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고려는 조선의 타자(他者)인가?

hellofine 2011. 1. 25. 10:47

 

 

고려는 조선의 타자(他者)인가?

 

 

조선시대 선비들은 고려를 어떻게 보았을까? 안에서 보는 고려도 있지만 밖에서 보는 고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사람들은 대개 안에서 보는 시선에 익숙하기 때문에 바깥에서 보는 시선과 만나면 신기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가령 7세기 동로마제국의 역사가 시모카타가 무클리[Moukli:고구려]의 강인한 정신력과 높은 투지를 소개하고, 9세기 이슬람 학자 이븐 후르다드비가 알 실라[al-Shila:신라]의 풍부한 금과 쾌적한 환경을 소개한 사실을 생각해 보라. 동로마의 고구려, 이슬람의 신라라니! 또, 1755년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가 칭기즈칸의 위협에 시달리는 중국의 왕실을 고려가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작품을 발표하고, 1817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된 나폴레옹이 장죽을 물고 있는 조선 노인의 모습을 그림으로 구경한 사실을 생각해 보라. 볼테르의 고려, 나폴레옹의 조선이라니! 아마도 조선말기 유학자 김평묵(金平黙 1819~1891)이 고려의 풍속을 논한 주자(朱子)의 글과 마주쳤을 때의 기분도 처음에는 이와 비슷했을지 모른다. 주자의 고려라니! 하지만, 서세동점의 시대를 만나 물밀듯이 서양 세력이 조선에 들어오는 상황에서 고려를 돌아보는 그의 마음은 심각하기만 하다. 고려에서 문명을 발견할 수 있을까? 주자가 밖에서 본 고려는 고려의 본질과 부합하는 것이었을까?

 

고려 태조는 신라ㆍ백제 말기에 삼국을 통합하고 사방을 진무하였다. 광종은 송나라가 처음 일어나자 조금 사모하고 신복할 줄 알아 중화의 문물로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켰다. 그 이름(= 고려)에 사실 칭찬할 만한 것이 있었다. 이 때문에 풍속이 좋다고 주자의 문하에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책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열에 다섯, 일곱은 풀뿌리와 풀껍질을 사용하는 누추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자가 아직 만이(蠻夷)의 풍속을 띠고 있다고 한 것은 알맞은 말이다. 이른바 문교(文敎)의 모방(模倣)이라 한 것은 대개 쌍기(雙冀)가 들여온 사장(詞章)의 습관, 곧 수당(隋唐)에 시행된 과거(科擧)의 폐단에서 나온 것일 뿐, 요순삼왕(堯舜三王)이 돈전(惇典)과 용례(庸禮)1)를 가르치고 덕행(德行)과 도예(道藝)의 선비를 선발했던 것에 대해서는 의구히 몽매하여 무슨 일인지 몰랐다. 따라서, 고려가 국토를 겨우 보존한 것은 새는 데를 막고 터진 데를 기우며 구차하게 시간을 때운 것으로 귀결됨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었다. 이른바 백성으로 하여금 효제(孝悌)에서 일어나 용기 있게 나아가 친상사장(親上死長)2)의 마음과 정달진초(梃撻秦楚)3)의 기개가 있도록 하는 것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한 것을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천리가 밝지 못하고 인심이 바르지 못했고 국력을 떨치지 못하여 천 리나 되는 땅을 갖고서도 남을 두려워하였다. 거란이 강하면 거란의 신첩이 되고 여진이 강하면 여진의 신첩이 되며 몽고가 강하면 몽고의 신첩이 되었으니, 이는 이른바 사람들이 모두 남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릇 송(宋)의 동쪽 번국으로 신자(臣子)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다시 세 오랑캐를 섬겨 조빙(朝聘)하며 왕래했으니, 이를테면 어물전에 들어간지 오래 되면 비린내를 맡지 못함과 같은 것으로, 그 풍속이 좋다고 할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오랑캐였던 것이다.

 

심지어 몽고가 중국의 전체를 차지하자 몽고를 천지와 부모처럼 보았다. 몽고에서 왕비를 맞이해 들이고 몽고에 딸을 시집보내고 몽고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몽고에서 관리가 되어 의기양양하게 영광으로 알고 신나게 나라 사람들에게 뽐내었고 사람 사는 세상에 수치스런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세워 다루가치가 감국(監國)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군신장상(君臣將相)이 크고 작은 일에서 제어를 받고 뭇 백성이 모두 도탄에 추락하는데도 뉘우칠 줄 몰랐다. 심한 경우엔 자식이 자기 부모를 송사하고 신하가 자기 임금을 송사하고 아내가 자기 남편을 송사하였다. 이는 천지의 지극한 변고이고 고금의 지극한 역리(逆理)인데, 편안히 별 일 아닌 것으로 여겼다.

 

다행히 천운은 순환하여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으니 명나라가 한낮에 떠오르자 공민왕이 삼가 제후의 법도를 받들어 일변(一變)의 시기가 있을 줄로 기대했건만 폐왕 우와 그의 간사한 신하들이 북원(北元)에 납공하고 천조(天朝)에 대항하였다. 당시 포은(圃隱:정몽주) 같은 현인들이 존왕양이(尊王攘夷)와 배음향양(背陰向陽)의 대의를 진언하자 원수 같이 미워해 유배를 보내고도 혹 약하게 다스렸을까 두려워하였고 심지어 병사를 일으켜 반역을 저지르는 일4)까지 있었다. 이는 자잘한 소인과 추한 오랑캐의 행실이요 귀방(鬼方) 북적(北狄)의 등속이니 주자가 이 때 있었다면 또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려의 처음과 끝을 고찰하건대 불과 이런 정도이니, 고려가 오백 년이나 오래 이어진 것은 단지 『역(易)』에서 이른바 정질불사(貞疾不死)5)이고 공자가 이른바 망생행면(罔生幸免)6) 일 뿐이다. 지난날 우리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대의를 바루고 위로 천자의 총애를 받아 국조(國朝)의 문명을 열지 않았더라면 우리 동방은 비록 기자의 옛 나라이지만 사해(四海) 바깥 온갖 종류의 오랑캐와 어떻게 구별이 되었을 것이며 인류와 금수 사이의 존재가 되는 것을 어떻게 면했겠는가? 이것이 태조의 위대한 업적이 고금에 탁월할 수 있는 까닭이 되는 것,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재(尤齋:송시열) 선생이 천지가 뒤집히고 효종이 승하한 세상을 만나 지성으로 간간(懇懇)하게 태조의 휘호를 더하여 일시의 이목을 새롭게 하기를 청했던 것은 일식고폐(日食鼓幣)7)의 설에서 나온 것이니 그 마음이 참으로 슬퍼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유자들은 화가위국(化家爲國)8)의 설로 이를 반대하고 전혀 거룩한 태조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설령 여기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제 환공이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주실(周室)을 존숭했던 것, 한 고조가 의제(義帝)를 위해 항적(項籍)을 토벌했던 것에 대해 『춘추』와 『강목』에서는 칭찬하는 말만 있지 폄하하는 뜻이 없다. 이는 곧 해와 별 같이 빛나는 대의로 이른바 우주를 부지하는 동량(棟樑)이고 인생을 편안히 하는 주석(柱石)인 것이다. 식견이 이러하니 곧 난장이가 공연을 구경함9)과 같은지라 어찌 천하의 의리를 말할 수 있을까.

 

1) 돈전(惇典)과 용례(庸禮):돈독한 오전(五典)과 떳떳한 오례(五禮). 고요(皐陶)가 순(舜)에게 아뢴 말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오전은 곧 인간의 오륜(五倫)을 말하고 오례는 오륜에 대한 예절을 말한다.

2) 친상사장(親上死長):윗 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3) 정달진초(梃撻秦楚):진나라와 초나라 같은 강국을 몽둥이로 매질하는 것을 말한다.

4) 병사를 …… 저지르는 일:우왕대에 착수된 요동 정벌을 말한다.

5) 정질불사(貞疾不死):고질병이라서 죽지 않는다는 뜻. 『역(易)』「예괘(豫卦)」에 나온다.

6) 망생행면(罔生幸免):정직하지 않은 삶은 요행히 면한 것일 뿐이라는 뜻. 『논어(論語)』「옹야(雍也)」에 나온다.

7) 일식고폐(日食鼓幣):일식이 있으면 천자는 사직에서 북을 치고 제후는 사직에서 폐백을 사용하는 것이 예라는 뜻이다. 즉, 북을 치고 폐백을 사용하여 구식(救蝕)하는 실천을 한다는 의미이다.

8) 화가위국(化家爲國):자기 집안을 일으켜 새 왕조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9) 난장이가 공연을 구경함:난장이가 공연을 구경할 때 키가 큰 사람이 앞을 가려 공연을 잘 보지 못하는데도 사람들이 웃으면 덩달아 웃는 것을 뜻한다. 즉, 실체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한다는 의미이다.

 

- 김평묵(金平黙), 〈고려의 처음과 끝[高麗終始論]〉,《중암집(重菴集)》

 

 

 

 

 

▶ 기마도강도(이제현, 고려, 14세기)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320집《중암집(重奄集)》중암선생별집 권5, 잡저(雜著),〈고려종시론(高麗終始論)〉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해설]

 

포은 정몽주는 고려 말기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정몽주 하면 선죽교의 핏자국이 떠오를 정도로 그는 고려 왕조를 위해 충절을 바친 충신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는 고려의 충신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출중한 능력과 탁월한 업적으로 그의 생애에 많은 일화를 남겼고, 그러했기에 사람들이 정몽주를 기억하는 방식 역시 한결같지는 않았다.

 

조선 전기 사대부는 정몽주를 ‘동방 성리학의 원조[東方理學之祖]’라고 추앙하였는데, 이것은 정몽주가 고려 사회에서 처음으로 정주학의 방식으로 유교 경전을 해설했던 교육자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횡설수설(橫說竪說)’이라는 별명의 본뜻에 걸맞게 그의 성균관 강의는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명품 강의로 정평이 있었다.

 

조선 후기 사대부는 정몽주의 반원친명 활동을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에 투철한 존화양이의 정치적 실천으로 주목하고 성리학자 정몽주의 이념적 색채를 강화하였다. 원명 교체기 고려 앞에 놓였던 갈림길은 어떤 문명을 선택하느냐는 문제였다고 보고 중화문명을 선택한 조선 왕조의 이념적 선구자로 정몽주를 승화한 것이다.

 

문명의 선택. 그렇다. 조선시대의 개막이란 이 땅에서 획기적인 문명화가 시작하는 대사건이었다는 것. 조선왕조의 건국은 단순히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된 일국사적인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명과 함께 중화 문명이 출현한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처음 조선 태조의 휘호 지인계운(至仁啓運)이 일국사적 건국사관에 입각한 것이었다면 숙종대 송시열의 건의로 추시된 휘호 정의광덕(正義光德)은 세계사적 건국사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의가 이처럼 문명화에서 추구될 때 이에 비례하여 고려는 문명화 이전의 존재로 비추어지기 십상이었다. 특히, 19세기 성리학적 근본주의의 시각에서 보건대 고려의 시작에 유교적인 문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려 유학은 철학이 아닌 수사학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고, 고려가 세계질서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요, 금, 원의 북방 세력에 강하게 속박되어 있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문명의 바깥이었으며, 더구나 고려의 끝은 정치와 도덕이 모두 실종된 왕조 말기의 총체적인 혼란이었다. 주자가 원 간섭기의 고려를 보지 못한 것이 고려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을지 모른다.

 

김평묵의 고려시대 비평은 철두철미 문명의식 위에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 혹은 해방 후 현대 한국인이 조선시대를 비평하면서 구사하는 문명의식과는 성격이 다르다. 20세기 한국의 조선시대 비평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근대의 시선에서 전통을 계몽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근대와 현격히 대비되는 암흑의 구체제로 채색하는 전략이나 조선시대를 근대와 닮은 새로운 전통으로 발명하는 전략이나 모두 전통-근대의 구도 위에 있는 것이다.

 

반면, 19세기 조선의 고려시대 비평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고려적인 과거의 전통을 계몽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건국한지 오백 년이 다 되고 있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려시대는 전통으로 의식되지 않았다. 문명화된 조선은 이미 고려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문명이 탈각되는 순간 언제든지 문명화 이전의 존재, 즉 고려가 될 수 있었다. 고려는 조선의 타자였다.

 

김평묵이 살았던 시대는 성리학의 시선에서 보면 조선에서 문명이 탈각되는 과정이었다. 조선이 고려가 되는 과정이었다. 19세기 조선과 청의 밀착은 14세기 고려와 원의 유착에 버금가는 상황이었다. 19세기 한양(漢陽)이 연경(燕京)에 열중했던 상황은 14세기 개경(開京)이 대도(大都)에 열중했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청의 원세개가 조선정부를 간섭했던 상황은 14세기 원의 정동행성이 고려정부를 간섭했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 말기는 갈수록 고려 말기가 되고 있었다. 역사는 문명화 이전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여기서 김평묵의 문명의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시비를 논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서양 문명에 심취하여 새로운 문명의식으로 거듭난 ‘문명개화’ 현상이 있었던 것과 같이 이에 앞서 중화 문명에 심취하여 역시 새로운 문명의식으로 거듭난 ‘문명개화’ 현상이 있었음을 충분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김평묵도 문명인이었고 서재필도 문명인이었다. 그렇기에 김평묵의 고려 비판이나 서재필의 조선 비판이나 다같이 문명론에 수렴된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한의 타자로서 조선이 존재한 것이 아니듯 고려 역시 조선의 타자로서 존재한 것은 아니다.

 

 

글쓴이 / 노관범   2011. 1. 24. (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