로 他를 攻伐한 일은 없은즉 당시 崔瑩이 先發制人의 병법을 활용하여 明國을 先攻코저한 것은 또한 파천황(破天荒)의 壯擧라고 云치 아니치 못할 것이나<34> 그러나 一邊으로 고려의 내외형세를 泠靜하게 고찰하여 볼진대 조괄(趙括)과 같은 무모서생(無謀書生)의 大膽이면 모르되 구(苟)히 국가의 안위를 쌍견(雙肩)에 지고 있는 당국 大臣으로 역역한 승산의 자신이 없으면서 또 廟堂의 의론이 일치되기는 고사하고 동첩궤렬(動輒潰裂)하여 반대파의 수효(數爻)가 過半한 것을 目擊하면서 아무리 崔瑩이 노망이 생겼다 하기로 輕輕히 출병할 理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崔瑩의 攻明軍을 보내는 이면에는 따로 排布한 것이 있으면서 세인의 耳目을 속이기 위하여 題目으로 攻明을 주창한 것은 多言치 아니하여도 자명할 것이니 즉 崔瑩의 意中에는 純然히 敵本主義를 가지고 외국과 事端을 일으키어 놓은 뒤에 明帝의 힐책(詰責)이 있으면 전책임을 李태조에게 지워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구실을 삼자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一次 병련화결(兵連禍結)하면 태조로 하여금 明을 攻하여 요행히 성공한다 할지라도 국인원차(國人怨嗟)의 대상이 될 것이니 歸罪할 구실이 또 충분할 것이오, 만일 태조로 하여금 이런 눈치를 알아차리고 攻明의 途에 登치 아니한다 하면 그것은 崔瑩의 더욱 원하는 바로 군명거역(君命拒逆)의 이유를 정면으로 선포하고 주멸(誅滅)하려든 것이니 崔瑩의 음모가 또한 독하지 아니한가.

 

四,

그러나 明敏한 태조는 임의 崔瑩의 心事를 이중삼중으로 간파하면서도 표면으로는 몽불지각(朦不知覺)을 가장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두어번 攻明의 不利를 말하다가 채용되지 않는 것을 보고서는 다시 이의를 唱치 아니하고 왕명에 순종하야 鴨綠江을 건넜다. 그러나 一次 渡江하야 崔瑩의 호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간 뒤에는 비로소 그 機鋒을 노출하여 大兵을 威化孤島에 머무르고 利害와 順逆을 상진(詳陳)하여 반사(班師)할 것을 극구 고간(苦諫)하였다. 본래부터 敵本主義의 음모를 가졌던 禑王과 崔瑩이 태조의 上書를 採納치 않을 것은 多言을 불준(不俊)할 것이오 이와 같이 군신이 相持하는 동안에 때는 夏月을 當하야 림우(霖雨)가 連綿하니 량향(糧餉)이 繼치 못하고 의갑기장(衣甲器仗)이 완전치 못하여 軍中에는 원성이 점고(漸高)하였다. 이에 태조는 三軍을 취합(聚合)하고 攻明의 絶對로 不可한 것과 廟算의 誤妄한 것을 지적하야 痛論한 뒤에 금일 형세가 進退兩難에 있으나 進하면 오즉 死할 뿐이로되 退하여 君側의 간신을 掃淸하면 오히려 生道가 있다하여 變調를 띄인 軍心에 一大衝動을 주었으니 三軍이 踴躍하여 李元帥의 약속을 從하여 死生을 一任하자 하고 石火電光 같이 回軍의 의결를 하여 遼野로 향하든 기치(旗幟)가 松京으로 倒指하니 그 형세가 노도(怒濤)와 광조(狂潮) 같은지라 우왕과 崔瑩이 랑패전도(狼狽顚倒)하야 혼비백산(魂飛魄散)이 될 뿐 아니라 白首英雄이 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는 悲劇으로 결말을 짓고 왕씨 조정이 이로부터 다만 형식의 虛名을 有할 뿐이오 이로조차 약 45년간은 다만 易姓의 절차를 밟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있을 뿐이었다.

 

五,

시이사왕(時移事往)한 지금에 와서는 만사가 史家의 晝夢을 作하였으므로<35> 그때의 시비교졸(是非巧拙)을 말하는 것은 死兒의 年齡을 數하는 이상의 어리석은 일이거니와 필자는 麗末史를 읽을 때마다 王氏家의 최후충신으로 武功과 將略이 一世에 뛰어나고 그 義烈이 또한 천추지사(千秋志士)의 敬仰을 받을 만한 老雄崔瑩을 위하여 그 悲壯한 心事에는 일국(一掬) 동정의 열루(熱漏)를 뿌리는 동시에 그 조지대엽적(粗枝大葉的)으로 된 頭腦와 졸렬무쌍(拙劣無雙)한 작전에는 소살(笑殺)치 않을 수 없다. 그의 對李太祖策이 철두철미로 실패에 돌아가고 저와 같이 비참한 末路를 招한 것은 그 책임의 전부가 彼의 자신에 있는 것을 먼저 승인하여야 할 것이니 첫째로 내환의 화근을 제하려하면서 외국과 兵을 構하려한 것이다.

東漢末年에 하진(河津)이 환관(宦官)을 멸하려고 外兵을 불러다가 敵을 誅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喪亡된 것을 보면 崔瑩의 무모한 것이 어느 정도이든 것을 推知할 수 있는 동시에 何進과 異曲同調의 了局을 지은 것은 寧히 당연에 지내는 당연이 아니며 둘째로 彼는 敵을 없애기 전에 同志의 紏合을 잊어버린 것이니 그때의 麗朝忠臣으로는 被自身을 除한 외에는 獨히 鄭夢周 한 사람이 있어 才智와 力量이 국인의 신복하는바 되었거늘 彼는 이와 같은 대사를 圖하면서 종래 親明派의 거두이던 鄭夢周의 존재를 무시하다가 意外의 援兵을 태조에게 공급하여 禑昌父子를 放逐한 九功臣의 필두에 鄭夢周 三字를 보게 된 것은 彼가 아무리 변소(辯䟽)하여도 그 策戰의 조루(粗漏)한 것은 엄(掩)치 못할 것이며 셋째로 彼는 태조를 除하기에만 급급하였고 그 우익(羽翼)된 사람을 如何히 處置할 줄을 모른 것이다. 저 鄭道傳, 趙浚, 南誾 等의 무리가 모두 麗祖世祿의 臣子이오 결코 태조의 가신도 아니오 從卒도 아니었으며 따라서 선천적으로 역골반태(逆骨叛胎)를 품생(稟生)함이 아닌 이상에는 그 무리로 하여금 才智를 展布하야 事功을 세우고 富貴를 취할 수만 있으면 元來 爲人이 영리(怜悧)하든 것만큼 王氏의 叛臣을 감작(甘作)하면서 李氏에게 盡忠하였을 理가 만무하였다. 그런데 彼는 소호(小毫)도 차점(此點)에 考廬를 費한 흔적이 없었으니 이 어찌 謀國의 良臣이 될것이냐. 伊時의 彼를 위하여 왕조의 延命策을 구한다 할진대 아무리 창피하고 분통할지라고 明國의 환심은 잃치 아니하여 强隣의 外援을 緩急之時에 이용하도록 할 것이오 조정의 名으로 賢才를 수용하여 권신으로 하여금 私恩을 售치 못하게 할 것이며 우왕의 失德이 심하여 改悛의 望이 없거든 伊霊의 權道를 써서라도 社稷第一主義를 위하여 婦寺의 忠을 버릴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運命의 은총(恩寵)이 왕조를 버린지 오래인즉 천명과 인심이 新主에게 돌아가는 판국에 일개의 崔瑩에게 무엇을 責할 것이 있으랴. 다만 麗朝가 戊辰年에 이르러 急轉直下의 형세로 멸망되는 衰面에는 崔瑩과 같은 無識武夫가 있어 그 禍機를 促成한 것을 기록하면 그만이다. 書하야 玆에 至하니 王氏의 社稷은 사실상으로 이 해에 망한 것이오 善竹橋의 혈흔(血痕)과 壽昌宮의 三讓은 모두 戊辰年 活劇이 나은바 餘興이었다.

 

六,

다음에 온 戊辰은 이씨의 宗社가 비로소 기초가 견고하게 된<36> 세종 30년 戊辰이니 正히 동방요순의 稱이 있으시던 그 군왕이 연고덕소(年高德邵)하여 治化가 보급되고 조선문화가 최고조에 달하든 난숙시대(爛熟時代)이었었다. 그러나 사물이란 성하면 반듯이 쇠하는 원칙에 의하여 이로부터 2년후 庚午에는 不世出의 성주이던 세종이 신민을 버리고 또다시 2년을 經하야는 嗣王이든 문종이 또한 早世하고 明의 영락제를 표본삼던 수양대군이 隣國의 등록(謄錄)을 그대로 옮겨다가 骨肉天倫 間에 空前의 大流血을 보던 비극이 계기(繼起)하게 되었다. 그리다가 중종 30년 戊辰에서는 연산조의 폐정(弊政)을 개혁하는 동시에 사화야기(士禍惹起)의 장본인이든 柳子光이가 宿罪의 탄핵을 만나 관동지방에 찬사(竄死)하여 公議가 칭쾌(稱快)하였고 그 다음 戊辰은 임란을 치르시든 선조대왕의 원년으로 李浚慶, 李滉, 朴淳, 李珥, 柳成龍 같은 홍유(鴻儒)와 賢相이 조정에 布列하야 治化가 淸明하였으나 인재가 너무 배출된 까닭이던지 문호를 各立하여 당론이 배태(胚胎)되며 따라서 李朝 亡國의 遠因을 짓게 되었고 干支가 一週하여 인조 6년 戊辰에는 前年 정묘로난(丁卯虜亂)의 後를 承하야 江都和約으로써 국욕(國辱)이라하여 국론이 격앙하는 동시에 失志怨國하던 무리가 승시도량(承時跳梁)하려하니 李仁居는 橫城에서 일어나고 柳孝立은 堤川에서 움직이어 필경 發覺處刑되었으나 이로부터 역옥(逆獄)이 끊이지 아니하여 무수한 상수귀(喪首鬼)를 내이었고 그 후 60년을 지나서는 숙종 14년 戊辰이니 총희(寵姬)張氏가 왕자를 낳아 가지고 탈적(奪嫡)의 야심으로 種種의 非行을 거듭하다가 一時는 소원을 이루어 正后의 位에 오르고 一門 영화를 극하였으나 필경은 살신의 화를 自招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탄생한 왕자는 다른 날 왕위에 오르사 경종대왕이라 稱하였으니 저 黨禍의 가장 극열하든 辛壬政變까지도 원위(源委)는 모다 張嬪이 작용(作俑)한 바이었고 다음이 영조 24년 戊辰으로 당화에 徵하야 세웠던 蕩平策이 幾分間은 效를 秦하야 노골적으로 보복하는 일이 없어지고 따라서 민막교구(民瘼矯捄)에 애쓰는 영조께서는 이와 같은 당쟁 소강시대를 틈타서 均役廳을 만들어 부옥(蔀屋)의 痛苦를 덜게 되고 績大典을 찬집(纂輯)하여 법제를 완성하였으며 慘虐한 形具를 없애어 刑政을 輕寬케 하였다.

 

七,

이로부터 다시 一週甲을 지낸 순조 8년 戊辰에는 시벽(詩癖)싸움의 여신(餘燼)이 사라지지 않은 외에 국왕의 多病한 것을 奇貨로 하여 外戚이 朝權을 專擅하게 되었으니 소위 戚里世道의 효시(嚆矢)가 되고 그와 같이 성서사호(城鼠社狐)들의 발호(跋扈)하던 결과로는 자연의 약속으로 인심의 불평을 자아내어 종국에는 3년후에 洪景來의 一呼에 關西가 향응(響應)하여 旬日사이에 67州城을 함몰(陷沒)하여 형세가 일시치장(一時鴟張)함에 이르렀으나 요행으로 평정하게 되었고 그 다음 戊辰이 즉 60년전 舊甲으로 정히 고종 5년에 상당하든 바 主上이 유충(幼沖)함으로 대원군이 섭정의 任에 당하야 경복궁을 중수하며 서원을 철폐하며 천주교도를 학살하였으며 佛國艦隊의 내습(來襲)을 받고 척화양이(斥和攘夷)의 巨碑를 세워 쇄국정책을 극단으로 保守하든 것이 모두 그때 전후의 일이다. 여사(如斯)히 數來할 때에 李朝 5백년史의 大觀은 왕위(王位)찬탈(簒奪)의 비극, 당쟁과 사화의 陰慘한 記錄, 外戚과 權奸의 발호(跋扈), 貪官汚吏 等이 도량(跳梁)을 除한 외에 또 무엇이 있으며 엄권태식(掩卷太息)할 사람이 어찌 필자 한 사람 뿐이리오. 아아... (끝)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