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역사

떠나보낸 이의 외침 : 외국 유학은 불가하다

hellofine 2011. 3. 29. 09:12

* 고전의 향기 *    떠나보낸 이의 외침 : 외국 유학은 불가하다

 

 

우리나라는 근대에 들어와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교통과 통신의 혁명적인 변화 덕분이다.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새 시대를 꿈꾸고 새로운 삶을 원했던 사람들이다. 신출귀몰하고 변화무쌍한 이들의 인생 역정은 이 시대 역사를 읽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어쩌면 우리나라 근대사는 이들의 꿈과 야망을 그려낸 한 편의 대하소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떠난 이들의 설렘도 있지만 떠나보낸 이들의 아픔도 있다. 떠난 이들이 많았던 만큼 떠나보낸 이들도 많았다. 아래에 소개할 육용정(陸用鼎 1843~1917)의 글은 이 시기에 급격히 늘어난 ‘떠나보낸 이의 시선’ 중 하나이다. 그는 자녀를 외국에 유학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방금 서구 각국이 흥성하여 학술과 기예가 동하(東夏) 여러 나라에 와서 통하고 있다. 동방 여러 나라가 만약 여기에 대응하여 제어할 계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마땅히 연접하고 인습하여 역으로 서구의 법을 써서 제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혁신이 비록 옛 사람의 생각은 아니지만 시대를 따라 처변함은 성인이 권도를 사용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동하(東夏) 여러 나라에서 연소하고 총명한 자제를 보내 서구 각국에 가서 배우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어리고 철없는 아이들이 출세하는 데 열중하여 간혹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임금의 명이 없는데 함부로 날뛰기만 한다. 배운 것도 거의 일컬을 게 없다.

 

가만히 생각건대 도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학문에는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이 있다. 덕행은 근본이고 학술과 기예는 말단이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따른다면 나는 그것이 옳은 줄 모르겠다. 덕행은 오직 효가 먼저 할 것이고 충은 그 다음이다. 효를 잘한다면 충은 절로 그 안에 있다. 따라서 왕자(王者)가 인정(仁政)을 행할 적에도 효를 일으킴을 먼저 할 일로 삼았다. 저들 나이 어린 무리들이 자기 한 몸의 출세를 위해 임금의 명도 없는데 그 부모를 가볍게 저버리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효도하는 방법에 있어 얼마나 어긋나는 일인가.

 

보통 사람이 자식을 아끼는 정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실타래가 여러 가지 있어서 하나둘이 아니다. 자식 된 자가 어찌 차마 이를 저버리는가. 이것을 차마 저버릴 수 있다면 천륜으로 맺어진 부모도 그러하니 하물며 의리로 합쳐진 임금이겠는가. 저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큰일을 노리는 사람은 작은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다. 부모를 위해 뜻을 받들고 몸을 받드는 것은 효의 작은 것이다. 입신양명해서 한 나라에 공훈을 세워 부모를 빛내는 것은 효의 큰 것이다.”

 

또한 서법(西法)의 기술에 현혹되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선왕(先王)의 도는 말할 게 없다. 이것은 옛날 도이다. 동하(東夏)의 법은 본받을 게 없다. 이것은 옛날 법이다. 옛날은 오늘날과 부합하지 않으니 하나같이 쓸어버리고 혁신해야 옳다.” 그리고는 서로 격려하고 분기하여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데 금지할 수 없다.

 

아! 저들의 철없고 무식함이여! 설령 학문이 완성되어 부모를 빛낸다 해도 그간 부모에게 근심을 끼친 것을 이루 형언할 수 없다. 또, 오래 떨어진 동안 부모가 곤경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이 지경이 되었다면 하늘을 다해도 그치지 않을 원통함이 얼마나 크겠는가.

 

또, 뜻을 받들고 몸을 받드는 게 효의 작은 것이 아니다. 효에 어찌 크고 작음을 분간하겠는가. 크고 작음을 가릴 것 없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서 온전하게 성취해야 옳다. 근본에 어둡고 먼저 할 일을 모르니 당연히 큰 것을 작은 것이라 하고 한갓 말단을 따르기만 하는 것이다. 아! 뜻을 받들고 몸을 받드는 한 가지 일이 작은 절도가 아니다.

 

또, 기술에는 본디 동서고금의 차이가 있지만 도에 언제 동서고금의 차이가 있었던가. 시대를 따라 처변하는 것이 법이다. 옛날이 지금과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시대를 따라 처변하는 법이 또한 도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뜻을 끝내 저들은 모르는 것이다.

 

서구의 법은 참으로 신이하고 정묘해서 오늘날 반드시 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철없고 역량 없는 무리들로서는 결코 이를 배울 수 없을 줄로 나는 안다. 어째서인가? 이 무리들은 우선 기국(器局)이 깊지 않고 취향(趣向)이 정해지지 않아 각각 자기 나라에 있는 큰 줄기 보통 학문도 대충 통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다른 나라에서 평소 알지 못하는 신묘한 기술을 어찌 대번에 논의할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먼저 동하(東夏)의 경서와 역사책을 대략 통하게 하고 선왕의 정도를 대략 들려주어 부모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큰 근본을 알게 하며, 겸하여 역대 치란과 사변의 원인이 되는 큰 단서를 통하게 하여 근기를 세운 연후에 마침내 서구의 기술에 미쳐서 확충하고 채색하게 한다면, 그 기술이 근본이 있는 기술이 될 터이고, 말단이 되는 일에서 조처한다면 끝내 임금과 부모를 겸하여 지키고 집과 나라를 아울러 구원하는 큰 업적이 될 터이니, 이 어찌 근본과 말단에 순서가 있고 큰 것과 작은 것을 겸하고 아우르며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이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고 대번에 말류 기술에 미쳐 단지 출세하기를 노릴 뿐이라면 자기 부모를 저버리는 저들의 소행으로 보건대 어찌 다시 임금에게 미치는 의리가 있겠으며, 필시 변란을 따라 뜻을 바꾸고 세력을 좇아 이익을 다투어 한갓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니 자기가 입신해서 부모를 빛내는 일이 된다는 게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니 자식 된 자가 유학하는 일은 반드시 부모가 허락하고 임금이 보낸 연후에야 가하다. 또, 부득이한 까닭으로 차마 취학하려는 마음이 있은 연후에야 가하다.

 

- 육용정(陸用鼎), 〈자식 된 사람이 외국에 유학 가서는 안 된다는 의론[爲人子者不可以遊學外國論]〉, 《의전문고(宜田文稿)》

 

 

▶ 경민편(警民編)_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민중을 교화하기 위해 편찬한 윤리서

 

[해설]

 

 

우리나라 외국 유학의 역사는 길면서도 짧다. 긴 역사에 눈길을 준다면 삼국시대, 그리고 후삼국시대에 불법(佛法)을 찾아 중국에 건너갔던 승려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 말기 의상과 원효가 당나라에 가는 도중 서로 운명의 엇갈림을 겪었던 일은 7세기 당나라 불교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도당 유학 붐이 일어났던 신라 불교계의 작은 일화였다. 당나라에서 화엄교학의 2대 종사인 지엄에게 화엄을 배우고 귀국해 화엄을 강학했던 의상, 당나라에 유학을 가지는 않았으나 한마음 사상으로 동아시아 불교학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원효, 이 두 인물은 당시 신라 불교계의 거인이었던 동시에 한국 해외 유학의 역사에서도 서로 비교되는 지성이었다.

 

당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이 성립된 이래 한국의 해외 유학 행선지는 항상 중국이었다. 중국은 학술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 승려들이 중국에서 교학을 배웠다면 후삼국시대 신라 승려들은 중국에서 선종을 배웠다. 불교를 공부하는 승려들 못지않게 유학을 강마하는 선비들도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을 보고 싶어 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비록 명나라나 청나라에 유학 가서 당대 유학(儒學)의 종장으로부터 직접 유학을 배울 기회는 없었지만 그 대신 정기적인 사행을 통해 중국을 ‘관광(觀光)’할 수 있었다. 북학파가 성장하는 정조 시대 이후부터는 느슨하게나마 양국 간의 학술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그러한 네트워크 위에서 김정희가 옹방강으로부터 고증학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중국 현지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조청 학술․문화 교류는 후지쯔카 치카시 같은 학자가 고백했듯 에도시대 일본 한학자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선망의 대상이었을는지 모른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 외국 유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을 배경으로 조선 정부에서 일본에 관립유학생을 파견한 뒤부터 해외 유학이 본격화되었다. 해외 유학 행선지는 거개 일본이었다. 중국이나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본 유학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유학의 목적은 개인마다 달랐지만 적어도 초기 관비 유학생들의 꿈은 속히 신학문을 배운 뒤 귀국해 본국 관리에 임용되는 것이었다. 근대국가 초기 개화파 정부 하에서 새로운 관직 수요가 발생할 것을 기대한 출세욕이었다. 당시 게이오 의숙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 유학생 중에 농업, 상업, 공업 분야를 희망하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놀랐던 일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 온다.

 

이렇게 볼 때 육용정이 한국 해외 유학생들의 퇴영적인 출세욕을 비판한 것은 당시 역사적 정황에서 어느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제기한 쟁점들은 비단 이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감되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부를 하지 않고 정치를 하는 유학생, 고국에 남아 있는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유학생, 큰일을 해내겠다고 과잉의식에 젖어 있는 유학생, 이런 유학생도 문제이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육용정이 지적한 바 유학생들이 현지 유학 생활에서 쌓은 제한적인 경험에 사고가 막혀 보편적인 사유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슬픈 역설이다. “동서고금의 차이가 없는” 보편적인 도를 깨닫고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의 메시지를 담당해야 할 해외 유학생이 도리어 동과 서를 차별하고 고와 금을 차별하는 데에 열중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인 사유의 회복! 이 막중한 사명은 해외 유학생이 증가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 근대 사상계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쓴이 / 노관범 / 2011. 3. 28. (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