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조선시대의 능침제도

hellofine 2010. 10. 24. 23:30

 

이 글과 사진은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추진 종합 학술 연구 보고서』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힙니다.

조선시대의 능침제도(1)
  • 조선시대의 왕릉은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이 들어서는 터는 고려시대부터 중요하게 고려한 풍수에 근거하여 택지(擇地)되었으며, 한번 조성한 능이라도 풍수가 나쁜 것으로 판정되면 천장하였다.

  • 조선 초기 능제는『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는데, 조선 건국 후 조성한 정릉(貞陵), 건원릉(健元陵), 제릉(齊陵)을 통하여 차차 정착되었다. 그리고 그 기본 형식은 조선시대 전시대를 통하여 이어진다.

  • 조선 건국 후 최초로 조성된 능은 정릉이다. 중구 정동에 위치하였던 정릉은 조영 12년만인 1409년(태종 9)에 혜화동 밖 사하리(지금의 정릉동)로 이장되어 지금은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당시의 능침제도는 잘 모르지만 정릉 봉분의 병풍석을 뜯어 보수한 광통교(지금의 광교)의 석재 일부를 보면, 병풍석 문양은 공민왕의 현릉, 노국공주의 정릉과 비슷하다고 한다.

  • 1407년(태종 7)에 태종은 조선이 건국되기 전 돌아가신 그의 생모인 신의왕후 한씨의 묘를 박자청(박자청은 정릉 조성 시 실무를 담당하였다.)에게 왕비릉의 규모로 확장케 하는데, 이 릉이 바로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조성되어 있는 제릉이다. 이 제릉도 공민왕의 능제를 크게 참고한 것으로 본다. 그 후 박자청은 1408년(태종 8) 5월 24일 서거한 태조의 건원릉의 축조를 맡게 되는데, 건원릉도 공민왕릉을 모델로 삼았다. 건원릉 조성 당시 태종과 신진 성리학자들은 현실을 회격실(灰隔室)로, 원로 중신들은 전통적인 석실(石室)을 주장하는데, 태종은 세자를 종묘에 보내어 점을 치게 해서 점괘에 따라 석실로 정하게 되고(『태조실록』 권16, 8년 7월 임신), 이 제도는 조선 초기 능침제도로 확정된다.

  • 건원릉 입구에는 능역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있다. 이 홍살문에서 박석을 깐 참도가 정자각 정면으로 기단 아래까지 가다가 동쪽으로 꺾여 정자각 기단 동쪽의 계단으로 연결된다. 참도 중에서 높은 쪽의 신도는 정자각 동쪽의 소맷돌이 있는 계단으로 이어져 정자각 뒤 능의 강(岡)으로 이어지고, 낮은 쪽의 어도는 정자각 기단 동쪽의 평계단으로 올라가 기단 서쪽으로 내려오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정자각 뒤쪽에는 예감을 만들었으며, 정자각 동쪽에는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을 세웠고 비각 맞은편에는 소전대석을, 비각 남쪽에는 고방을 두었으며, 재방(齋房)은 그 밑으로 두었다.

  • 건원릉의 능원은 3단으로 구성되었다. 현궁은 고려의 능침 제도를 따라 지하 석실로 하였고, 그 앞에는 부장품을 위한 석실 곁방을 내어 지었으며, 석실의 덮개석 주위 평지 주변에는 호석을 둘렀다. 이 호석은 지대석 위에 우석(隅石)을 놓고 사이사이에 면석 12기를 세웠으며, 그 위에 만석(滿石)을 얹은 뒤 모서리마다 인석(引石)을 놓고 있다. 그 주위에는 석난간을 둘렀고, 석난간과 호석 사이에는 박석을 바깥쪽으로 경사지게 깔아 배수와 보강의 기능을 겸하도록 하였다. 난간석 밖 동, 서, 북 3면에는 높이 3, 4척의 곡장을 쌓았으며, 담장 안에 석양(石羊) 넷을 동서로 나누어 세웠고 석호(石虎) 넷은 북쪽에 둘, 동, 서의 석양 사이에 하나씩 두어 봉분 밖을 향하며 서있다.

조선시대의 능침제도(2)
  • 능 앞에는 석상을, 좌우로 망주석을 하나씩 세워 서로 대하도록 하였고 그 앞으로 한 단을 낮추어 중앙에 장명등을 세웠으며 이 앞 양쪽에 문석인 각각 하나씩과 석마(石馬) 한 필씩 세웠고, 다시 한 단을 낮춘 곳에 무석인 한 쌍과 석마 한 필씩 세웠다. 문무석인 뒤에 세운 석마(石馬)는 고려 시대 능침제도에는 없던 것이다. 건원릉에 봉분을 12면 호석과 석난간으로 두르고, 봉분 동, 서, 북에 곡장으로 조성한 것은 조선시대 능침제도의 기본이 된다. 고려 말 능제와 건원릉의 제도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으나 세부적으로 석수 배치라든가, 능원 남쪽에 둔 단의 숫자에 차이가 있다.
    사진-건원릉 금천교와 홍살문/건원릉 앞으로 본 전경/건원릉 후면/건원릉 석물/건원릉 난간석
  • 석실을 능제로 채택하는 조선 초기의 능침제도는 5대 문종까지 지속되다가 7대 세조대에 이르러 바뀌는데, 이 때 바뀐 제도는 조선시대 능침제도의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세조는 자신의 유택을 회격(灰隔 :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방식)으로 하라는 유명(遺命)을 내리는데, 이에 따라 세조의 능침인 광릉(光陵)은 회격으로 만들어졌으며 봉분 주위에 두르는 호석을 생략하였다. 호석은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에서부터 다시 쓰이다가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천장할 때부터는 아주 없어져서 쓰이지 않게 되었다.
    사진-광릉 입구/광릉 봉분/광릉 석물 1/광릉 석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