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운종중/조선 역사

왕릉 기제사에는 조선의 歷史가 흐른다

hellofine 2010. 8. 7. 14:52

 

역 사 학 적 관 점 으 로 본 조 선 왕 릉

 

왕릉 기제사에는 조선의 歷史가 흐른다

 

 

어릴 소풍이나 놀이의 장소로 왕릉을 찾곤 하였다.

그러한 왕릉이 이제 어엿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에는 왕릉에서 지내는 기제사가 종종 언론의 관심거리가 되곤 한다.

기제사는 왕릉에서 지내는 여러 제사 중의 하나에 불과했지만

현재까지 계속 지내는 유일한 왕릉 제사로서 역사적인 의미는 결코 적지 않았다

 

조선왕릉의 조성과 왕릉 제사의 의미

 

조선의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 중 북한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비 신의왕후(神懿王后1337∼391)의 능인 제릉(齊陵)과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정종 및 그 비 정안왕후(定安王后1355∼412)의 능인 후릉(厚陵)을 제외한 나머지 40기가 남한에 남아 있다.

 

「예기」에, 천자는 승하한 뒤 7개월만에, 제후는 5개월만에 능에 장례를 치른다고 규정되어 있다. 조선의 국왕은 제후에 해당하므로 5개월만에 장례를 치렀다. 이러한 규정은 조선의 국가전례서인「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명시되어 있다. 국왕이나 왕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5개월만에 왕릉에 묻혔다. 다만, 5개월째 되는 달에 길일(吉日)이 없을 때는 그 다음 달에 날을 잡는 예외도 있었다. 정조는 6월 28일에 승하해 10월에 장례를 치렀어야 했지만 10월 안에 길일이 없어 11월6일에 하관(下棺)하였다.

 

국왕이나 왕후가 승하하면 곧바로 능호(陵號)를 정하고, 왕릉으로 삼을 만한 좋은 터를 마련한 뒤 왕릉의 조성 공사에 돌입하여 장례를 치르기 전에 완공하였다. 40기의 왕릉이 대체로 이와 같은 과정을 밟아조성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가령, 반정(反正)을 통해 국왕이 된 인조는 즉위한 뒤 자신을 낳아준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1580∼619)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면서 그의 무덤을 변화시켰다. 정원대원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仁嬪金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나정원군으로 졸했기 때문에 처음에 그의 무덤은 묘(墓)였다. 그러다가 인조가 즉위하자 정원대원군의 묘를‘흥경원(興慶園)’, 어머니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의 묘를‘육경원(毓慶園)’이라 일컬었고, 흥경원을 육경원으로 옮기면서 합해서 흥경원이라 칭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종으로 추숭되면서 장릉(章陵)으로 격상되었다. 정원대원군의 무덤은‘묘(墓)→원(園)→능(陵)’등 여러 형태의 무덤 형식을 거쳐 마침내 왕릉이 되었다.

 

단종의 능은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의 신분으로 졸했기 때문에 노산묘(魯山墓)로 불리었다가 숙종대에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장릉(莊陵)으로 조성되었다. 단종의 능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武人石)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하였다. 또 태조의 두 번째 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 ?∼396)는 태조가 승하한 뒤 아들인 태종에 의해 그녀의 능이었던 정릉(貞陵)이 폐릉되었다가 현종대에 이르러 태조의 계비로 인정되어 다시 복위되고 능도 왕릉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반면, 위의 경우와 반대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주목할 만한 다른 사례도 있다. 국왕으로 재위하였다가 실정(失政)으로 인해‘군(君)’으로 격하된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 경우다. 이들은 이후에도 국왕으로 복위되지 못해 그들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묘(墓)’로 남아있다.

 

한편,「예기(禮記)」「교특생(郊特牲)」편에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다. 이를 ‘신혼체백(神魂體魄)’이라 하는데, 신혼은 신주(神主)에 깃들어 사당에 봉안되고, 체백은 무덤인 능(陵)이나 묘(墓)에 모셔졌다. 그 때문에 유교 사회에서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지만 왕릉에서도 지냈다. 혼백이 깃든 신주를 봉안한 사당과 체백을 모신 능∙음식을 바치며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제사를 통해「논어(論語)」에서 말하는 것처럼 돌아가신 뒤에도 살아 계실 때와 같이 뒤에도 선조(先祖)에게 효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왕릉에서의 제사는 침전(寢殿)이라는 공간에서 지냈다. 침전은 능실(陵室)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3칸으로 이루어진 정자형(丁字形) 건물이었기 때문에 보통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고종대에 이르러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체가 변모되면서 정자각이란 명칭 대신「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침전’으로 일컬었다. 침전의 형태도 기존 3칸의 정자형에서 5칸의 일자형(日字形)으로 바뀌었다.

 

조선후기 왕릉에서의 기제사 설행

 

조선 전기에 왕릉에서 지낸 의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능에 절하는 의식인 배릉의(拜陵儀)가 있었다. 다음으로 춘하추동 사시(四時)와 정조(正朝)∙동지(冬至)∙한식(寒食)∙단오(端午)∙중추(中秋) 등 속절(俗節), 초하루와 보름에 능에 제사 지내는 사시급속절삭망향제릉의(四時及俗節朔望享諸陵儀)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여기에 추가하여 왕릉에서 기신제(忌晨祭)를 지냈다. 기신제는 돌아가신 날 죽은 사람을 추모하며 지내는 제사로, 삼년의 상례를 마치고 신주를 사당에 봉안한 뒤 해마다 기일(忌日)에 지냈다. 조선 전기에는 문소전(文昭殿)에서 기신제를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 문소전이 소실된 후 복건 되지 않음에 따라 왕릉에서 지내게 되었다.

 

기신제를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모든 국왕이나 왕후가 기일에 기신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신제는 일반적으로 제사 받는 대상이 현 국왕의 4대조인 고조(高祖)까지라고 알려져 있다.

그 윗대의 조상은 친연(親緣)이 다했다고 여겨서 지내지 않았다. 곧,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를 기준으로 한 4대조를 가리켰는데, 왕실의 기신제는 예외도 존재하였다. 4대를 벗어나더라도 신주가 종묘의 정전(正殿)에 봉안되어 있을 때와 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된 국왕과 왕후들은 계속해서 기신제를 받았다. 불천지주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를 비롯하여 후대에 공덕(功德)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지지 않고 종묘 정전에 계속 남아 있는 신주였다.

 

한편, 종묘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간 국왕과 왕후들은 기신제를 받지 못하였다. 그 대신 이들에게는 한식(寒食)에만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되었다. 예를 들면, 단종은 친진(親盡)이 지난 지 한참 뒤인 1698년(숙종 24)에 복위되었지만 종묘 정전이 아닌 영녕전으로 봉안되면서 국왕으로 복위된 뒤에도 기신제를 받지 못하였다. 이처럼 종묘 정전에 남느냐 영녕전으로 옮겨지느냐에 따라 봉안된 신주들에 대한 기신제의 설행 여부가 판가름 났다. 기신제의 설행 여부를 통해 후대인들의 선대왕 평가를 엿볼 수 있다.

 

현재 종묘 정전과 영녕전에 봉안된 신위는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으로 국체가 바뀐 뒤이므로 제후국의 4대조가 아닌 6대조, 그리고 태조와 불천지주들에게 기신제를 지낼 수 있다. 종묘의 체제가 제후국일 때에는 태조와 현 국왕의 4대조까지 오묘제(五廟制)로 운영되지만 천자국이 되면 태조와 현 국왕의 6대조까지 칠묘제(七廟制)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불천지주들은 5묘, 7묘라는 대수(代數)에 포함되지 않았다.

 

<현재 종묘 정전의 신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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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

7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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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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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

17

18

19

神主

太祖

太宗

世宗

世祖

成宗

中宗

宣祖

仁祖

孝宗

顯宗

肅宗

英祖

正祖

純宗

文祖

憲宗

哲宗

高宗

純宗

昭穆

太祖+不遷之主

1昭

1穆

2昭

2穆

3昭

3穆

七廟

太祖+不遷之主

1世

1世

1世

1世

1世

1世

 

<현재 영녕전 정전과 동서 협실의 신위>

西夾室

正殿

東夾室

5室

6室

7室

8室

9室

10

1室

2室

3室

4室

11室

12室

13室

14室

15室

16室

定宗

文宗

端宗

德宗

睿宗

仁宗

穆祖

翼祖

度祖

桓祖

明宗

元宗

景宗

眞宗

莊祖

英親王

 

조선은 1897년 국호를‘대한(大韓)’으로 정하면서 제후국에서 천자국으로 국체가 변모되었다. 500여 년간 지속된 제후국 조선 대신 천자국 대한제국으로 거듭나면서 모든 체제나 전례(典禮)가 황제국 제도로 승격되었다. 왕릉도 황제릉으로 바뀌면서 여러모로 변모되었다.

 

<글 ∙ 이현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