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이조 오백년 야사 ①

hellofine 2011. 3. 17. 21:47

 

이조 오백년 야사 ①

 

                                                                      국민보 : 1955년 / 10월 / 12일

모이노(牟尼奴)

 

후세 사람들이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왕씨의 사직(社稷)을 빼앗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을 말하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신돈(辛旽)이라는 중이 있었다. 위인이 음특(淫慝) 간교하여 사람을 잘 유혹할 줄 알았으므로 공민왕 좌우에 연비를 만들어 궐내에 드나들었다. 왕을 어떻게 후려 대었던지 왕은 깜빡 고혹하여 스승으로 섬기고 말마다 신청할 뿐 아니라 권리를 모두 맡겼다.

 

신돈이 처음에는 도가 높은 중인 척하고 왕을 후렸는데 권리를 잡은 후에는 음특 간교한 심술을 사용하여 어진 사람을 많이 모함하여 죽이고 희첩을 무수히 두어 행락할 뿐 아니라 조관의 집 젊은 부녀를 많이 간통하다. 그 간통하는 방법이 또한 그 지위를 악용하는 것이었다. 즉 그가 세력이 있는 고로 청탁이 끊일 사이가 없었는데 누구든지 무엇을 청탁할 때는 그 처첩 중에서 젊은 부녀를 보내야만 했다.

 

어느 부녀든지 혼자 그의 침소에 들어가 신돈과 단 둘이서 마주 앉아 청탁한 연후야 일이 이루어졌으니 그 중간 형편은 물어 무엇하랴. 그런 음특한 자에게 청탁을 하러가는 부녀 또한 심성이 이미 개결하지 못한 여자라고 볼 것이다. 욕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 가는 여자마다 욕을 당하였고 더러운 소리는 밖에까지 들렸다.

 

한편 고려 왕씨는 오랑캐의 풍속을 쫒았다. 동족끼리 혼인하는 악습이 있었다. 동족의 혼인은 자손의 번성에 해롭다 한다. 그러나 왕실의 혈통은 끊이지 않더니 공민왕에 이르러서 세자가 생기지 않았다. 왕은 원나라의 종실 여자와 결혼하였고 다른 비빈도 많았다.

 

그럼에도 무자하였음은 그가 성적으로 불구자였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자주 신돈의 집에 갔는데 신돈에게는 반야이라는 어여쁜 첩 하나가 있었다. 신돈은 반야가 수태하자 종용히 반야와 의논하여 네가 지금 수태한 지 두 달이니 이럴 때 너의 몸을 인군에게 바치면 아들을 낳는 날에는 왕자가 될 것이다. 아들이 귀하게 되면 너도 귀하게 되고 나도 평생 권리를 손에 잡을 수 있다. 너는 나의 말대로 진행 하렸다.

반야는 약간 사양하는 체하다가 제삼 제사 강청함에 이르자 그렇게 하겠노라 하였다.

 

그리하여 두 남녀의 비밀 약속은 왕이 또 나와 노는 때를 기다려 행하여졌다. 신돈은 반야를 자기 집 비녀라 일컫고 음식을 받들어 나오게 하였다. 그런 줄을 모르고 왕은 그 얼굴이 어여쁨을 탐내어 머물고 상통하였던 것이다. 일이 공교히 되느라고 상통한 지 열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의 이름을 이노라 짓고 신돈의 집에서 기르더니 세 살 적에 궁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왕비가 낳았다고 칭하고 왕비를 시켜서 기르면서 왕은 대신 이인임에게 조용히 부탁하기를 이 아이는 내가 신돈의 집에 가서 놀 때 그 집 비를 상관하여 낳은 것이니 경만 혼자 그런 줄 알고 잘 보호하여 왕씨의 후사를 잇게 하여 주오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성적 불구자로 아들을 낳게 할 수 없음을 세상이 다 아는 바에야 이 무슨 해괴한 소리냐. 이 어불성설한 아들에 대하여 달리 전하기를 왕비가 신돈과 통간하여 낳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실은 반야의 소생이요, 왕비의 소생이 아니다. 실로 반야를 숨겨두고 어머니 아닌 어머니인 왕비가 낳기 때문에 그가 애매한 누명을 쓰는 것이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부탁을 들었으므로 공민왕이 하세한 후에 이노를 세웠다. 그가 곧 우왕(禑王)이요, 우왕을 폐한 후에는 창왕(昌王)을 세웠으니 우와 창은 그 부자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우와 창은 신우 신창이요, 왕우 왕창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태조가 신씨의 나라를 빼앗았다는 말은 잘못이다.

 

왕기문란

 

또한 공민왕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시기하는 마음이 많아서 신임하는 신하라도 별안간의 샘을 내어 죽이기를 잘하였다. 그러므로 신돈도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역적모의를 하다가 탄로되어 멸문 당하였다. 음흉한 계교로 자식을 바꾸어 남의 집을 망쳐놓은 자의 말로다. 옛날 진나라의 시황 실부 여불위(呂不韋)가 그 좋은 전감이다.

 

모이노를 빌어다가 자기의 아들로 삼아 왕위를 승통케 하였던 공민왕은 또 하나 가소로운 일을 하였다. 그는 어여쁜 소년 한안, 홍륜, 권진, 홍관, 로의 다섯 사람을 극히 총애하였다. 자기 요량에도 자기는 생산을 못하는 신분이니까 다시 거짓 자식이라도 얻어 볼 생각으로 그 다섯 소년을 시켜 여러 비빈을 잠통(潛通)케 하였다. 그 중에도 정비, 혜비, 신비는 엄정히 거절하고 듣지 않았으나 익비는 위협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순종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잉태한 지 다섯 달에 내시 최만생이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비밀히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아들을 얻게 될 것이 기뻐 기꺼워하면서 만생을 보고 그러면 다섯 소년을 죽여 없애버려서 함구를 시켜야 되겠구나 했다. 그 말을 들은 만생이 생각하여 보니 자기마저도 함구통에 들기는 정하여 놓은 것이었다. 그는 크게 겁을 내어 연유를 다섯 소년에게 통지했다. 그리고 함께 모의하였다. 결과는 약밥 한 그릇으로 왕이 사살되었다.

 

대저 공민왕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무자하게 해야만 할 것이었다. 당치도 않은 그 족속 가운데서 골라내어 대를 이을 씨를 빌려다가 자기 씨를 만들려 하였으니 그것은 망하지 않은 집을 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람을 죽이려하면서 그 뜻을 누설하였으니 자기의 묘혈을 스스로 판 것이다.

공민왕과 같이 우매한 인물이 어디 있으랴. 이는 이 태조에게 나라를 양여(讓與)할 기초를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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