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문자에서 예술로의 진화
서예, 문자에서 예술로의 진화
한 번의 붓질로 사물의 본질을 담아내고, 한 번의 붓질로 작가의 정신을 담아내며, 한 번의 붓질로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서예는 중국에서 탄생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발전된 동아시아 고유의 예술입니다. 미술의 개념이 서양의 관점에서 정의되어온 탓에 오랫동안 세계의 예술장르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지만, 아시아의 부상을 계기로 미술시장에 변화가 찾아오면서 서예에 대한 관심도 서서히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예가 어렵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현대미술과 접목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크고 작은 서예전시가 꾸준히 열리고 있습니다.
서예의 대중화 및 세계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요즘,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국가문화유산 종합 DB(http://www.emuseum.go.kr/index.do)의 도움을 받아 유구한 역사 속을 면면히 이어온 동양예술의 정수 서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서예란 무엇인가
서예는 종이와 붓, 먹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문자를 통해 작가의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단순한 의사전달이나 기록과 같은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 문자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본능에서 탄생된 서예는 기본적으로 조형예술에 속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상을 만들어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고, 변화·통일·대비·조화·비례·강조·대칭·균형·단순·반복 등의 방법을 통해 예술미를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 서예-몽유도원도
또한 서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목적하는 바가 완성되는 시간예술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문자는 일정한 형태가 있으며 쓰는 순서와 법칙이 있습니다. 다른 조형예술의 경우 형태를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물체를 배열하지만, 서예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글자가 배열되기 때문에 완성된 글자를 보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느 방향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형예술이자 시간예술인 서예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며, 주로 한자를 사용했던 한국과 일본에서 발달했습니다. 동양예술의 한 분야이기는 하나 단순히 예술적 가치만을 추구한 것이 아닌, 정신수양의 수단이자 인격도야의 방편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여타의 예술과는 구별됩니다. 중국에서는 ‘서법’, 일본에서는 ‘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서예’라고 부르나 이는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붓을 사용하여 글자를 쓰는 행위라는 점은 같습니다.
>> 우리나라 서예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서예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삼국시대부터입니다. 고구려의 경우 전문, 석각, 묘지명 등의 유물을 통해 예해혼합풍(隸楷混合風)이 성행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 특히 웅장한 기상이 담겨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는 중국에서도 보기 힘든 명품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백제의 서예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과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 등을 통해 왕희지체를 연상시키는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의 남조풍이 근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서예는 고구려와 같이 북조풍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었는데, 진흥왕 때 세워진 순수비의 서체는 신라 특유의 색이 가미되어 있으면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왕희지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9세기 무렵부터는 구양순체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서예는 지식층의 교양적 기능의 하나로 정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사를 전업으로 하는 서학박사(書學博士)와 이원(吏員)의 양성 등으로 인해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서예 자료의 흔적은 비문과 묘지명, 사경 등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은 편입니다. 고려 전기는 앞 시기의 서풍을 계승하여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특히 비문의 글씨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중기에는 왕희지체를 중심으로 성행하다가 후기에는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크게 유행하여 조선 전기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 전기까지 유행했던 송설체를 주도한 사람은 바로 안평대군 이용(李瑢)이었습니다. 시문사화에 모두 능했던 그는 명나라에서도 당대 제일의 서가로 손꼽을 만큼, 수려한 서체를 선보인 인물이었습니다. 중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서예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사자관(寫字官) 출신인 한호(韓濩)였습니다. 선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던 그는 왕희지체에 송설체를 가미하여 단정하고 정려한 석봉체(石峰體)를 이룩하여 서예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이숙(李淑)에 의해 동국진체(東國眞體)가 출현하였고, 이 서체가 윤두서(尹斗緖)와 윤순(尹淳)을 거쳐 이광사(李匡師)에 이르러 집대성되었습니다. 18세기 말 청나라에서 성행한 금석학의 영향을 받은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독창적이고 기발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시켰는데, 조형성과 예술성에서 뛰어났던 추사체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서예의 서체
한자의 경우 전서, 예서, 해서, 초서, 행서 등의 서체가 있고, 한글에는 판본체, 궁체, 민체 등이 있습니다.
■ 전서(篆書)
한위(漢魏) 이전에 쓰이던 고대의 글자체로,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의 통칭입니다. 대전은 주나라 의왕 때 태사(太史) 주(姝)가 갑골과 금석문 등 고체(古體)를 정비하고 필획을 늘려서 만든 서체이며, 소전은 진나라 시황제 때 재상이었던 이사(李斯)가 진나라 문자를 기초로 하여 만든 표준글자체를 말합니다. 소전은 여러 지방에서 쓰이던 각종 자체(字體)를 정리하고 통일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한자의 규범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 예서(隸書)
전서의 자획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만든 서체입니다. 한 점 한 획마다 너울거리는 물결 모양이 있으며, 가로 획의 끝을 오른쪽으로 빼는 것이 특징이지요. 이를 파세(波勢) 또는 파(波)라고 하는데, 팔분은 좌우에 균형 잡힌 파가 있는 서체를 말합니다. 장식적인 효과가 뛰어나고, 우아하며 차분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서예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서체 중 하나입니다.
■ 해서(楷書)
예서를 좀 더 유연하고 쓰기 쉬운 형태로 단순화시켜 발전시킨 서체로, 글자의 모서리가 깔끔하고 다양한 두께의 곧은 획이 특징입니다. 표준 서체가 완성된 것은 당나라 때로, 이 시기에는 해서를 장기로 하는 전문서예가들이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정희의〈묵소거사자찬〉, 안평대군의〈몽유도원도〉발문, 이이의 서간문 등이 대표적인 해서체로 꼽힙니다.
■ 초서(草書)
전서와 예서 등의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신속하게 쓰는 서체입니다. 지나치게 간략화 하는 바람에 읽는 것이 쉽지 않아 실용적 가치는 잃어버렸지만, 변화가 풍부하고 쓰는 사람의 개성을 발휘하기가 용이한 탓에 예술작품에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 행서(行書)
해서와 초서의 중간 형태에 해당되는 서체로, 쓰기도 쉽고 해독도 어렵지 않아 일반인들의 필기체 글씨체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후한에서 삼국시대의 위나라에 이르는 동안 서체로서 인정받기 시작하여 동진의 왕희지 부자에 이르러 완성되었는데, 서체 가운데 가장 다양하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으며, 명필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행서에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 판본체(板本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의 판본에 쓰인 글자를 기본으로 쓴 붓글씨의 글자꼴을 말합니다. 오래 된 글씨체라는 의미에서 ‘고체’, 또는 훈민정음을 본받아 쓴 글씨라는 의미에서 ‘정음체’라고도 불리지요.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가로획과 세로획은 수평·수직 방향의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각형에 가까운 조형을 하고 있습니다. 문자의 중심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함께 쓰는 모음에 따라 자음의 폭이 넓거나 좁게 변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궁체(宮體)
조선시대에 쓰였던 한글 서체로, 1446년〈훈민정음〉이 반포된 뒤 궁중에서 궁녀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에 궁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처음에는 한자 서법을 응용했으나 점차 한글의 특수한 글자 모양에 맞는 서체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글씨의 선이 곧고 맑으며 단정하면서도 율동감이 넘쳐 일반 부녀층 사이에서 유행했고, 국문학이 융성했던 영·정조 시대 한글필사가 늘어나면서 완숙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서체는 정서(正書)와 흘림으로 구분되고, 형식은 규칙적이고 의식적인 등서체와 자유분방하고 장식적인 서한체로 구분됩니다.
■ 민체(民體)
판본체와 궁체는 정형화된 틀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민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고 개성이 뚜렷한 서체입니다. 민간에서 사용된 서체를 통틀어서 민체라 하는데, 한글사용이 확대되면서 서민들이 서신을 교환하거나 한글소설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박하고 인간적인 멋을 풍기고 있으면서도 글쓴이의 개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어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많습니다.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들
■ 김생 (711~791)
신라시대의 명필로 손꼽히는 그는 해서, 행서, 초서에 모두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힘이 넘치는 필력은 변화무쌍했으며, 글자의 짜임새도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 최치원 (857~?)
신라 말기의 학자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없게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지역을 유랑하며 지냈습니다.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서체를 이루었으며 문학 방면에 큰 업적을 남겨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습니다.
■ 탄연 (1070~1159)
고려시대의 승려이자 서예가입니다. 김생에 버금가는 명필로 알려졌는데, 특히 왕희지체를 매우 잘 썼다고 합니다. 청평 문수원(文殊院) 중수비와 예천 복룡사비 및 삼각산 승가사 중수비는 모두 그의 글씨입니다.
■ 안평대군 (1418~1453)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당대의 명필로 꼽혀 중국에서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 말에 유입된 송설체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이었지만, 여기에 자신의 개성을 더한 활달하고 자연스러운 서체를 이룩하여 조선 중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글씨로는 〈세종대왕영릉신도비〉, 〈청천부원군심온묘표〉, 〈임영대군묘표〉 등의 금석문이 남아 있습니다.
■ 한호 (1543~1605)
한호는 ‘석봉’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로, 글씨를 워낙 잘 써 각종 공문서와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으며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으로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왕희지체에 개성을 가미하여 독창적인 서체를 완성했는데, 이를 ‘석봉체’라고 불렀습니다. 현존하는 그의 글씨로는 〈허엽신도비〉,〈서경덕신도비〉,〈기자묘비〉,〈행주승전비〉,〈선죽교비〉,〈좌상유용묘표〉 등이 있습니다.
■ 김정희 (1786~1856)
조선시대의 서예가이자 문인인 김정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내려온 서법과 한국과 중국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체인 ‘추사체’를 이룩했습니다. 당대는 물론 우리나라 서예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금석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주유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