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參謀)와 집사(執事)
참모(參謀)와 집사(執事)
정도전(鄭道傳)이 함길도 함주(咸州)의 이성계를 찾아가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이성계는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정도전은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뜻한다'고 답했지만 동남방의 왜구 토벌을 위해 벼슬도 없는 포의한사(布衣寒士)가 북방의 이성계를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이때 정도전은 '다른 해에 서로 만날 수 있을까?/인간이란 돌아서면 지난 일이네(好在他年相見否/人間俯仰便陳?:진(陳)이 진(塵)으로 된 판본도 있음)'라는 시를 남기는데, '용비어천가' 12장은 '태조께 천명이 있음을 은연중 빗기는 말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가 고려 우왕 9년(1383). 이 만남으로부터 불과 10년 후에 조선이 개창된다.
허균(許筠)은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서 '태조는 왕이 되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정도전이 추대의 꾀를 먼저 내었다'면서 '고려에 있어서 정도전은 충신이 아니었다'고 비판했지만 허균의 생각과는 달리 이성계는 개국의 뜻이 있었다. 다만 무력만 있었지 머리가 없었기에 정도전의 머리를 빌려 조선을 개창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 정국을 토지개혁 정국으로 바꾼 것은 정도전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전략이었다.
'태조실록' 7년 8월조는 정도전이 취중에 '한(漢) 고조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썼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자신이 이성계를 써서 개국했다는 뜻이지만 이성계는 개의치 않고 즉위 후에도 정도전에게는 송헌거사(松軒居士)라는 자호(自號)로 편지를 보낼 정도로 높였다. 이것이 한국사에서 그리 흔치 않은 군사(軍師) 참모의 예이다.
참모사(參謀史)라 해도 과언이 아닐 중국사에 비해 한국사는 장(長)이 혼자 결정하는 장사(長史)의 성격이 강하다. 정상 부근에서 급격하게 추락하는 인물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計)는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모셨던 농부 출신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참모를 쓰는지 집사(執事)를 쓰는지만 보면 그 조직의 미래를 알 수 있다. 정권도 마찬가지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입력 : 2008.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