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역사 상식

부채(扇)의 독백

hellofine 2010. 11. 17. 17:45

 

부채의 독백

2010. 11. 11. (목)

더워서 사용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기뻐하랴
서늘해서 버려지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내랴
처해진 상황에 순응하고 주어진 분수에 편안할 뿐

   
 

炎而用何喜。凉而舍何慍。順所遇。安厥分。
염이용하희。량이사하온。순소우。안궐분。

- 기준(奇遵, 1492∼1521)
 〈육십명(六十銘)〉,《덕양유고(德陽遺稿)》 (한국문집총간 25집)

[해설]

  기준 선생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때 아산, 온성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유배지에서 교살되었습니다. 이 글은 선생이 온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주변에 있는 사물 60가지로부터 교훈을 취하여 쓴 60개의 명(銘) 중 하나입니다.

  여름철 한창 더울 때 너도나도 찾던 부채,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이 때문에 추선(秋扇) 즉 ‘가을부채’라고 하면 버림받은 여인이 자신의 신세를 빗대어 탄식하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 게 인지상정이고 세상 이치라고는 하지만 뭔가 좀 씁쓸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준 선생은 반드시 그렇게만 볼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더우니까 필요해서 나를 쓰고 추우니까 필요하지 않아 안 쓰는 것일 뿐, 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사용되고 버려지는 것에 대해 일희일비하겠는가? 그저 처해진 상황에 순응하고 주어진 분수에 편안하면서 내 할 일을 하면 될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글쓴이
조경구(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